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파스카

8월 6일,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동방 교회는 이 축일을 ‘한여름의 파스카’라 부르며, 비잔틴 전례력의 열두 대축일 가운데 하나로 기념한다. 이날이 8월 6일로 정해진 것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기 약 40일 전에 변모의 표징을 보여주셨다는 오래된 전승에 따른 것(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 기준으로 역산)이다.
동방 교회가 일찍부터 이 축일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데 비해, 서방 교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흐름이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거룩한 변모가 묵주기도 ‘빛의 신비’에 포함된 사건이라는 점은, 이 신비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신부는 이를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비”라고 부르며, 변모된 우주, 곧 ‘그리스도화된 창조’의 첫 열매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복음서는 이 사건이 “높은 산”에서 일어났다고 전한다. 전통적으로 이 산은 타보르 산으로 여겨져 왔으나, 문맥상 헤르몬 산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어느 산이든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산’이 하느님과의 만남, 곧 계시의 장소를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마태오 복음은 명시적으로 숫자 ‘일곱’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사명을 일곱 개의 ‘산’이라는 상징적 무대 위에 배열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유혹의 산, 산상 설교의 산, 치유의 산, 기도의 산, 변모의 산, 올리브 산, 그리고 파견의 산. 이러한 구성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드러내며, 그분의 삶 전체를 새로운 시나이 계시의 여정으로 보여준다.
또한 일부 성서학자들은 이 사건의 배경을 유다인의 초막절과 연결하기도 한다. 초막절은 광야에서의 여정을 기념하며,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임시 거처에 머문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의 말—“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은 단순한 당혹스러운 말이 아니라, 그 순간의 영광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인간적인 열망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변모의 산 위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다. 그들은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며, 당시 표현으로는 곧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이제 그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눈다. 더 나아가 두 인물 모두 시나이(호렙) 산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높은 산’은 새로운 시나이로 드러난다.
이 장면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현현이자 삼위일체의 드러남이다. 아버지의 음성이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빛나는 구름은 성령의 현존을 암시한다. 이는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간의 시간
이 ‘한여름의 파스카’는 우리가 여전히 ‘시간 안에 있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우리의 시간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이며, 완성을 향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파스카와 종말의 파스카 사이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시간이다.
거룩한 변모는 이 시간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간을 희망으로 밝혀 주는 빛이다.
우리는 때때로 말하고 싶다. “주님, 여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물 수 없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 르네 도말René Dauma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올라가고, 보고, 내려온다. 우리가 더는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거룩한 변모, 아름다움의 현현
인간은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참된 아름다움과 왜곡된 아름다움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변모의 축일과 같은 날, 인류는 ‘영광의 빛’이 아니라 ‘파괴의 불’로 세상을 뒤덮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변모(transfiguration)의 시대인가, 아니면 일그러진 변형과 훼손(disfiguration)의 시대인가?
“어떤 사람보다 수려하신”(시편 45,3)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아름다움을 드러내신다. 그것은 유혹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아름다움이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 곧 파스카의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때로 감추어진다. “고통의 사람”(이사 53,3)처럼 알아보지 못할 모습으로.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참된 변모를 만난다.
성찰과 기도를 위하여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점점 더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2코린 3,18)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게 하소서.”(시편 27,4)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 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탈출 33,18-23)
*이 글의 바탕은 Manuel João Pereira Correia, MCCJ 신부가 2026년 8월 3일자로 https://comboni2000.org/ 에 기고한 <The Easter of Summer>라는 글이다.
※ 함께 읽기: 마태 17,1-9(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기억할 7가지 상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