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온 메모

직원 선생님과 함께 은행에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발이 미끄러지며 그만 진흙탕에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1인 인출 한도가 있어 둘이 함께 가야 돈을 많이 찾을 수 있었는데,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우선 눈앞의 상황부터 수습해야 했다. 부끄러움을 동력 삼아 벌떡 일어나 가방 속 은행 서류가 젖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나는 집으로

자비(엘레오스, Ἔλεος)

예수님께서는 호세아서 6장 6절을 인용하시며 “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원한다”(마태 9,13;12,7)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두 차례 반복된다. ‘자비’라는 말은 공관복음에 주로 등장하며, 특히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현이 직접 나오기보다 ‘사랑’이라는 말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은 분명하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트집 잡으려 할 때였다. 마태오 9장에서는

성 베네딕토와 겸손의 사다리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기원전 535~기원전 475년)는 “위로 올라가는 길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결국 같은 길이다.”라고 말했다. 베네딕토 성인은 성경 곳곳에서 이러한 역설을 발견한다. 복음서의 주님 말씀 속에 이 점은 명쾌하게 반복하여 담겨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성인은 설명한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모든 스스로를 높임이

연중 제15주일 ‘가’해(마태 13,1-23)

오늘 전례의 말씀은 한 가지 흐름, 곧 ‘희망’이라는 주제로 서로 이어져 있다. 제1독서는 씨앗이 반드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희망을 노래하고, 제2독서는 피조물과 함께 우리가 기다리는 자유,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희망을 전해준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이 희망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신다. 제1독서(이사 55,10-11)에서 주님께서는 비와 눈이 땅을 적셔 씨 뿌리는

손을 대다(합토마이, ἅπτομαι)

마태오 복음 9,18-26에서 회당장은 예수님께 “손을 얹어” 딸을 살려주시기를 청한다. 한편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 믿고 다가가 실제로 그 옷자락에 “손을 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어 다시 살리신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는 ‘손을 댐’, 곧 접촉이라는 행위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기서 “손을 대다”라는 표현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사도

요한복음에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라는 똑같은 표현이 세 번 등장한다.(요한 11,16;20,24;21,2) 우리는 그의 출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어쩌면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였을지도 모른다.(요한 21,2참조)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주로 요한 복음서에서 온 것이다. 공관 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카)에서 그는 그저 열두 사도의 명단에만 등장할 뿐이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그의 이름인 토마스(Thomas)는 ‘두 배(더블)’ 또는 ‘쌍둥이’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마태 10,17-22)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지만, 한국에서 선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이자 한국 교회의 대표 성인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과 겹치므로 교회의 배려에 따라 성인과 함께 성대한 신심 미사를 드린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계시는 분들께서는 연중 제14주일 ‘가’해(마태 11,25-30)의 2023년 강해를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제1독서(2역대 24,18-22)에는 우상을 섬기던 요아스 임금(기원전 835~796년경, 40년간 통치)과 유다에 그들을

연옥의 칠죄종이 지옥에는 없다?

13세기 단테의 <신곡> 3부작(지옥·연옥·천국) 중 연옥편에서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색욕이라고 하는 7가지 죄(칠죄종七罪宗)는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죄가 연옥과 지옥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듯이 보인다. 연옥에서는 이 죄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지옥에서는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1. 연옥: 죄를 정화하며 변화되는 자리 “죄는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중 제13주일 ‘가’해(마태 10,37-42)

제1독서(2열왕 4,8-11.14-16ㄴ)는 수넴 여인과 그녀의 남편이 엘리사 예언자에게 베푼 환대를 전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대접하며 머물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다. 이에 엘리사는 자녀가 없던 그 부부에게 아들을 약속한다. 이는 단순한 보상의 논리가 아니라, 무상으로 베풀어진 환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다시 흘러넘치는 모습이다. 곧,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사랑의 순환이다. 제2독서(로마 6,3-4.8-11)에서 바오로

“눈을 들어”(에파이로, ἐπαίρω)

성경 안에서 “눈을 들어”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시선의 이동을 넘어, 인간 존재가 어디를 향해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몸짓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눈을 드시어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들어 올리다”, “높이다”를 뜻하는 ‘에파이로(ἐπαίρω)’는 이러한 움직임을 잘 드러낸다. 물론 성경은 이와 유사한 여러 표현을 함께 사용하지만, 그 핵심은 하나로 모인다. 곧, 인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