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17)

제17장
망덕에서 오는 사랑이 좀 불완전하기는 할망정 굳세고 좋은 것이다
우리가 망덕으로 실천하는 그 사랑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향한 것이지만 테오티모여,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겉보기에는 하느님의 착하심에로 돌아가는 듯하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우리의 편리와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저 최상의 완전자에게로 향한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만족을 목표 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를 싣고 하느님께로 가는데, 그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는 최상선이 되시기 때문이며, 이 선 안에서는 네가 보다시피,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들의 것(du nôtre)이 있고 또 우리들 자신(de nous-mème)이란 것이 있으므로 이 사랑이 참된 사랑이긴 하지만 탐욕과 이기심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 하느님, 결코 그렇지는 아니하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한 따름인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한 자기 사랑의 목적을 자신의 이익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슬프게도 지독한 독성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아내가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오로지 그 남편의 종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편을 사랑할 뿐이라면, 이러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종으로, 즉, 남편이면서 종으로 삼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그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함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무슨 좋은 것을 기대 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하느님께로부터 무슨 선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하느님을 사랑치 않는다고 하는 이 두 가지 말은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것이다. 더욱이 다음과 같은 말들은 더욱 잘 구별이 된다. 즉,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위하여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이것은 마치, 나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를 사랑한다, 하느님께서 내 것이 되시기를 좋아한다. 하느님께서 나의 최상선이 되시기를 나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상 짝의 거룩한 애정이니, 그는 극치의 기꺼움에 넘쳐 수백 번이나 부르짖은 것이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아가 2,16) 이와 반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한다」라는 이 말은 마치, 내가 내 자신에게 바치는 사랑이 나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목적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자애심의 사랑, 곧 비할 수 없이 불경스러운 자애심에 예속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으며 그 하부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망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탐욕적 사랑이지만 거룩하고 잘 정돈된 탐욕이라고 하겠으니, 이러한 방법으로는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자신에게로나 또는 우리의 유익에로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로, 즉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에로 첨부시키고 결합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랑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뒤섞이게 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맨 꼭대기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실제로 들어가긴 하지만 그것은 한 가지 단순한 동기로써며, 주요 목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이익이 거기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하느님께 주요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테오티모여, 의심 없이 그렇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우리 최고의 선으로 삼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을 질적으로 제대로 사랑한다고 하겠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에게 종속시키지 않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종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분의 목적이 아니고 목표가 아니고 완성점이 아니며,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부속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종속한다. 또 그분이 우리에게 의존하여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여 있다.
하여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 최상선의 자격에 의하여 그는 우리를 받으시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오히려 그분을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로 유출流出과 선을 끼쳐 주시고, 우리는 부당하고 부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최상의 선이라는 명칭 아래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영예롭고 존경스러운 명칭 아래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완덕이며, 안식이며, 목적이라고 고백하게 되며, 이러한 것을 노려보는 가운데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노예나 종들이나 말들이나 의복 등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사용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을 위하여 부리는데 좋은 점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방향을 두고 나아가는 사탕은 순수한 탐욕의 사랑이라고 하겠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사랑하되 오로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랑하되 오로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다른 좋은 것들도 있으나, 이런 것들은 서로가 동등하고 상관적이기 쉬우니, 곧 친구 간의 우정 같은 것이다. 친구들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연고로 그 사랑은 욕구의 사랑이지만 이 욕구는 정당한 것이고,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것이 되고 그들은 우리의 것이 된다. 즉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게 되고 우리는 그들에게 속하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성질의 선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의존, 참여, 예속 등으로써 누리는 것이 있으니, 예컨대 자선심, 우리의 목자, 군주, 부모들의 선의와 그 존재, 호의 등이다. 왜냐하면 이런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사랑이란 정말 욕구의 사랑이기 때문이니,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목자, 우리의 제후, 우리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또한 목자나 제후나 부모의 그 인격 또는 자격 때문에 우리의 애정이 그들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들에게 관계되어 있고 상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욕구는 존경과 경외와 영예에 대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가령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덕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동경함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선이 되실 수 있다는 목적 때문에가 아니고 그분이 바로 그 선이시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목적 때문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마치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있지 않고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존재함과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테오티모여, 네가 주의 깊게 볼 것은, 이러한 사랑 속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즉, 왜 우리는 우리가 열원하는 선에 대한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적응시키게 되는지)는 그것이 곧 우리의 선이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사랑의 척도와 양量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사랑의 탁월성과 품위에 의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은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사랑에도 차이가 있게 된다. 테오티모여,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러한 욕구의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선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최상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가 그를 최상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최상의 사랑이란 오로지 애덕에만 있을 따름이며 망덕에 있는 사랑은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한하신 선을 선 자체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우리와 상관되기 때문에 사랑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유의 사랑에 있어서 최상선의 고찰에서 오는 동기보다 더 탁월한 동기는 없으므로, 우리는 이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만물을 초월하여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 사랑만으로는 아무도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덕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실효보다는 감정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