연중 제24주일 ‘가’해(마태 18,21-35)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4)라는 라멕의 선언처럼, 피의 보복을 무한대로 이어가던 구약의 옛 전통은 시대가 흐르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보복법으로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을 뿐, 참된 용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세 율법은 주로 공동체 안에서의 용서를 강조하였고, 예수님 시대의 라삐들조차 세 번 정도 봐주면 자비를 다한 것으로 여겼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큰 마음을 먹고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거듭거듭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주제 전개: ① 용서하시는 하느님 ② 큰 용서를 입은 인간 ③ 서로 용서해야 하는 인간)

1독서(집회 27,30―28,7)는 이웃의 불의에 분노하거나 복수하려 들지 말고 용서하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독서(로마 14,7-9)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산 이들과 죽은 이들 모두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무조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도 죽음도, 심지어 용서마저도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미 큰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께 속한 사람의 삶이다. 복음(마태 18,21-35)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한계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명하신다. 그리고 임금에게 만 탈렌트라는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모질게 대해 결국 옥에 갇힌 종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만 탈렌트는 인간의 힘으로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이고, 백 데나리온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비교할 수 없는 작은 빚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무한하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 비유는 단순히 용서의 횟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엄청난 용서를 받은 존재인지, 그렇기에 동료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G. K. 체스터턴은 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느님의 관대한 자비와 용서에 비해,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인색하고 옹졸한지 비유는 선명하게 대조해 준다.

우리가 나에게 상처 준 이를 용서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보다 더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단순히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훈련해서도 아니다. 내가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회개를 바라지만, 그 회개를 용서의 조건으로 삼지는 않는다. 때로는 상대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나의 용서를 무시할 수도 있다. 내가 용서하는 진짜 이유는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나를 새롭고 자유로운 자리에 놓아주며,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닮도록 한다.

임금에게 어마어마한 자비를 입고도 동료에게 모질었던 종은, 정당하지만 냉혹하고, 정직한듯하지만 잔인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섣부른 온정주의와 선의를 혼동하고, 용서를 단지 일시적인 정치적 계산으로 착각하는 모습이다. 살다 보면 참으로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용서는 감정이나 본능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이다. 나에게 가해진 불의 앞에서 맞대응으로 내 빚을 끝까지 받아내려 할 때, 권리라 할 것도 없는 알량한 권리를 폭력으로 행사하려 할 때, 그것은 상대를 가두기보다 나 자신을 가두는 감옥의 창살을 하나 더하는 꼴이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는 말속에는 여전히 상대를 붙들어 두려는 마음이 남아있을 수 있다. 참된 용서는 기억 자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더 이상 증오를 낳지 않도록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용서하는 이유는 내가 용서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용서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보면 다시 상처가 터지고 몹시 아프지만, 내가 살기 위해 자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용서는 얽힌 실타래를 내가 먼저 푸는 것이며, 나 자신과 상대방을 옭아매는 덫과 끈을 놓아주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을 피해자로만 묶어두는 쓸데없는 죄책감이나 피상적인 포퓰리즘이 아니다. 또한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무조건 참아내는 무기력한 굴복도 아니다. 도리어 용서는 나를 향한 용서만을 요구하는 이 불안한 시대에, 하느님 앞에 내가 먼저 참된 죄인임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거룩한 겸손이다. 존 헨리 뉴먼 성인은 하느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온 세상을 무無에서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죄와 고통만큼은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아 그 짐을 직접 짊어지심으로써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죄를 극복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의 마음, 나아가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이 힘겨운 행위조차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 모두의 짐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용서의 자녀는 어른스럽고 성숙하다. 강하며 단호하다. 남에게 용서를 받을 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겸손하게 용서와 은총을 청할 줄 안다. 하느님은 당신을 향해 돌아서는 자녀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심을(예레 31,34 히브 8,12 참조) 늘 기억해야 한다.

복음에서 비유의 핵심은 바로 임금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는 이 한마디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맡겨진 선물이다.

당신 아드님께 가해지는 온갖 폭력과 모욕을 아드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견디시고 용서하신 성모님, 저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서로를 용서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 아드님의 피로 저희가 얼마나 큰 용서의 은혜를 입었는지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맺혀있는 응어리는 무엇인가?

– 나는 과연 하느님의 큰 용서를 입었다는 깊은 자각 속에 살아가는가?

– 지금 내가 용서해야 할 이를 선뜻 용서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 나에게서 자비롭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태 18,21-35(연중 제24주일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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