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임 없이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이 부족했던 성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 안타깝게도 수많은 영혼이 저지르고 있는 이 잘못에 대해, 예수님 외에 그 누가 감히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면,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은총을 이미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순간,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총은 이미 주어진

은총의 옷자락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여라. 그리하여 너희가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고, 너희 마음이나 눈이 쏠리는 것, 곧 너희를 배신으로 이끄는 것에 끌리지 않도록 하는 술이 되게 하여라. 그래서 너희는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실천하여, 너희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라.”(민수 15,38-40) 이 말씀에 따라 유다인에게 옷자락은

용서容恕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 공자에게 평생 간직할 만한 한 글자를 청하자, 공자는 ‘용서할 서(恕)’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용서’는 동양의 고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어휘이기도 하다. 구약을 넘어 신약에 이르기까지, 용서는 인간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심 개념으로 자리한다. 신약성경에서 ‘용서’는 대체로 세 가지 어휘로 드러난다. 먼저 「ἀφίημι(아피에미)」는 빚이나 죄를 면제해 주고 더

듣다(아쿠오, ἀκού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사야 6,9-10을 인용하시며 그 뜻을 설명해 주신다.(마태 13,10-17 참조) 이 대목에서는 ‘듣다(ἀκούω)’라는 동사가 여러 번 반복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들음’을 묵상하기에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들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으려는 마음이 없어서

표징(세메이온, σημεῖον)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사도 2,22)는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기적’, ‘이적’, ‘표징’이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신약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에서는 이를 각각 δυνάμεσι(← δύναμις, dynamis), τέρασι(← τέρας, teras), σημείοις(← σημεῖον, sēmeion)로 표현하며,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miracles, wonders, signs로 옮긴다. 이 세 용어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면서도 강조점이 다르다. ‘뒤나미스’는 사건 안에서

자비(엘레오스, Ἔλεος)

예수님께서는 호세아서 6장 6절을 인용하시며 “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원한다”(마태 9,13;12,7)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두 차례 반복된다. ‘자비’라는 말은 공관복음에 주로 등장하며, 특히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직접 나오기보다 ‘사랑’이라는 말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은 분명하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트집 잡으려 할 때였다. 마태오 9장에서는

손을 대다(합토마이, ἅπτομαι)

마태오 복음 9,18-26에서 회당장은 예수님께 “손을 얹어” 딸을 살려주시기를 청한다. 한편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 믿고 다가가 실제로 그 옷자락에 “손을 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어 다시 살리신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는 ‘손을 댐’, 곧 접촉이라는 행위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기서 “손을 대다”라는 표현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사도

요한복음에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라는 똑같은 표현이 세 번 등장한다.(요한 11,16;20,24;21,2) 우리는 그의 출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어쩌면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였을지도 모른다.(요한 21,2참조)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주로 요한 복음서에서 온 것이다. 공관 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카)에서 그는 그저 열두 사도의 명단에만 등장할 뿐이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그의 이름인 토마스(Thomas)는 ‘두 배(더블)’ 또는 ‘쌍둥이’를

“눈을 들어”(에파이로, ἐπαίρω)

성경 안에서 “눈을 들어”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시선의 이동을 넘어, 인간 존재가 어디를 향해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몸짓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눈을 드시어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들어 올리다”, “높이다”를 뜻하는 ‘에파이로(ἐπαίρω)’는 이러한 움직임을 잘 드러낸다. 물론 성경은 이와 유사한 여러 표현을 함께 사용하지만, 그 핵심은 하나로 모인다. 곧, 인간의

참새(스트루디온, στρουθίον)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οὐχὶ δύο στρουθία ἀσσαρίου πωλεῖται; καὶ ἓν ἐξ αὐτῶν οὐ πεσεῖται ἐπὶ τὴν γῆν ἄνευ τοῦ Πατρὸς ὑμῶν.)”(마태 10,29) 모세오경처럼 다섯 개의 큰 설교로 구성된 마태오 복음에서, 제10장은 이른바 ‘파견 설교’에 해당한다. 이 설교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