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하늘의 가르침

음력 팔월 보름, 연중 가장 커다란 달이 뜬다는 한가위 추석(秋夕)이다. 중국에서는 중추절, 일본에서는 십오야(十五夜)라 부르던가. 빛나는 태양 아래 밝은 대낮을 지나온 이들에게, 무섭고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 마침내 두둥실 차오르는 만월(滿月)은 그 자체로 희망이요 고마움이었다. 눈이 부셔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낮의 태양도, 조금씩 형상을 바꾸어 빛을 비추다가 한 달에 한 번 커다란 만월이 되어 절로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밤의 달도, 우리 인생에는 내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 존재함을 깨우쳐 주는 ‘하늘의 가르침’이다.

농사일이 적당히 갈무리되고, 헐떡이던 여름과 웅크릴 겨울 사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햇곡식과 햇과일이 차례로 익어간다. 객지에 나가 있던 식구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모처럼 함께 술을 빚고 떡을 만들어 조상께 차례를 지낸다. 식구와 이웃 간에 따스한 정을 나눈 뒤 성묘하러 산에 올라 조상님들께 절을 올린다. 낮에는 남자들이 씨름판에서 힘을 겨루고 여자들은 널을 뛰며 흥겹게 놀다가, 저녁이면 온 식구가 둥근 달 아래 모여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강강술래를 추는 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가위 명절이다.

한가위에 가장 많이 들려오는 정겨운 덕담은 단연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일 것이다. 식구와 이웃이 풍요로움 속에서 너나없이 등 따습고 배부른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쯤 될까. 많은 이가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뒷부분에 힘을 주어 알아듣지만, 나는 오히려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앞부분에 더 깊은 삶의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농경에 기반을 둔 우리 민족은 거짓말하지 않는 땅을 믿어 씨를 뿌리고, 수고의 땀을 흘린 만큼 수확하며 살아가는 정직한 이들이었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불량한 마음이요, 하나를 뿌린 뒤 둘이나 셋, 심지어 열을 거두려는 것은 도둑 같은 심보다. 그저 풍성하게 먹을 것만을 탐할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땀 흘린 자기 몫만큼만 누리겠다는 정직성을 먼저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한가위의 본래 뜻은 무엇보다도 ‘감사’와 ‘보답’에 있다. 한가위를 뜻하는 또 다른 우리말 ‘가배(嘉排)’는 한가운데라는 뜻과 함께, 한 해 동안 가꾸어 온 노고에 보답한다는 ‘갚음’의 깊은 언어적 상징을 품고 있다. 조상과 자연, 그리고 조물주의 섭리에 정성으로 되갚기 위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바로 한가위인 것이다. 씨를 뿌리고 열심히 김을 매지만, 그 작은 씨앗에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햇빛과 바람, 토지의 양분이라는 자연의 선물이며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섭리임을 알기에 감사한다. 나아가 이웃이 없이는 나라는 존재도 서 있을 수 없었기에 이웃에게도 감사의 정을 나눈다. 나눔이야말로 인간이 부려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멋이자 장식이며, 감사하다 보면 감사할 거리가 더욱 늘어난다는 기적을 새겨보는 날이다.

차분해지는 계절을 따라 한가위에는 내 위치와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정신없이 눈앞의 호구지책에 매달려 헉헉대며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걸핏하면 욕심이 앞서고, 그 욕심을 좇다 보면 삶은 어느새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만 덤벼드는 투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물질이 제공하는 말초적 충족에 잠시 취할 수는 있어도, 그 끝은 언제나 공허함과 허탈한 환상뿐이다.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나그네길이며, 그 잠시의 여정 동안 우리가 새겨야 할 진정한 의미는 ‘소유’가 아닌 ‘존재와 나눔’에 있다.

이 명절을 명절답게 지낼 수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 타국에서 고단하게 명절을 맞아야 하는 이들, 거꾸로 이 땅에서 고향과 조국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이국땅의 이웃들, 그리고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한 맺힌 마음으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실향민들에게도 한가위의 넉넉한 은총이 함께하기를 한마음으로 기도한다.(20080913, 경향신문, 김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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