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훈련, 그리고 몸 신학

※ 다음은 D.R. Esparza라는 분이 https://aleteia.org/에 2026년 8월 31일자로 기고한 글의 번역본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첨가된 부분이 있으며, 이미지는 AI 생성으로 인스타그램에 돌아다니는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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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칼로카가티아(καλοκαγαθία, kalokagathia)’라 불렀다. 이는 신체적 아름다움(외적인 미美)과 도덕적 선(내적인 선善)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인간상 및 교육이념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자아 통제(자기 절제, self-mastery)’라 불렀다. 두 표현 모두 동일한 인간적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달리기를 해왔고, 11월에 열리는 해안가 20킬로미터 대회 출전을 위해 훈련하고 있다. 조깅하듯 천천히 오래 달리는 장거리 훈련, 호흡이 가빠오는 인터벌 훈련, 그리고 마침내 완주를 가능하게 해주는 느리지만 꾸준한 거리의 누적. 이 훈련의 과정은 러닝화 한 켤레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몸이란 형성되어 가야 하는 인격’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도리어 서구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통찰 중 하나이자, 가장 꾸준히 저평가되어 온 통찰 중 하나이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이를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깔끔하게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개념이 있었다. 바로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이다. 직역하자면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이 단 하나의 이상으로 결합된 상태를 의미한다. 칼로카가티아를 갖춘 사람은 신체적으로 뛰어남과 동시에 도덕적으로 곧은 사람이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훗날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게 될 이원론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육관(Gymnasium)은 인격의 형성과 신체의 형성이 단 하나의 과업으로 이해되던 장소였다. 운동 훈련과 시민적 덕목, 철학적 탐구와 신체적 우수성은 모두 동일한 절제와 훈련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플라톤의 수많은 대화편이 체육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이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켰다. <명상록>을 통해 제국의 요구에 맞선 자기 절제의 기록을 남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년)는 신체적 엄격함이 도덕적 엄격함과 분리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노예 출신이었던 에픽테투스Epictetus(55~135년경) 역시 의지를 훈련할 때 기울이는 세심함과 똑같은 주의를 기울여 몸을 훈련해야 한다고 썼다. 몸은 영혼의 동반자였으며, 지극히 엄격한 동반자였다.
사도 바오로의 비유
헬레니즘 세계에 흩어진 공동체들에 편지를 쓰던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고자 할 때 본능적으로 스포츠 비유를 가져왔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4-27).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3-14)
이러한 표현들은 운동 선수의 절제가 도덕적 형성의 한 형태로 인정받던 당시의 문화를 반영한다. 바오로는 그 인식을 가져와 영적 삶이 실제로 요구하는 바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수도원 전통으로도 이어진다. 성 베네딕토 규칙은 하루를 기도, 노동, 휴식의 교대 주기로 구성한다. 이는 규칙성, 페이스 조절, 그리고 장기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운동선수의 훈련과 닮아있다. 이를 두고 사막의 교부들은 모든 형태의 엄격한 자기 절제와 영적 수련을 뜻하는 ‘아스케시스(ἄσκησις, askesi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운동선수의 훈련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오늘날 ‘고행’이나 ‘금욕(asceticism)’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들은 영적 삶의 근본적인 훈련으로 이를 강조했다. 영혼을 훈련하기 위해 몸을 훈련했으며, 이 둘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동일한 과업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몸 신학
최근 몇 세기 동안 몸에 대해 가톨릭에서 이루어진 가장 지속적인 성찰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Theology of the Body)’이다. 1979년부터 1984년 사이 수요일 일반 알현을 통해 발표된 129개의 교리 교육 연설은, 훗날 연구자들을 통해 현대의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학파의 많은 발견을 예견했음이 밝혀졌다. 체화된 인지학은 몸이 사고와 지각, 도덕적 형성 과정에 본질적으로 개입하며, 마음이란 작동하는 신체 조직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인지과학의 한 분야이다.
그 핵심 주장은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다. 바로 ‘몸은 인격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은 처음부터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사랑 안에서 인격은 선물이 된다”라고 썼다. 몸은 인격을 드러내며,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일은 그 계시에 참여한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는 자아 통제(self-mastery)가 필수적이다”라고 덧붙였다.
‘자기 증여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자아 통제’라는 이 문구는 신체 훈련에 대한 질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몸을 훈련한다는 것은 현존과 인내, 그리고 내어줌의 능력을 함양하는 일이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달리는 법을 배운 사람, 몸이 비명을 지를 때도 리듬을 유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 멈추는 것이 훨씬 쉬운 시점을 이겨내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은, 그 어떤 다른 훈련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의지의 힘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영성 전통이 알고 있듯, 의지야말로 정확히 형성되어야 하는 핵심이다.
2019년 <심리학 프론티어(Frontiers in Psychology)>에 게재된 한 연구에 따르면, 정기적인 지구력 운동은 자기 조절 능력, 감정적 회복탄력성, 그리고 지속적인 주의 집중력에서 측정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성 전통이 언제나 ‘아스케시스’와 연관 지어 온 바로 그 자질들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명확히 언급했다. “스포츠는 인내, 노력, 용기, 균형, 희생, 정직, 우정, 그리고 협력을 위해 몸과 정신을 단련합니다.” 그 스스로가 열렬한 등산가이자 스키어였고 축구 골키퍼였던 그는, 훈련된 몸이 모든 방향에서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맡겨진 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몸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잘 유지하고 발전시켜 봉사 안에 바쳐져야 하는 선물이다. 몸을 훈련하는 것은 그 선물에 대한 책임감 있는 돌봄이다. 내가 훈련하고 있는 대회는 11월, 바스크 지방의 날씨가 어떠하든 간에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과 이룬Irun 사이의 해안가를 따라 20킬로미터를 달리는 레이스이다. 완주를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훈련 그 자체에 있다. 절제와 훈련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은 영적 삶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형태 중 하나임이 밝혀졌다. 그리스인들이 알아보고, 바오로가 확인했으며, 사막의 교부들이 깊이를 더하고, 스키를 즐기던 폴란드 출신 교황이 새로운 정교함으로 명확히 밝혀낸 바로 그 형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