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소화 데레사

※ 1960년생 미국 예수회의 제임스 마틴(James Martin, S.J.) 신부가 쓴 성녀 소개글을 옮겨 수록한다. 제임스 마틴 신부는 미국 예수회가 발행하는 저명한 가톨릭 주간지 《아메리카(America)》의 편집장(Editor at Large)으로 오래 활동해 오고 있다. 그는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주요 언론에 칼럼을 기증하고, CNN, NPR, 콜베어 리포트(The Colbert Report) 등 대중 방송에 자주 출연하며 가톨릭 신앙을 현대적이고 재치 있는 언어로 대중에게 설명해 왔다. 2017년에는 교황청 교황청 커뮤니케이션부(Dicastery for Communication) 자문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함께 읽기: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10월 1일 / 예수 성면聖面과 장미꽃 소나기 / 사랑으로 이끄는 신뢰(C’est la Confiance)
제임스 마틴 신부가 말하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성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성녀의 축일을 맞아(이냐시오 성인께는 죄송하지만!), 저서 《성인들과 함께한 나의 삶(My Life with the Saints)》에 실린 데레사 마르탱에 관한 묵상 글을 공유한다.
1873년 1월 2일, 마리 프랑수아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 Thérèse Martin)은 프랑스 알랑송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루이 마르탱과 제리 마르탱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시계공이었던 아버지 루이는 젊은 시절 수도원에 입회하려 했으나 라틴어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어머니 제리 역시 지역 수녀회인 ‘오텔 디외 수녀회’ 입회가 거절된 후 레이스 제작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과 수도 생활에 대한 이 부부의 깊은 사랑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데레사가 네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가족은 알랑송에서 리지외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헌신적인 아버지의 사랑 어린 보살핌을 받고 네 명의 언니들로부터 깊은 다정함을 받으며 귀엽게 자라났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데레사는 아버지의 가장 아끼는 딸이었다. (실제로 일부 전기에서 어린 데레사는 어리광쟁이 꼬마 숙녀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받는 환경 덕분인지 데레사는 밝은 아이였고 자연스럽게 신앙심도 깊었다. 그녀는 훗날 이 시기에 대해 “나는 하느님을 매우 사랑했고, 내 마음을 하느님께 자주 바쳤다”고 썼다. 그녀는 거의 모든 종교적 표현에 매료되었는데, 언니 셀린의 첫성체 모심을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중 하루”라고 묘사했다.
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레사는 수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내면에서 발견했다. 두 언니가 리지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자 수녀회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면 16세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자, 청소년기의 데레사는 아버지를 따라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조기 입회를 위한 특별 허가를 청원했다. 그녀의 청원은 몇 달 후 지역 주교에 의해 승인되었고, 데레사는 1888년 4월 9일 15세의 나이로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했다.
수도원 담장 안에서의 그녀의 삶은 짧고 단조로웠다. 로버트 엘스버그가 그의 저서 《모든 성인들(All Saints)》에서 말했듯 “외견상의 드라마가 결여된 삶”이었다. 입회 후 1년 만에 수도복을 받았다. 이듬해 공식적으로 수련기에 들어갔고 식당 관리와 복도 청소 임무를 받았다. 1890년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을 세웠다. 1891년에는 제반 도구 관리 보조로 지정되었다. 1893년에는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제2 문지기’, 즉 문지기 보조로 지정되었다.
데레사는 기도(특히 사제들을 위한 기도)와 수도원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그녀는 수녀원 자매들로부터 작고 사소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병중에서도 가능한 한 관대해지려고 노력했으며,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진 하느님께 항상 자신의 모든 ‘작은’ 노력들을 바쳤다.
1894년 주님 수난 성금요일 아침, 데레사는 입안에 피가 가득 고인 채 깨어났다. 멀리 떨어진 베트남으로 선교 봉사를 떠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데레사는 곧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나 결핵의 발병은 하늘나라로 가는 빠르고 고통 없는 여정이 아니라, 3년에 걸친 극심한 고통의 여정임이 드러났다. 같은 해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장상 수녀로부터 훗날 그녀의 영적 증언이 될 글을 쓰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이 글에 《예수의 마리아 아녜스 원장 수녀에게 바치는, 스스로 쓴 어떤 작은 하얀 꽃의 봄날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결국 데레사를 통해 수백만의 신앙인을 예수님께로 이끈 것은 바로 이 책이었다. 외견상의 드라마가 없던 삶은 내면의 드라마로 가득 차 있음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사제직에 대한 강렬한 부르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가장 영웅적인 행위를 하고 싶습니다. 십자군의 용기를 느낍니다. 교회를 수호하다가 전장에서 죽고 싶습니다. 내가 사제이기만 하다면!” 데레사는 기도(특히 사제들을 위한 기도)와 수도원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했다. 자매들에게 사소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투병 중에도 가능한 한 관대해지려 애썼으며,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진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작은’ 노력들을 바쳤다. 그녀의 책은 신앙의 삶에 따르는 고통과 기쁨을 모두 보여준다.
데레사가 집필을 계속하는 동안 그녀의 신체적 상태는 악화되었다. 마지막 몇 장은 극심한 고통의 시기에 작성되었다. 1897년 9월 30일, 24세의 나이로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아,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 나의 하느님 …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도 이 온전히 헌신적인 제자는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남겨진 이들을 위한 중재기도를 통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나의 죽음 이후에 나는 장미 꽃비를 내릴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며 나의 하늘나라를 보낼 것입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그녀의 영적 자서전은 언니들에 의해 정돈된 버전인 《한 영혼의 이야기(Story of a Soul)》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카르멜 수녀원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유통되었으나, 결국 외부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그 성공은 거의 모든 이를 놀라게 했다. 그녀의 ‘봄날 이야기’ 덕분에 데레사는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인 중 한 명이 될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혹적이었고, 그녀의 모범은 영감을 주었으며, 그녀의 ‘작은 길’은 수백만 신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되었다.
1925년, 세상을 떠난 지 단 28년 만에 그녀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997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교회 학자’, 즉 신앙의 뛰어난 스승으로 선포했다. 그녀는 그렇게 명명된 단 세 명의 여성 중 한 명이다(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함께).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녀를 그토록 강력하고 접근하기 쉬운 모델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깊은 겸손이었을 것이다. 삶의 무게에 겸손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고통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데레사는 자신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성녀이다. 데레사는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이다. 사람들은 ‘소화(小花)’ 성녀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덧붙이자면, 자서전의 원래 제목에서 가져온 그 용어는 결국 일종의 성스러운 애칭이 되었다. 하느님의 동산에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자신에 대해 주변에서 보는 더 화려한 장미들에 비하면 작은 데이지일 뿐인 ‘작은 꽃’이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위대한 카르멜의 선배인 아빌라의 테레사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작은 테레즈[la petite Thérèse]’라고 불렀다) 그녀의 유명한 ‘작은 길’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들을 실천하는 영성이자, 창조주 앞에서 밝은 겸손을 강조하는 제자 직의 길이다.
그러나 리지외의 데레사를 단순히 연약한 온실 속 화초로만 생각하는 것은 연약한 꽃잎 아래에 자리한 상당한 결의를 잊는 것이다. 그녀는 15세의 나이에 교회 법과 같은 사소한 이유가 수도원 입회를 막아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교황에게 직접 청원했다. 그리고 불치병에 직면하여 영적 평형감각이 흔들리고 내면의 어두움과 황량함에 처했을 때도 그녀는 계속해서 믿고 기도했다. (데레사는 특히 선교사 사제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 결과 이 봉쇄 수녀원의 수녀는 바쁘게 발로 뛰었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사의 두 수호성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의 그리스도교적 결의와 의연한 확신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위대한 영웅이자 동향인인 잔 다르크를 가장 닮아 있었다. 데레사는 수련기 동안 종이 갑옷을 임시로 입고 오를레앙의 처녀 역할을 맡아 연극을 했다. 카르멜 수녀원의 자매 중 한 명이 의상을 입은 그녀의 사진을 찍었는데, 이 잔 다르크는 목발에 기대어 있었다.
리지외 데레사의 영성은 보통 그녀의 자기 절제와 수녀원 자매들의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했기에 삶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던 데레사를 바라보기에는 여전히 너무 좁은 견해이다. “나는 이제 고통도 죽음도 원하지 않지만, 여전히 둘 다 사랑합니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입니다”라고 그녀는 《한 영혼의 이야기》에 썼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여러 지체를 가진 몸에 비유한 성 바오로에게서 영감을 받아, 데레사는 담대하게 자신이 심장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결핵과 싸우는 동안 데레사는 크게 몸부림쳤고 심지어 자살의 충동과 씨름하기도 했다. 그녀는 병자의 침대 근처에 약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카르멜 자매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녀도 몸부림치고 눈물 흘리고 분노했지만, 평생에 걸친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끌어올린 깊은 신뢰의 우물에서 힘을 얻어 계속해서 믿었다. 예수 마리아 수녀회의 수도자이자 교회 사학자인 재니스 파넘(Janice Farnham) 수녀가 썼듯, “데레사의 길은 한 줄기 빛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길이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또는 서원식 때 선택한 수도명인 ‘아기 예수와 거룩한 얼굴의 데레사’는 이제 갈색과 흰색의 카르멜 수도복을 입고 전형적으로 알록달록한 장미 부케와 십자가를 든 채 관람자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작은 성화 카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전 세계의 크고 작은 성당에서 다채로운 석고상,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속 인물, 혹은 빛바랜 프레스코화 속 초상화로서 동일한 포즈로 침묵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수많은 언어와 판본으로 인쇄된 수백만 부의 자서전 속에서, 가정과 아파트, 사제관과 수도 공동체에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성인들 중에서 그녀야말로 일상에서 고통받고 기뻐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며, 아이 같으면서도 성숙하고, 겸손하면서도 담대하며, 기쁘면서도 슬픈 그녀의 삶은 수백만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나에게도 말을 건넨다.
어떤 날 내가 리지외의 데레사에게 기도할 때, 나는 그녀의 영성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너무 순진하다, 너무 아이 같다, 너무 단순하다, 너무 경건주의적이다, 너무 키치(Kitsch)하다. 그러나 데레사는 수도원 안에서도 그녀의 젊음을 질투하고, 그녀의 거룩함에 혼란스러워하며, 그녀의 사랑에 당황해하는 수녀들로부터 이와 유사하게 가혹한 말을 들었다. 그러한 오해는 그녀 삶의 일부였다.
그리고 나는 하늘나라에 있는 데레사가 이러한 오해에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녀를 여전히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겸손하거나, 너무 경건하다고 보는 이들에게 미소 짓는다. 겸손의 힘을 저평가하는 이들에게 미소 짓는다. 이 모든 이들에게 미소 짓는다. 미소 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