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죽 혁革’ 옆에 ‘흙 토土’를 두 개씩이나 포개어 만든 ‘홀 규圭’를 놓으면 발에 신는 신발류를 총칭하는 ‘신(발) 혜鞋’가 된다. ‘홀 규圭’는 일정 영토를 다스리는 제후諸侯에게 천자가 내리는 옥으로 만든 일종의 지휘봉이자 상징물이다. 그러나 ‘신 혜鞋’에서 ‘홀 규圭’는 그 뜻과는 상관없는 소릿값이고, ‘가죽 혁革’이 의미부이다. ‘홀 규圭’의 생김새가 위 끝이 뾰족하고 아래가 네모진 형상임을 고려하여 굳이 억지로 꿰어맞추면, ‘신 혜鞋’는 가죽으로 발을 감싸서 땅을 밟는 도구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면서 그럴듯해진다.
많은 이들에게는 고무신을 신던 시절도 있었고, 군인들의 워커 같은 신발 한 켤레로 사시사철을 나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고무신이나 워커는 좀체 보기 어렵게 되었고, 가난과 풍요를 떠나 대개는 신발 한 켤레가 다 헤질 때까지 그것만을 신는 사람도 별로 없다. 후배 하나가 허리 통증 때문에 고생을 하는 와중에 아들을 염려하신 어머니께서 아주 비싼 신발을 사 오셨다며 신을 수밖에 없었다고 계면쩍게 말한다. 문득 운동화 한 켤레를 사려고 나갔다가 너무 많은 다양성이나 용도, 기능성 때문에 선뜻 선택할 수 없어 당황하면서도 “지금 신던 것 조금 더 신고 다음에 사지!” 하며 핑계 아닌 핑계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내심의 당황을 감추며 돌아서야 했던 두어 번의 경험이 떠오른다.
차제에, 즐겨 신는 운동화를 새로 산다면 어떤 것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검색해보자 하다가, 아뿔싸! 깜짝 놀랐다. 새 신발 사는 요령과 팁으로부터 시작하여 신발의 구조와 다양성이 발에 미치는 영향, 다양한 신발의 기능과 용도, 발의 생김새와 그에 따른 신발에 관한 의사 선생님들의 조언과 전문인들의 증언이나 조언들, 브랜드 평가들이 넘쳐났으며, 심지어는 신발을 골라주는 전문인이라는 직종까지 등장한다. 새 신을 살 때 주저 없이 잘 사려고 시작한 상식의 검색이 정보의 홍수에 나를 익사시키면서 선뜻 내 발에 맞는 신발 한 켤레도 도저히 살 수 없도록 나를 영락없이 자신 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신발을 살 때 살펴보아야 할 내용만 하더라도 안전성stability, 유연성flexibility, 편안함comport, 힐 카운터heel counter, 중창midsole, 깔창insole, 토 박스toe box, 발등instep, 폭width, 길이length ……등등 있는지조차 몰랐던 말들까지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
그저 편한 신발, 신던 신발, 오래된 신발이 좋은 신발이라고 다시 한번 자위 아닌 자위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검색창을 닫지만 씁쓸하다. 지금의 내 재주로는 도저히 찾을 길이 없으나 그런 신발들보다 뛰어나게 멋있고 진짜 편하며, 비교할 수 없게 가성비가 좋고 값지며, 감탄을 자아내는 신발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디 신발에 관한 정보뿐이랴, 우리는 각계각층에 각양각색의 물건과 상품들이 넘쳐나는 ‘과잉문화(a culture of excess)’를 산다. 어디에든 정보와 물건이 넘치고 또 넘친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물질주의의 범람을 넘은 대홍수 속에서 많은 이가 허우적거린다. 전화기 하나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무수히 많은 것들을 구매할 수 있으면서도 많은 이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며 한번 샀던 것을 다시 사거나 누군가의 의견에 휘말리는 쳇바퀴에 갇히고 만다. 자본주의가 표방하는 ‘선택의 제국(the empire of choice, 로저스 브루베이커Rogers Brubaker)’에서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하는 무한한 선택지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아예 선택할 수 없는 인간으로 인간을 조작한다. 과거에 ‘주어졌던’ 것들에 대해 ‘선택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산다.
자본주의가 낳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상품주의는 결과적으로 외설猥褻(pornography)과 따분함(boredom)을 생성한다. 무한한 옵션, 무한한 다양성, 무한한 선택에 직면하면서 인간이 느끼는 자율성, 삶의 주도성, 해방감은 실로 강력하다. 그러나……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이렇게 끊임없이 확장하는 물질의 기계·기술적 속성은 나를 사로잡아 나를 제압하는 폭력이 된다. 자유의 확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위축이요 말살이다. 그리고 무기력에 나를 가둔다.
냉정한 성찰이 필요하다. 과잉의 불쾌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강건剛健(fortitude)과 정결(chastity)의 미덕을 연마해야 한다. 엄청난 양의 상품문화가 낳는 역설적인 공허함 속에서, 하루 그리고 또 하루가 간다. 만연한 물질주의는 영적 양심을 무디게 하고 나를 넘어선 그 무엇,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부추길 수 있는 동기·동력마저 무디게 하면서 영적인 파산에 이르게 한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욕구뿐만 아니라 영적 욕구도 있다. 영혼이 있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향해, 누군가를 향해 방향 지어지고 소속되어 있는 존재이며, 아름다움과 사랑, 행복이나 우정 같은 영적인 재화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주의와 그를 추종하는 슬픔과 공허의 제국에 맞서 대응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인이 속된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유롭도록 세상과 재화에서 분리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8-9)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이탈·분리를 생각하더라도 여타 다른 종교들도 표방하는 종교인일 수는 있어도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며 부활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재계齋戒와 금식·단식은 가장 큰 기쁨인 부활의 은총을 얻기 위한 그릇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의 금식과 절제, 단식은 부활의 기쁨과 환희를 향한다. 부활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절제로 물질주의의 슬픔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를 세상에 선물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금식과 기쁨은 양면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마태 6,16) 하신 것이 아니던가!
무리하게 갑작스런 운동을 시작하다 족저근막염으로 5년 이상을 고생한 경험이 있는지라, 내가 신고 싶은 신발이 아닌 그저 내 발에 통증을 주지 않는 신발만 신어야 했다. 하물며, 그런 신발을 찾는것조차 무지 어려웠었다. 오랜 동안의 통증이 언제 그러냐는 듯 사라진 지금은, 그저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노래처럼 절로 부르게 하는데, 생각하면 족저근막염은 나에게 긴 금식과 같은 시간이었고, 기적적인 치유는 기쁨이었다. 이것이 바로 양면의 뜻인가 문득 생각하면서, 언젠가 강론 중 듣게 된 내가 하지 못하면 하느님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다는 말도 문득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