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사도

요한복음에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라는 똑같은 표현이 세 번 등장한다.(요한 11,16;20,24;21,2) 우리는 그의 출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어쩌면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였을지도 모른다.(요한 21,2참조)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주로 요한 복음서에서 온 것이다. 공관 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카)에서 그는 그저 열두 사도의 명단에만 등장할 뿐이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그의 이름인 토마스(Thomas)는 ‘두 배(더블)’ 또는 ‘쌍둥이’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마태 10,17-22)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지만, 한국에서 선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이자 한국 교회의 대표 성인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과 겹치므로 교회의 배려에 따라 성인과 함께 성대한 신심 미사를 드린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계시는 분들께서는 연중 제14주일 ‘가’해(마태 11,25-30)의 2023년 강해를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제1독서(2역대 24,18-22)에는 우상을 섬기던 요아스 임금(기원전 835~796년경, 40년간 통치)과 유다에 그들을

연옥의 칠죄종이 지옥에는 없다?

13세기 단테의 <신곡> 3부작(지옥·연옥·천국) 중 연옥편에서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색욕이라고 하는 7가지 죄(칠죄종七罪宗)는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죄가 연옥과 지옥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듯이 보인다. 연옥에서는 이 죄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지옥에서는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1. 연옥: 죄를 정화하며 변화되는 자리 “죄는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중 제13주일 ‘가’해(마태 10,37-42)

제1독서(2열왕 4,8-11.14-16ㄴ)는 수넴 여인과 그녀의 남편이 엘리사 예언자에게 베푼 환대를 전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대접하며 머물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다. 이에 엘리사는 자녀가 없던 그 부부에게 아들을 약속한다. 이는 단순한 보상의 논리가 아니라, 무상으로 베풀어진 환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다시 흘러넘치는 모습이다. 곧,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사랑의 순환이다. 제2독서(로마 6,3-4.8-11)에서 바오로

“눈을 들어”(에파이로, ἐπαίρω)

성경 안에서 “눈을 들어”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시선의 이동을 넘어, 인간 존재가 어디를 향해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몸짓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눈을 드시어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들어 올리다”, “높이다”를 뜻하는 ‘에파이로(ἐπαίρω)’는 이러한 움직임을 잘 드러낸다. 물론 성경은 이와 유사한 여러 표현을 함께 사용하지만, 그 핵심은 하나로 모인다. 곧, 인간의

슈퍼 스타와 스퍼스 수녀

미국을 ‘농구의 나라’라고 말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를 연고지로 하는 스퍼스라는 농구팀(San Antonio Spurs)이 있는데, 여기에는 ‘스퍼스 수녀들’이라는 수녀님들도 있다. 스퍼스는 2025~2026 시즌에 맹활약하며 파이널 무대까지 진출했으나, 아쉽게도 뉴욕 닉스에게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패하며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스퍼스 팀에는 빅터 웸반야마(Wembanyama)라고 하는 슈퍼 스타급 선수가 있는데, 그가 지난 6월 4일

외로울 고孤

텃밭에 오이를 비롯하여 여러 열매가 달리는 계절이다. ‘외로울 고孤’는 ‘아들 자子’와 ‘오이 과瓜’의 결합이다. ‘아들 자子’야 워낙 익히 아는 글자이므로 사족이 필요 없다. ‘오이 과瓜’는 양쪽 덩굴손과 덩굴손 사이에 덩그러니 맺은 오이의 모습을 그렸다. 오이나 참외, 호박이나 박과 같이 마디 하나에 열매 하나를 맺는 수많은 덩굴 식물이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오이를 글자 이름으로

신애론(2-11)

제11장 우리가 아주 탁월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의 자비에다 탓을 돌릴 수는 없다 오, 하느님! 테오티모여,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깨우침을 받아들여 그 빛을 충분히 이용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짧은 기간에 성덕의 진보를 크게 할 수 있겠는지! 항상 솟아나는 큰 샘이 있다고 하자. 그 시냇물이 직접 전답에 들어갈 수는 없고 다만 크고 작은 물도랑을 거쳐 여기저기로

연중 제12주일 ‘가’해(마태 10,26-33)

제1독서(예레 20,10-13)는 “마고르 미싸빕(מָגוֹר מִסָּבִיב)”, 곧 ‘사방의 공포’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상징적 언어이다. 그는 친구들마저 자신을 감시하는 현실, 곧 세상 전체가 적대적 공간으로 변해버린 상황을 탄식한다. 그러나 그 절망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내 곁에 계신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주님께 맡기고, 악인들의 손에서 구해주실 하느님을 신뢰하며 찬양한다. 제2독서(로마

참새(스트루디온, στρουθίον)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οὐχὶ δύο στρουθία ἀσσαρίου πωλεῖται; καὶ ἓν ἐξ αὐτῶν οὐ πεσεῖται ἐπὶ τὴν γῆν ἄνευ τοῦ Πατρὸς ὑμῶν.)”(마태 10,29) 모세오경처럼 다섯 개의 큰 설교로 구성된 마태오 복음에서, 제10장은 이른바 ‘파견 설교’에 해당한다. 이 설교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