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니아의 3남매

San Lázaro con sus hermanas Marta y María by Maestro de Perea, 15세기 말~16세기 초

※ 7월 29일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이다. 이날 교회는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운 환대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키신 분의 명령에 따라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라는 내용으로 베타니아의 세 남매를 함께 기념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중 이들의 가정을 자주 방문하시며 깊은 우정과 사랑을 나누셨다.

『로마 미사 경본』과 『로마 독서집』 등 전례 지침에 따라, 이날은 요한복음 11,17-44 또는 루카복음 10,38-42를 전례 복음으로 취할 수 있다. 본 자료집에는 두 복음 대목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양한 기회에 집전하고 선포한 강론 몇 편을 수록하였다. 각 강론의 소제목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임의로 편집하여 붙인 것이다.

* 7월 29일이 ‘성녀 마르타 기념일’에서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하게 된 연유와 문헌적 근거를 위해서는 다음 링크를 읽을 수 있다: 729일은 성녀 마르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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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12)라는 주님의 이 아름다운 약속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죽은 이들이 다시 생명을 얻게 하실 능력을 지니신 주님의 약속입니다. …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었던 라자로가 다시 생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는 아주 간략하게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구석, 다소 죽어 있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마음 안에 수많은 죽은 자리를 품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영적 괴사(spiritual necrosis)’라 할 만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권능만이 우리 마음의 이러한 위축된 영역, 곧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죄의 무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무덤에 강하게 집착하고 마음속에 이를 보존하며, 온 마음이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르타의 말처럼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 죄에 집착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그 악취 말입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 모두가 죄에 매여 끝나지 않고, 라자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잠시 침묵 가운데 생각해 보시기를 청합니다. ‘내 안의 영적 괴사는 어디에 있는가? 내 영혼의 죽은 부분은 어디인가? 나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모두 잠시 침묵 속에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런저런 죄에 집착함으로써 부패할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은 어디인가?’ 그리고 수치심의 돌을 치워 버립시다! 그 돌을 치우고, 주님께서 라자로에게 “나와라!” 하고 말씀하셨듯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립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 영혼 전체가 치유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부패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죄인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나와라! 네 안에 품고 있는 그 무덤에서 나오너라. 나와라. 내가 너에게 생명을 준다. 행복을 준다. 너를 축복한다. 나는 너를 내 것으로 원한다.”

…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은총, 우리 무덤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빕니다. 밖으로 나오라 부르시며 당신에게로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 여러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여러분 역시 “밖으로 나와라! 오너라!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렇게 파스카 성야(부활 성야)를 준비할 수 있기를 … (2014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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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 루카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어떤 마을에 들르시어,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두 자매의 집으로 맞아들여지신 예수님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10,38-42 참조) 두 자매 모두 주님을 맞아들였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39절 참조), 마르타는 여러 가지 시중드는 일로 온통 분주했습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40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바쁘게 움직이고 분주히 애쓰느라, 마르타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손님의 존재 자체(이 경우 손님이신 예수님)를 잊어버릴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마르타는 손님의 존재를 잊고 있었습니다. 손님이란 단지 시중을 들고,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수발을 들어주기만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 손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경청(Listen)’! 손님은 그의 역사와 이야기, 감정과 생각이 풍부한 그의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맞아들여야 하며, 그래야 그가 참으로 가족 가운데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만약 손님을 집으로 맞아들이고서도 계속 다른 일을 하느라 그를 그냥 앉아 있게만 만들고 서로 침묵 속에 있다면, 그것은 손님을 마치 돌덩이처럼 대하는 것, 곧 ‘돌로 만든 손님’으로 만드는 꼴입니다. 아닙니다. 손님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물론,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응답 –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 – 은 우리 삶과 행위 전체를 밝혀주고 지탱해 주는 예수님의 바로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완벽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십자가 상 앞으로 기도하러 가서 우리 말만 계속 퍼붓고 가버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경청, 이것이 핵심 단어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시요 스승이시기 이전에, 나그네요 손님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분의 응답은 일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왜 이 손님을 맞이하느라 손님의 존재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분주하냐? – 돌로 만든 손님이란 말이냐! – 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 손님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 이 단어를 명심하여라.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 – 그에게 형제다운 태도를 보여주고, 그가 임시 거처가 아니라 가족 안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빛 아래서 이해될 때, 자비의 위업 중 하나인 ‘환대’는 오늘날 세상에서 소홀해질 위험에 처한 참으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덕목으로 드러납니다. 사실 양로원과 요양원 등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이러한 환경 안에서 진정한 환대가 늘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질병과 외로움, 소외를 돌보기 위한 다양한 기관들이 문을 열고 있지만, 이방인이나 소외된 이들, 쫓겨난 이들, 곧 외국인, 난민, 이주민들의 말을 기꺼이 들어줄 사람을 찾을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아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심지어 자기 집 안에서조차,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맞아들이는 일보다는 여러 종류의 서비스와 돌봄을 주고받는 것이 더 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문제와 분주함, 때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사로잡힌 나머지 타인의 말을 들어줄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끊임없이 바쁘다 보니 들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의 말을 들을 시간을 내고 계십니까? 아내 여러분, 남편의 말을 들을 시간을 내고 계십니까? 부모 여러분, 자녀들의 말을 듣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고, 시간을 ‘낭비’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 어르신들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 “아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늘 똑같은 소리만 하셔서 지루해요.” – 그러나 어르신들의 말씀도 들어 드려야 합니다!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듣는 법을 배우고, 여러분의 시간을 더 많이 내어드리기를 청합니다. 평화의 뿌리는 바로 ‘경청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경청의 어머니이시며, 섬김과 세심한 돌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환대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빕니다.(2016년 7월 17일 삼종기도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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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과 바쁨(봉사)

관상과 봉사.” 이것이 바로 삶에서 선택해야 할 ‘길’이며, “이른바 ‘바쁨교(Indaffaratismo)’라는 종교의 신봉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길입니다.

루카 10,38-42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자매의 행동 방식을 활용하시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던 집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가 있었던 반면, 그의 언니 마르타는 “복음이 전하듯 ‘시중드는 일로 산만해져’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말씀만 듣고 있는데, 일할 사람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고 용감하게 불평했습니다. 사실 마르타는 “용기 있는 강한 여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이 전하듯 그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다.”라고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르타는 스스로 앞으로 나설 줄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오빠 라자로가 죽은 후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 나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느님께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마르타는 ‘늘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지닌 여성’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너무나 바빴습니다. 일에 온통 사로잡혀 늘, 언제나 바빴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바라볼 시간, 예수님을 관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비교하시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미사에 참석하기는 하지만 늘 바빠서, 심지어 자녀들을 위해 쓸 시간도,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시간조차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라고 말하는 것은 안 좋은 모습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이른바 ‘바쁨교라는 종교의 신봉자가 됩니다. 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바쁨주의자’들의 집단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멈추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고, 복음을 집어 들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당신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늘 무언가를 하는 ‘행동의 언어’만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선이 아니라인간적인 선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으로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관상입니다. 마르타 자신에게도 그것이 부족했습니다. 마르타는 용감했고, 늘 앞으로 나아갔으며,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했지만, 그에게는 평화, 즉 주님을 바라보며 시간을 내어드리는(시간을 잃어주는) 평화가 부족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그저 ‘달콤한 무위도식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터치하셨기에 주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곳, 주님이 주시는 영감으로부터 나중에 수행해야 할 일들이 나옵니다. 봉쇄 수도원 수녀들과 수도자들의 예를 들어봅시다. 그들은 종일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 베네딕토의 좌우명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즉 기도와 노동이라는 두 가지를 함께합니다. 관상과 활동,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도 각자 스스로 질문을 던져 봅시다. “나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너무 관상적이기만 합니까, 아니면 너무 바쁘기만 합니까?

오늘 독서인 갈라 1,13-24에 기술된 ‘그리스도인 바오로의 모범’을 기억합시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교회를 지독하게 박해하고 짓밟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터치하시고 선택하셨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의 태도는 겉보기에 ‘이례적’입니다. 바오로는 회심 직후 곧바로 “전도하러 가지 않고”, 편지에 쓰여 있듯 “곧바로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고,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즉, 그는 기도하러 갔고, 자신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러 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오로가 행한 모든 일은 주님을 바라보는 이러한 관상의 영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기에, 주님께서 그의 마음 안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엉뚱한 구렁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핵심 단어, 곧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심지어 영지주의적인 관상으로 치우쳐 극단에 있는지, 아니면 너무 바쁘기만 한지 알아보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과 사랑에 빠져 있는가?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음을 굳게 믿는가? 아니면 그저 무언가를 행하면서 … 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그리스도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마음을 바라보십시오. 관상하십시오!

일하고 지쳐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한 결혼한 여성의 예를 들어 봅시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입니다. 아내가 “오늘 어땠어요?”라고 묻고, 남편이 “좋았어, 좋았어” 하자, 아내가 “자, 앉아서 편히 쉬어요. 난 내 일 계속할게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아내라면 남편이 퇴근해 돌아왔을 때 남편을 안아주고, 키스하며, 함께 머물 시간을 냅니다. 아내를 대하는 남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관상 안에서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내고, 다른 이들을 향한 봉사 속에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관상과 봉사이것이 우리 삶의 길입니다.

우리 각자 생각해 봅시다. ‘나는 하루 중 예수님의 신비를 관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일하는가? 자아 상실에 이를 정도로 일하는가, 아니면 내 신앙과 일치하게, 복음에서 나오는 봉사로서 일하는가?’ 이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2018년 10월 9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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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것을 믿느냐?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요한 11,17-27)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엄숙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이 말씀의 거룩한 빛은 라자로의 죽음이 가져온 깊은 슬픔의 어둠을 압도합니다. 마르타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며 확고한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타의 희망을 머나먼 미래에서 ‘지금 이 순간’으로 가져옵니다. 부활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분 안에서 이미 마르타 곁현재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 계시는 우리에게도 도전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 역시 부활을 머나먼 신기루 같은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삶 가운데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신비롭게 작동하는 사건으로 믿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아득함과 슬픔을 무시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 예수님 친히 라자로의 누이들과 그 곁에 있던 이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시고 당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으며, 복음사가 요한이 덧붙였듯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인간이 되신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흘리는 눈물의 쓰라림과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위대한 표징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의 빛을 가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그분은 우리가 다시 한번 위대한 신앙의 도약을 이루어, 지금 이 순간 부활의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 우리가 이 신앙의 도약을 이룰 때,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됩니다. 신앙의 눈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넘어, 어떤 의미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바라보게 됩니다.(히브 11,27 참조) 그리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을영원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빛 안에서 평가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선을 지혜서 말씀에서도 발견합니다. 조기 사망한 의인의 죽음이 전혀 다른 빛으로 조명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어 그분께 사랑받던 그는 죄인들과 살다가 자리가 옮겨졌다. 악이 그의 이성을 변질시키거나 거짓이 그의 영혼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들어 올려진 것이다.”(지혜 4,10-11)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죽음은 불행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주님의 섭리이자 배려로 다가옵니다. 성경 저자는 하느님 눈에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지혜 4,8-9)라고 지적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만을 유일한 지평으로 삼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 가득한 계획을 완전히 놓쳐버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주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바라셨는지, 그를 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셨는지 깨닫지 못합니다.”(지혜 4,17 참조)

지난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는 주님께 그들이 살아온 삶의 비유를 올바르게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여 가끔 느끼곤 하는 불경스러운 슬픔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슬픔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신앙인들 역시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한 인간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본능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벗어버리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눈에 보이는 세상과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고방식을 뒤로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기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 안에서 받아들인 이 말씀은 세상을 떠난 형제자매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를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기도로 만들어 줍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살았던 삶을 진정으로 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그들이 성취한 선함, 그들의 강인함, 그들의 헌신, 그리고 그들의 강건하고 이타적인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이 세상의 고향이 아닌 더 나은 하늘 본향을 열망하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히브 11,16 참조)

그들이 이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굳건한 신뢰 안에서 바치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는, 이 지상 순례길을 걷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큰 유익을 줍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참된 시선을 심어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 할 시련의 의미를 밝혀주고, 우리의 마음을 참된 자유로 열어주어 우리가 영원한 보화를 끊임없이 찾도록 영감을 줍니다.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역시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8-9) 복음의 종으로서 사는 삶은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열망으로 형성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결정과 우리가 딛는 모든 발걸음의 기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을 떠난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며 바친 증언을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특히 이러한 시련의 때에, 여정이 더욱 힘겨워질 때 우리에게 지혜의 영을 계속해서 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당신의 약속에 영원히 신실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십니다.(2020년 11월 5일 세상을 떠난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위한 위령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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