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와 와인

가톨릭 신자들이 와인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례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수천 개 수도원의 지하 저장고(셀러)에서 와인을 가지고 행한 일들은 와인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와인은 그리스도교보다 수천 년이나 더 오래되었다. 코카서스 지역에서 와인을 만들었다는 증거는 적어도 기원전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모두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기 훨씬

듣다(아쿠오, ἀκού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사야 6,9-10을 인용하시며 그 뜻을 설명해 주신다.(마태 13,10-17 참조) 이 대목에서는 ‘듣다(ἀκούω)’라는 동사가 여러 번 반복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들음’을 묵상하기에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들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으려는 마음이 없어서

연중 제17주일 ‘가’해(마태 13,44-52)

제1독서의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얻은 이는 복음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우친 이들이다. 이 신비는 제2독서가 말하는 부르심을 받고, 미리 뽑히고, 미리 정해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성취이다. 제1독서(1열왕 3,5-6ㄱ.7-12)에서는 솔로몬 왕(대략 기원전 990년~931년경)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꿈에서 주 하느님께 장수長壽나 부富,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 않고 분별력인 “듣는 마음”을 주시라고 청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드는 “지혜롭고

표징(세메이온, σημεῖον)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사도 2,22)는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기적’, ‘이적’, ‘표징’이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신약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에서는 이를 각각 δυνάμεσι(← δύναμις, dynamis), τέρασι(← τέρας, teras), σημείοις(← σημεῖον, sēmeion)로 표현하며,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miracles, wonders, signs로 옮긴다. 이 세 용어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면서도 강조점이 다르다. ‘뒤나미스’는 사건 안에서

연중 제16주일 ‘가’해(마태 13,24-43)

제1독서(지혜 12,13.16-19)는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 정의의 원천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과 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분께서는 무엇이든 원하시는 때에 이루실 능력을 지니셨지만, 억누르기보다 관대하게 통솔하시고, 인자仁慈하심을 체험하게 하시며, 마침내 회개의 기회를 열어 주시는 희망의 하느님이시다. 제2독서(로마 8,26-27)에서 바오로 사도는 두 절밖에 안 되는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의 나약함 한가운데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증언한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우시며, 말로

신애론(2-12)

제12장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따르든지 물리치든지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온전한 자유에 우리를 맡기셨다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나는 여기서 한순간에 늑대들을 양으로, 바위를 샘물로, 박해자를 강론가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기적적 은총에 대하여 말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전능하신 성소에 대한 것은 한편으로 제쳐놓겠으니, 즉, 거룩하고도 맹렬한 부르심 같은 것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작용으로써 어떤 선발된 영혼들을 극단적인 악습에서

선교지에서 온 메모

직원 선생님과 함께 은행에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발이 미끄러지며 그만 진흙탕에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1인 인출 한도가 있어 둘이 함께 가야 돈을 많이 찾을 수 있었는데,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우선 눈앞의 상황부터 수습해야 했다. 부끄러움을 동력 삼아 벌떡 일어나 가방 속 은행 서류가 젖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나는 집으로

자비(엘레오스, Ἔλεος)

예수님께서는 호세아서 6장 6절을 인용하시며 “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원한다”(마태 9,13;12,7)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두 차례 반복된다. ‘자비’라는 말은 공관복음에 주로 등장하며, 특히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직접 나오기보다 ‘사랑’이라는 말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은 분명하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트집 잡으려 할 때였다. 마태오 9장에서는

성 베네딕토와 겸손의 사다리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기원전 535~기원전 475년)는 “위로 올라가는 길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결국 같은 길이다.”라고 말했다. 베네딕토 성인은 성경 곳곳에서 이러한 역설을 발견한다. 복음서의 주님 말씀 속에 이 점은 명쾌하게 반복하여 담겨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성인은 설명한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모든 스스로를 높임이

연중 제15주일 ‘가’해(마태 13,1-23)

오늘 전례의 말씀은 한 가지 흐름, 곧 ‘희망’이라는 주제로 서로 이어져 있다. 제1독서는 씨앗이 반드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희망을 노래하고, 제2독서는 피조물과 함께 우리가 기다리는 자유,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희망을 전해준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이 희망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신다. 제1독서(이사 55,10-11)에서 주님께서는 비와 눈이 땅을 적셔 씨 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