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가’해(마태 22,15-21)

오늘 말씀의 전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온 세상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하느님과 그분께 속한 인간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이사 45,1.4-6)에는 이방 민족의 왕인 키루스를 선택하여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등장한다. 키루스는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이었으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에게 권력을 주셨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라고 선포하시며, 세상의 정치 권력과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분이 오직 하느님뿐임을 명백히 밝히신다.
복음(마태 22,15-21)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일당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빠져나갈 길이 없는 함정 질문을 던진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황제의 권력을 하느님의 주권보다 위에 두는 우상숭배가 되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 권력에 대한 반역이 되는 악의적인 외통수였다. 세속의 위선자들은 ‘하느님 없는 황제인가, 황제 없는 하느님인가’를 선택하라며 예수님을 다그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오게 하신 뒤, 판도를 뒤엎는 명쾌하고도 차원 높은 말씀을 내리신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동전에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그것이 황제의 소유임을 나타내듯,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창세 1,26-27) 온전히 하느님의 소유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향해 엄중히 선포한다. “인간을 소유하려 들지 마라.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거나 굴복시키지 마라. 인간은 하느님의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 피와 숨결 속에 창조주를 모시고 있는 위대한 기적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주라’가 아니라 ‘돌려주라(=되돌려주라)’고 하신다. 우리가 지닌 삶과 존재, 영혼과 모든 은총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나의 삶이 하느님께 진 빚의 그물망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내가 받은 존재 전체를 삶 안에서,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몸소 살아내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콜로 1,15),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까지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요한 13,1)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완벽하게 봉헌하신 ‘참 인간’이시다.
제2독서(1테살 1,1-5ㄱ)에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를 격려한다. 복음을 성령과 큰 확신으로 받아들여 세상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모범으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이야말로 바로 하느님께 속한 백성의 거룩한 품위를 증명해 낸 것이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아 그 부르심을 끝까지 완수하시고, 마침내 당신의 아드님을 하느님께 온전히 돌려드리신 성모님, 저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저희 각자의 소명 안에서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의 파도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키며, 마침내 저희 삶 전체를 온전히 하느님께 기쁘게 돌려드리게 하소서. 아멘!
***
–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 하였듯이 나도 누군가를 은근히 곤경에 빠트리려 한 적은 없는가?
– 누군가를 지위나 소득, 신분(예: 소득, 인종, 출신 국가 등)에 따라 판단한 적은 없는가, 그러한 편견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 나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가?
– 나의 못된 행실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나의 품위와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았는가?
– 나는 내 삶이 하느님께 받은 선물임을 기억하며, 일상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기쁘게 되돌려드리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