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73세의 나이로, 1859년 8월 4일 새벽에 42년 동안 사목했던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사목지인 아르스 본당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축일은 8월 4일이다. 1905년 1월 8일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9년에 그를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간추린 생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St. Joannes Baptistae Maria Vianney, 1786~1859년)는 프랑스 대혁명(1789~1799)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유년기와 소년기에 겪었다. 당시 많은 성직자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신앙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믿음을 지켜나갔다.
18세에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Ecully) 본당의 발레(Balley) 신부에게서 사제직을 위한 개인 지도를 받기 시작했으나, 기초 학력의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09년 징집되어 복무하던 중 병을 앓았고, 이 과정에서 군 이동 명령을 따르지 못해 탈영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레 노에(Les Noës)에 숨어 지내다가 1810년 3월 사면령으로 신분을 회복하였다. 에퀼리로 돌아온 그는 학업을 재개하여 1813년 리옹 대신학교에 진학했으나, 학업 성취의 어려움으로 한때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레 신부의 도움으로 마침내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2년간 보좌신부로 지낸 뒤, 1818년 작은 시골 마을 아르스 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42년 동안 사목하였다. 1827년경부터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수많은 신자들이 몰려들었고, 매년 약 2만 명이 아르스를 찾았다.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고해성사에 바치며 영혼들을 돌보았다. 그런데도 일부 동료 사제들은 그를 무식하고 과도하게 열성적인 사제로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모든 사제가 저 신부만큼 미쳤다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그를 두둔하였다.(*참조: 굿뉴스-성인)
본당 신부로서의 삶
그의 사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동료 사제들의 무시와 냉대 속에서 사제단에서 축출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모냉 신부의 전기 『아르스의 본당 신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를 비난하는 청원이 제기되었을 때, 비안네 신부는 오히려 자신이 그 직무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며 그 청원서에 스스로 서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매를 맞고 쫓겨나며 침묵 속에 사라질 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선을 이루기보다 방해가 되었으니, 그 벌은 마땅합니다.”
* 알프레드 모냉(Alfred Monnin) 신부가 1861년에 발간한 <Le Curé d’Ars, vie de M. Jean-Baptiste-Marie Vianney: 직역-아르스의 본당 신부, 장 바티스트 마리 비안네의 생애>라는 책, 영어 번역본으로 <Life of the Curé of Ars>이 있다.
비안네 성인의 강론에는 참된 겸손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그는 말한다. 「교만한 사람은 더 많은 칭찬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척합니다. 그러나 그 낮춤은 오히려 자신의 허무함을 더 크게 드러내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모두 말하며 칭찬을 갈망하고, 결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이러한 사람에게 작은 불쾌함이라도 드러내 보십시오. 그는 곧 분노하며 여러분을 비난할 것입니다. … 우리는 하느님 눈에 비친 모습 그대로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참으로 비참한 존재임을 안다면, 어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깊이 성찰한다면 겸손은 자연스러워지고, 교만은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읽기: 성체성사–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빵에 대한 믿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