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는가?

우리의 타락·오염된 시력의 치유

‘겉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할 수는 없다’는 옛 속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직관적으로는 알면서도 흔히 무시하곤 하는 사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 기반한 우리의 추측이 신뢰할 수 없음을 간결하게 암시하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사물은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처럼 시력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속담이 가득하다. 우리는 조급한 판단을 피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 이러한 표현들을 되풀이하지만, 결국에는 성급하고 이성 이전의 본능으로 돌아가 또다시 경솔한 판단을 내리고 만다.

우리의 눈을 신뢰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비유가 이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보는 것(seeing)’과 ‘지각하는 것(perceiving)’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속담은 어떠한가. “아름다움은 피부 한 꺼풀에 불과하다(Beauty is only skin deep).” 우리가 그 반대의 경우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은가? 아름다움이 겨우 피부 한 꺼풀에 불과하다면, 추함 역시 그렇지 않겠는가? 추함 또한 피부 한 꺼풀에 불과하다면, 왜 우리는 장애나 기형, 생소함, 혹은 늙음 앞에서 그토록 손쉽게 거부감을 느끼는가? 상대방의 내면적 진실을 발견했을 때 초기의 육체적 끌림이 시들어버려 깨진 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단지 눈에 보이는 모습에 거부감을 느껴 놓쳐버린 관계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성은 표면 아래에 있는 것,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본질임을 알도록 이끈다. “눈이 영혼의 창”이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시각적 인지 너머에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그 창문 너머를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물론 이 속담은 거꾸로 적용될 수도 있다. 바라보는 이의 시선은 얼마나 진실한가?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바라보는 이의 눈이 나쁘면 그 사람의 온몸이 어둠으로 가득 찰 것이며(마태 6,23), 타인에 대한 그의 판단 역시 타락하고 이기적이며 음란하거나 악의적으로 변할 것이다.

인간의 시력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서로의 알몸을 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는가? 그들의 눈이 밝아진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이전보다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화과나무 잎을 모아 알몸을 가리고 수치를 숨겼다. 그들의 죄는 자신들의 눈을 오염시켰고, 그들 뒤를 잇는 우리 모두의 눈마저 타락시켰다. 성 요한이 언급한 세 가지 욕망(1요한 2,16) 중 ‘눈의 욕망’은 수많은 사람을 시력의 희생자로 만들었다.(*성 요한은 서간문에서 세 가지 욕망을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으로 표현한다)

이성은 표면 아래에 있는 것 – 눈에 보이지 않는 것 – 이 진짜 인간의 본질임을 알도록 이끈다.

거울, 영적 감각의 필요성

당신과 나는 어떠한가?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타인을 판단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결코 더 나은 판관이 되지 못한다. 첫 번째 죄가 불러온 타락은 허영과 교만을 부추겨, 어떤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남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믿게 만들었다. 한편, 소셜 미디어가 부채질하는 비교와 경쟁, 불안감은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스스로가 매력 없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소셜 미디어라는 전염병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가상의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며, 불안에 떨고 있는 진짜 자신의 모습은 가리도록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거울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두 가지 진실을 동시에 보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자, 당신의 모습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로부터 깊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성 바오로는 우리가 영원에 이르러서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완벽히 알게 될 것이라고 보증했다.(1코린 13,12 참조) 그러나 영원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은총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진실뿐만 아니라 타인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제공한다. 그 진실은 불완전한 시력에 기반한 희화화, 편견, 판단을 뚫고 나아가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먼 이와 함께 기도한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카 18,41)

앞서 언급한 모든 속담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시력의 불완전함 – 때로는 그것을 죄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 – 이라 이해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 문화 속에서 발전해 온 것들이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눈이 필수적이라고 믿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눈먼 이는 없다.” 눈은 형태, 색상, 질감, 사람,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가치(worth)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잘 발달한 영적 감각이야말로 그러한 가치를 알아보는 시력의 원천이다.

당신과 내가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희한하다. 예를 들어 내게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들이 있고, 나와 내 아들, 그리고 다운증후군을 가진 다른 이들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다운증후군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심지어 없애야 할 문제로 여긴다. 두 반응 모두 가장 깊은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보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또 다른 자녀, 즉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한 사람이라는 동일한 이미지를 ‘보기’는 하지만, 그 이미지를 지각하는 방식은 각자가 받은 형성 과정에서 비롯된다. 편견은 잘못 형성된 시력이다.

표면 너머의 진실을 밝히시는 예수님의 치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차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바로잡음으로써 우리의 타락한 시력을 치유하러 오셨다. 여기서 ‘겉표지로 책을 판단한다’는 비유가 다시 떠오른다. 장애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보는 이들은 그 사람의 외벽 너머를 보지 못한다. 이해를 얻기 시작하려면 책을 펼쳐 이야기를 읽거나, 적어도 목차라도 훑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질병을 치유하셨지만, ‘blindness(시각장애)’만큼은 물리적 상태인 동시에 영적인 비유가 되기에 그분의 치유 사목에서 독보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시각장애인을 치유하신 사건에서, 눈이 멀었던 사람은 명확히 보게 되었지만, 시력이 아주 좋았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영적 소경으로 남았다.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에 너무 갇혀 있어서, 메시아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며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영적 지각의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해답이 그들에게 제시되었고 그들 바로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지만, 이사야가 말했듯 그분에게는 빼어난 외모도 위엄도 없었고 우리가 탐낼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었기에(이사 53,2) 그들은 그분을 배척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당신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칼바리 언덕에서 드러난 그분의 약함과 실패, 극심한 취약함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가장 깊은 실재를 가려버렸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메시아를 죽였다.

십자가의 눈으로 사랑을 다시 바라보기

예수님께서는 자주 가장 거룩한 이들 – 즉 버림받은 이들, 가난한 이들, 병자들, 취약한 이들 – 의 한가운데 계셨다. 우리 도시와 거리를 가득 채우고 때로는 우리 교회에도 찾아오는 취약함, 가난, 질병, 노숙, 중독 등 수많은 인간의 조건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땅을 거닐며 기적을 행하실 때 누구를 바라보셨는지 알고 있으며, 그분께서 당신의 인성人性을 증명하고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의존성과 취약함을 선택하셨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은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기대치를 명확히 밝히셨다. 우리는 모든 이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통해 우리의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한다.

※ 이 글은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라는 분이 2026년 8월 26일자로 wordonfire.org에 “What Do You See? Healing Our Corrupted Sight”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번역한 내용이다. 문단 사이의 소제목은 역자 임의로 삽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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