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St.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sus)께서 “오, 저의 하느님! 켜켜이 깊게 쌓이고 끝없이 잡다한 기억의 힘은 실로 위대하면서도 두렵습니다.(Great is the power of memory, a fearful thing, O my God, a deep and boundless manifoldness.)”(고백록 10권, 17.26)라고 말씀하시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혹시 성인께서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설령 아무리

마르 4,35-41(연중 제12주일 ‘나’해)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초반부에 위치한다. 마르코 복음의 초반부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 시절 이야기로서 그분께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그분의 능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에는 성난 바다나 두려운 큰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참조. 탈출 15,8 시편 89 이사 51,9-10) 오늘 복음에서도 호수는 거칠고 두려우며 위험한 곳이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요나서와 그 얼개가 매우 흡사하다.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교황 프란치스코 G7 인공지능(AI) 세션 참석

        *다음은 2024년 6월 14일에 이탈리아 보르고 에그나지아(풀리아)에서 행하신 교황님의 AI 관련 연설문 전문의 번역이다. 번역 원문(영어)은 바티칸 공식 사이트(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speeches/2024/june/documents/20240614-g7-intelligenza-artificiale.html 흥미로우면서도 두려운 도구 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G7 정부 간 포럼의 지도자 여러분께 인공지능이 인류의 미래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느님의 영으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6월 21일)

23세로 생을 마감했다.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이며 특별히 순결의 덕을 거슬러 고통받는 이들, 그리고 AIDS로 고통받는 이들의 주보이자 병으로 시달리는 이들이나 그들을 위하여 고생하는 이들의 주보이다. 돈 보스코의 저작물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성인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먼 친척으로서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귀족 중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의 출신이다. 그 가문에서는 많은 군

완성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하신다. 주님께서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완성해가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 안에 쉬기까지 불완전체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혼이 꿈꾸는 “완성”은 무엇이며, 주님께서 꿈꾸시는 “완성”은 무엇일까? 바오로 사도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8.10)이라 하셨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는 “사랑의 완성은

돈 보스코와 예수 성심 대축일

예수 성심에 관한 돈 보스코의 신심은 대단했으며, 돈 보스코는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도 이를 강조하였다. 돈 보스코의 이러한 신심은 기도나 조언, 권고, 심지어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돈 보스코의 생애 동안 여러 형태와 표현으로 드러난다. 성인의 이러한 신심은 막중한 것이어서 살레시오 카리스마 자체의 일부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후계자들과 영적 아들들에게까지 전해진다. 돈 보스코는 예수 성심에 관하여 “바로 이곳 예수

현존의 성사聖事

「……돈 루아와 칼리에로 추기경의 편지들에서 돈 보스코는 항상 “아빠”라고 불렸습니다. 돈 보스코의 건강이 악화하던 1887년 12월 7일 저녁 돈 루아는 칼리에로 주교에게 단순하게 “아빠 위독(Papà è in stato allarmante)”이라고 전보를 쳤습니다. 옛날 돈 보스코 찬가는 “우리 아빠 돈 보스코 만세!(Viva don Bosco nostro papà!)”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저는 “교육이 마음의 문제”라는 말이 정말 얼마나 맞는 말인지를

문화와 예술에 관하여

예술이 종교의 시녀였던 시절이 있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 ‘신성한 질서가 있는 곳의 주소지(address to sacred order)’로 인식되었고, 예술은 그 주소지의 중심에 있었다. 라스코와 페슈 메를(Lascaux and Pehe Merle)의 동굴 벽화, 아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456년)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년)의 비극,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건축,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년)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525~1594년)의 폴리포니……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께

마르 4,26-34(연중 제11주일 ‘나’해)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과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군중들에게 비유로 긴 말씀을 하신다.(참조. 마르 4,1-34) 비유는 얼핏 수수께끼처럼 들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그리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이들, 예수님 “밖에서…밖에 서서”(마르 3,31.32) 있는 “저 바깥 사람들”(마르 4,11)이 아닌, ‘안에’ 있으려는 이들에게 ‘비유로 남지 않고’(참조. 마르 4,11) “신비”(마르 4,11)가 된다.

마르 3,20-35(연중 제10주일 ‘나’해)

부활 시기를 끝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두 대축일, 곧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고 이제 ‘나’해의 복음인 마르코의 복음으로 돌아와 연중 제10주일을 맞는다. 바야흐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스승으로 인정받고 계셨으며,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잇는 예언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