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가’해(마태 14,13-21)

오늘 말씀의 전례는 유배지에서 안주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약속하는 이사야(제1독서), 그 사랑의 확증이신 예수 그리스도(제2독서), 그리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빵과 물고기의 기적(복음)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적은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하는 핵심 사건(마태 14,13-21 마르 6,32-44 루카 9,10-17 요한 6,1-15)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오늘 우리에게 현재화된다.
제1독서(이사 55,1-3)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지의 백성들에게 모든 이를 배불릴 ‘공짜 빵’(계약, 말씀, 생명, 변치 않는 자애)을 약속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미 50년 유배 생활에 안주해 있었고, 약속된 해방과 귀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삶이 주는 일시적이고 소소한 배부름에 안주하며 더 깊은 생명을 향한 갈망을 잊곤 한다. 이미 배가 부른 이들에게 배고픔을 일깨우는 것은 참 어렵다. 회개를 향한 첫걸음은,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더 깊은 생명에 대한 갈망을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제2독서(로마 8,35.37-39)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어떤 환난이나 역경, 심지어 우리의 결핍과 한계조차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은 인생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도 남는다.
복음(마태 14,13-21)에서 마태오는 「광야 → 양식의 부재 → 모세의 중재 → 만나 → 배부름」이라는 탈출기의 틀(탈출 16,3-4)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이자 완벽한 해방자로 제시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안타까운 죽음을 들으시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신다.(*참조. 예수님의 아나코레시스) 눈앞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순교로써 자신의 세례 임무를 완수한 친구 요한을 기억하며 예수님은 아픔 속에서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실은 채 물러가시지만, 가엾은 군중을 다시 만나신다.
1) 예수님: 복음의 서두인 14절에서 예수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세 가지 동사를 만난다: ① 보셨다(그분의 시선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물고, 바라보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측은지심은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행동으로 이어져 생명을 낳는다) ② 가엾은 마음이 들다(예수님께서 인간이 겪는 고통에 아파하신다. 그리고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으로부터 기적이 피어난다. 마태오 복음에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예수님에게만 부여된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감정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실행으로 옮겨지며 생명을 낳는 동인이 된다) ③ 고쳐 주셨다(인간에게 가장 큰 은총은 우리를 위해 고통을 함께 짊어지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의 아픔을 낫게 한다)
2)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시라는 제자들의 제안은 스승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무지다. 제자들은 현실적 판단에 머물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부족함 속에서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다. 이는 단순히 빵을 건네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 자신이 양식이 되라는 초대이다. 참된 풍요는, 내가 가진 것과 나 자신을 내어놓을 때 시작한다. 종종 우리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빵이 늘어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만큼만 삶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다. ‘무상성’의 인식과 ‘책임감’의 실행이다.
「진정한 신앙은 불의에 대한 분노, 곧 정의에 대한 배고픔이며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가난을 생산해 내는 원인에 작용함과 동시에, 일상 속 단순하고 소박한 연대의 몸짓을 통해 싸우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183항)」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양식이 존재함에도, 불평등한 소득 분배와 낭비 때문에 굶주림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복음의 기쁨, 189-191항 참조)」
3) 성체성사: 빵의 기적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완성된다. 성체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는 포상이 아니라, 배고픈 이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 우리의 배고픔과 결핍이야말로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떼어 우리에게 주셨듯, 우리 역시 타인을 위해 떼어 나누어지는 ‘사랑의 빵’이 되어야 한다. 빵의 기적과 최후의 만찬은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빵의 기적: 저녁이 되자 / 자리에 앉게 하시고 / 빵을 들어 / 축복하시고 / 떼어 주셨다
최후의 만찬(마태 26,20.26): 저녁이 되자 / 식탁에 앉으시어 / 빵을 들어 / 축복하시고 / 떼어 주셨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이 지금 여기에서 계속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 우리를 드리면, 그분 손에 들린 우리가 타인을 위해 떼어 나누어지는 빵이 된다.
군중의 배고픔과 필요를 가장 먼저 알아채시고 아드님께 중재하신 성모님, 자비로운 시선으로 저희의 결핍을 바라보시어, 저희가 당신 아드님이 베푸시는 풍요로운 잔치에 기쁘게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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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과 치유를 체험하고 있는가?
– 나는 일상의 소소한 배부름에 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진리와 평화를 향한 더 깊은 갈망을 지니고 있는가?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가진 시간, 마음, 재능, 재물을 선뜻 내어놓을 용기가 있는가?
– 영성체 후에 내 안에 오신 예수님께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