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제정된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루카 2,41-42)로 시작한다. 열심한 유다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가 전해주었던 토라, 곧 율법의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머무르게 하시려고 선택하시는 곳에서만…파스카 제물을 잡아 바쳐야 한다.”(신명 16,6)라는 말씀에 따라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풀려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스카 축제 때면 해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성장한 아들 예수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이 아들을 순례길에 동행하도록 한다. 이는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서 예수가 율법과 계명의 아들, 곧 주님 앞에서, 그리고 동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책임감 있게 잘 지키는 아들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그러하듯이 그때에도 부모를 따라 순례길에 오른 아이들은 말씀을 쓰인 그대로 잘 읽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도록 초대받았을 것이고, 성경의 전문가들이나 율법 교사들이 아이에게 질문하였을 것이며, 아이는 토라에 쓰인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열심히 말씀을 읽고 공부했음을 보이면서 잘 대답해야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도 똑같았다.
1.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듣기도…묻기도”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루카 2,43-45) 한참 사춘기의 아이인 예수를 잃은 부모는 혹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를 아들 걱정에 불안했고 두려웠다. 그래서 부모는 먼저 “친척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는다. 부모로서 소년 아들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럽고 심각한 질문이다. 결국,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되짚어 돌아가기로 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부모는 아들 예수를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6) 우리는 부모로서 애가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사흘”을 헤맨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 살게 되리라.”(호세 6,2) 하는 말씀처럼 히브리 사람들에게 관습적으로 충분히 긴 고뇌의 시간을 뜻하는 “사흘째”에 부모는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찾는다. 온갖 곳을 헤매다가 마침내 율법을 지키려고 열성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는다.
아마도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내내 그곳, 곧 하느님의 쉐키나(처소, 거처)에서 지낸 듯하다. 예수는 라삐들과 율법 학자들, 성경을 해석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있었다. 우리는 뭔가 기적적이거나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것처럼 이 대목을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는 함께 있던 이들에게 어떤 엄청나고 놀라운 진리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말 라삐들의 제자로서 그들을 잘 ‘들으셨고’, 주님께서 듣는 이들에게 무엇을 뜻하고자 하시는지 의문 생기는 것들을 ‘물으셨다.’ 우리는 복음의 이 대목을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1열왕 3,7.9) 하는 솔로몬의 기도처럼 ‘묻기 위해 들으시는 예수’, 혹은 ‘제자가 되신 예수’와 같은 소제목을 붙여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기원후 38년경~?)가 증언하는 대로 열두 살 소년 사무엘이 예언을 시작하였듯이(참조. 1사무엘 3장), 비슷한 나이의 “아주 젊은 사람” 다니엘이 지혜의 말을 한 것처럼(참조. 다니 13,45-49), 예수님 역시 성장 과정 안에서 ‘가르침의 아들’이 되고 “말씀의 종”(루카 1,2)이 되시어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루카 2,47) 한 대로 주님의 현존 안에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2.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48-50) 어머니 마리아가 놀라 아들 예수를 꾸짖듯이 말한다. 루카가 전해주는 바에 따를 때 아버지 요셉은 말이 없고, 마리아가 “네 아버지”라면서 요셉의 걱정을 전한다. 비록 혈육은 아니었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엄연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에 예수는 투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항하는 것도 아니게 단순하게 하나의 계시처럼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의문문의 대답은 분명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에 남아서 자기들의 뜻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얻은 이 아들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과 느낌에 대해 깊이 자문하게 하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소년 예수와 부모 사이의 관계에도 오해와 갈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가정의 자녀들처럼 소년 예수도 그의 부모에게 걱정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부모는 부모대로 교정과 꾸지람으로 그의 성장에 교육적으로 개입하려 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한 자녀가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무척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성장 과정도 이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이었다.
3. “제 아버지의 집…모르셨습니까?”
뒤이어 소년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며, “제 아버지의 집에(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en toîs toû Patrós mou)”라고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참아버지를 모신 분이다. 공생활 동안 몇 번이고 “아버지”를 가르치시고 외치신 분이다. 예수는 세상에 오시어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모신 당신 마음, 거룩하고 또 거룩한 지성소,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있어야만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 신명 5,16) 하는 계명을 상기하며 말씀하신 어머니 마리아에게 소년 예수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3-6 신명 5,7-10) 하는 계명, 곧 부모 공경에 우선하는 하느님 관련 계명을 상기하라는 듯이 답한다. 예수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며 시편 말씀을 인용하는 기도로 “아버지”를 부르며 공생활을 마감하시는 것으로 기록한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이렇게 “아버지”를 부르는 고백의 여정이었다.
예수님은 반드시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야만 한다고 하시고, 그렇게 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면서 공생활 내내 제자들에게 이를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는 분으로 남는다. 그의 운명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온전한 자유로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자 사명으로 당신 삶을 살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는 이러한 예수님의 여정이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맞으시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으시는 부활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기꺼이 계속 오르시는 여정(참조. 루카 9,22;13,33;17,25;22,7.37;24,7.26.44)에서 처절하고도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여러 번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쫓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음에도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들도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50)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훗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18,34)라는 문장을 남긴다. 루카가 기록한 대로 성전에서 사흘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 말을 주고받던 중에 소년 예수가 부모에게 한 이 말을 듣고 부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남는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다. 교육은 지금 알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아이 안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다.
4.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그들에게 순종하며”
복음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라는 문장으로 뒤를 이어간다. 복음으로 볼 때 소년 예수가 부모 공경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일단 표징은 드러났고, 언젠가 부모도 이를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재 속에 담긴 뜨거운 불씨처럼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간직한다. 이 불씨는 장차 믿음의 불꽃이 되어 십자가의 순간과 오순절에(참조. 사도 2,1-12)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는 불꽃으로 맹렬하게 타오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고향집이라는 학교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도록 교육받았다. 야훼, 에도나이, 엘로힘…그 무엇도 아닌 ‘아빠, 아버지’라 부르도록, 그 말은 언제나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으로 살아야 함을 교육받았다는 뜻이 된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자렛 집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뜻만을 찾도록 교육받았다. 어릴 때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하셨고, 성장해서는 “내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의 뜻을 이루러 왔다.” 하시면서 얼마나 자주 아버지의 뜻(마태 6,10;7,21;12,50;18,14;21,31;26,42 루카 22,42 요한 6,40)을 강조하셨는지 모른다.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그러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하실 때도 그러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내 형제요 누이이며 어머니”라 하실 때도 그러하셨고…. 그리하여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셋째로 예수님은 나자렛 집에서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살라고 교육받았다. 잉태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봉사하러 갔고, 인간에게 봉사하고, 특히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봉사였으며,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하시고, 최후의 만찬 때에는 발을 씻겨주시면서 너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셨던 것이니, 이 모든 것을 나자렛의 고향집 학교에서 공부하셨다. 주님께서는 가끔 이렇게 나자렛에서 배운 것들이 흔들릴 때마다 혼자 기도하러 가셨고 어린 시절에 고향집에서 익혔던 내용들, 아버지의 아들임을 자각할 것, 아버지의 뜻만을 찾을 것,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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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음은 열두 살 시골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명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을 알려준다. 또한, 이는 살레시오회를 비롯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지녀야 할 교육적 삶의 원리를 담는다. 몇 구절만 예를 들어본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하는 50절의 말씀처럼 성 요셉과 성모님도 다 이해하지 못하였던 예수님 안의 신성神性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부모나 선생은 알량한 점수 몇 개를 바탕으로 아이의 모든 것을 다 파악했다는 듯이 아이의 인생을 일찍이 결정하려 든다.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에서는 아이 안에 담긴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하느님께 열쇠를 청해야 한다고 한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하는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육성도 적이 인상적이다. 부모들이나 교육자들은 아이들로부터 “모르셨습니까?”라는 말을 늘 듣는다; 이 문장에는 또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호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아이가 되도록 도움을 주며 장차 아버지가 되어야 할 아이들에게 참된 부성父性을 증거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아니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이 문장에는 교육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개념 하나가 은밀하게 담겨 있다. 바로 ‘자유’라는 개념이다.
『가족에 대한 자유다. 여기서 가족이란 익숙한 것의 상징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워야 한다.…자유는 고향을 떠나 낯섦에 처하는 데 대한 동의다.…어딘가에 뿌리를 두는 것은 삶의 일부요, 사는 맛이다. 이상적인 것은 뿌리박음-사회적으로, 나아가 지리적으로도-과 고향떠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다.』(프랑수아 바리용François Varillon, 1905~1978년, 흔들리지 않는 신앙Joie de Corire, Joie de vivre,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사, 2000년 1판 1쇄, 2018년 12월 2판 6쇄, 409-410쪽)
교육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를 지향한다; 부모나 선생들이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50절)하며 기도하고 아이들과 함께 18년 정도만 성실히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간다면 모든 아이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2절)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들 각자가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유명한 스승을 찾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46절) 하게 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기들의 계획대로 할 수만 있으면, 돈을 들고 가서라도 선생을 매수하여 아이들이 유명한 선생들을 만나게 하고, 억지로라도 그들의 가르침을 아이들의 머리에 박아넣으려는 듯이 ‘말을 잘 들으라’라고만 한다.
성탄 당일에도 열일 하시는 신부님도 Merry Christmas~~~!!!!
떠나는것도 보내는 것도 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깨달음 잊지않기를 항상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