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 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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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나다)를 통해 만나는 Todo(토도)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일깨워주는 ‘수동적 정화’의 은총
스페인어로 ‘Nada(나다)’는 ‘아무것도 없음’을, ‘Todo(토도)’는 ‘모든 것’을 뜻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없음’과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Nada는 하느님 아닌 그 무엇에도 궁극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비움이고, Todo는 그 비움의 끝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자신이다.
“영혼이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그 손을 잡으시고 저 어두운 불을 통해 정화해 주시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거룩한 결합과 사랑의 완덕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 정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십자가의 성 요한, 《어둔 밤》 제1권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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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에서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과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수동적인 정화 작용을 구분한다. 《어둔 밤》 제1권에서는 초심자가 지닌 여러 불완전함을 다루고, 이후 하느님께서 친히 영혼을 정화하시는 ‘어두운 밤’의 신비를 설명한다. 특히 제1권 8장 이하에서는 감각의 밤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성 요한에게 ‘능동적 정화’란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절제하고, 죄와 악습을 끊으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놓는 과정이다. 인간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무질서한 성향과 습관의 뿌리까지 완전히 정화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수동적 정화’이다. 수동적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친히 시작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정화의 활동을 인간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완성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도 자신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인정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사람 안에 있는 악한 성향과 나쁜 습관의 깊은 뿌리까지 도달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특별한 작용이 그것을 정화하여 사랑의 일치를 준비하게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인간의 노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을 준비하고 하느님의 활동을 받아들이며, 그 활동을 가로막지 않도록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한다.
이것이 수동적 정화의 역설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도 나 자신을 완성하는 주인이 내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누구나 자신의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여러 번 노력하다가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오는 경험을 한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커녕 사소한 습관 하나를 바꾸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여기에서 인간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을 완성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더 깊이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길을 가르친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많은 이들이 살아가면서 이런 순간을 경험한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치유되거나,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내면이 조금씩 변화되는 순간 말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고질적인 악습이나 반복되는 마음의 패턴을 고치려고 수없이 애썼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그 집착에 이전처럼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걸핏하면 화를 내던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도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설 수 있게 되고, 끊임없이 불안에 휩싸이던 사람이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며,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매달리던 사람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나 단번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악습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내면의 깊은 뿌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조금씩 정화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자유가 자라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악습이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이전에 나를 지배하던 욕망과 감정 앞에서 더 이상 무조건 끌려가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동적 정화는 인간의 노력을 대신하는 지름길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악습을 직면하고, 죄를 끊어내며, 기도하고, 절제하고,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다만 그 모든 노력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이고, 그 문을 통해 들어오셔서 우리를 더 깊이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는 어쩌면 정원을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흙을 일구고, 잡초를 뽑으며, 꽃을 심어 꽃이 피어날 공간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꽃과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역할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때에 성장을 가져오시도록 땅을 준비하는 것이다. 내면에 좋은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아내며, 잡초가 들어설 수 없도록 꽃을 더 많이 심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그 꽃과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동안 스스로 고민하고 고치려 애써 왔던 수많은 흔적을 떠올려 본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 끊임없이 몰려오는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한 말을 내뱉고야 마는 상황의 반복들 …. 셀 수 없이 고치려 애썼으나 좀처럼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습관들이다.
이제 그 한계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조용히 바라본다. 더 이상 진전이 없어 지치거나 좌절할지라도 괜찮다. 내 힘과 마음가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영적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나의 아무것도 아닌 무력함, Nada의 자리에 하느님을 모셔 들인다.
Nada는 절망적인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는 자리이다. 그 비움 안에서 하느님은 나를 당신께로 이끄시고,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에서 조금씩 자유롭게 하시며, 마침내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채워 가신다.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방식과 때에, 우리의 삶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분노가 사라지는 것보다 분노 앞에서 사랑을 선택할 자유가 생기고, 불안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보다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나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 어쩌면 이것들이 은총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정화의 열매일 것이다. 조용히, 성실히 살아가다가 어느 날 뒤돌아볼 때, 내가 애써 만들어 내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오랜 시간 당신의 손길로 빚어 오신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Nada를 지나 Todo로.
나를 비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움 안에서 하느님으로 충만해지는 것.
‘어둔 밤’의 은총.



강루시아
Nada를 지나 Todo로…울림을 주는 말씀 감사합니다, 신부님~
송정연
나를 비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움이 하느님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난나+수녀
당신의 손길로 빚어 오신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되기를…
데레사
신부님! 언제나 제게 꼭 필요한 소중한 메세지를 전달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얼마전에 무척 어려운 일을 겪고나서 그동안 해온, 도착지도 모르면서 앞으로만 나가려는 노력을 멈추고, 주님의 뜻대로 해주세요 하고, 저를 버리지 마시고, 저를 용서해주시고, 이제 부터는 주님이 하시려는 일을 제가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불안은 있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일이며 이제부터는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을 걷게 해주시도록 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