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다’해(루카 13,1-9)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

교회는 ‘가’ ‘나’ ‘다’해를 막론하고 통상 사순 제1주일에는 전례력에 따라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에서 각각 취한 예수님의 유혹에 관한 복음을 듣고, 사순 제2주일에는 역시 같은 식으로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복음을 듣도록 하는데, 사순 제3주일에는 각 전례 주기마다 각각 다른 복음을 듣도록 안내한다. 루카복음을 따라가는 올해 ‘다’해 사순 제3주일에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회개에 관한 복음을 채택하여 부활절을 향하여 가는 여정을 특별히 새롭게 하도록 이끈다.

1.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겼다. 첫째는 회개이고, 그 둘째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복음의 첫 절은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갈릴래아 학살사건)을 예수님께 알렸다.”(루카 13,1)라고 한다. 하느님께 보호와 도움을 청하려고 제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빌라도 총독이 물리력을 동원해 처참하게 죽임으로써 그들이 드리려던 제물이 피에 젖었다는 사건이다. 예수님께 소식을 알린 사람들은 아마도 로마 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반항하려던 동족들을 억압적이고도 폭력적으로 무참하게 살해한 로마를 고발하며, 비참하게 죽어간 동족에 대해 그들의 죄 탓이며 업보라며 안타까움으로 동조해주시기를 예수님께 청한 셈이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라도 비극적인 상황은 모두 자기들이 저지른 업보나 죄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루카 22,25)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듯이 세상 통치자들의 억압적인 통치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으로 답을 하시면서 소식을 가져온 이들에게 진정 결정적인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때임을 밝히시고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자 하신다. 그래서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3)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비극적인 상황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앎에 관해 말씀하시는 기회로 삼으신 것이다. 마치 ‘그 사람들이 죄를 짓고 그에 따라 벌을 받아서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하시는 것 같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할 때, 선대 조상들의 죄를 후손들이 물려받아서 그런 일이 생긴다거나 자기가 지은 어떤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도스토옙스키Dostoevsky(1821~1881년)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잘 말해주듯이 사람들은 그럴 때 금방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일까?’ 하고 자문하곤 한다.

*요세푸스가 전해주는 유다 고사에 의하면 복음과 비슷한 내용으로 빌라도가 35년 가리짐 산으로 제사 지내러 올라가던 사마리아인들을 대거 학살했다는 내용, 예루살렘의 수로 공사를 위해 성전에 있던 돈을 활용하려 했을 때 그에 반대하던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봉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빌라도가 이들을 학살했다는 내용 등이 전해진다. 실제로 빌라도는 군중들의 집회가 폭동으로 번질까 염려하여 예루살렘에 여러 차례 군사적 개입을 하였다.

2.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

예수님께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종교인들 안에 깊이 자리 잡은 ‘벌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이미지를 타파하시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인간에게 책임이 있거나 폭력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또 다른 일을 예시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신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4-5)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너희는 그 사람들이 죄를 지어 자동으로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모독하지 마라!’ 하시는 것 같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시내 동남부에 있는 저수장이다. 유다 임금 히즈키야(BC 716~687년 재위)가 아시리아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512m에 달하는 땅굴을 뚫어 예루살렘 성 밖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Gihon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모으기 위하여 실로암 저수장을 만들었다.(2열왕 20,20 요한 9,7) 여기의 “탑”은 이 실로암 근처의 성벽에 있던 탑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길은 어떤 길일까? 예수님께서는 우선 우리의 인생에 다른 관점을 갖도록 가르치신다. 인간의 모든 생명은 폭력이나 악, 그리고 죽음으로 위협을 받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을 맞더라도 하느님의 심판은 오직 죽음을 넘어 맞을 최후의 심판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심판자이시며 징벌자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고, 그 대신에 인간의 연약함이나 피할 수 없는 실수들, 그리고 항상 위태롭게 살아야만 할 인생을 깊이 숙고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어떤 인생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누군가가 스파이처럼 그 인생을 감시하며 행여라도 잘못하면 가혹하게 징벌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그런 인생은 없으며, 우리가 지은 죄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마지막 심판 때에 감당해야 할 것이라 하신다.

학살되었든 참사가 되었든, 그러한 죽음들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맞아야 하는 또 다른 죽음의 표징이다.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 앞에서 궁극적으로 맞이할 죽음을 이미 이 세상에서 스스로 마련한다. 언제나 놀라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인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 외에도 인생에서 저지른 죄악으로 맞는 또 다른 영원한 죽음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 예언자로서 악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하시려는 것보다는 회개로 초대하고자 하신다. “회개”라는 이 단어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는 영어에서 흔히 repentance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말로 히브리말로는 shuv / teshuvah, תְּשׁוּבָה이다. 우리 말로는 ‘돌아가다’ 곧 주님께로 돌아가고, 거스르며 살았던 율법으로 돌아가 애초에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회개의 여정은 사고방식과 행동에 관한 내용이며,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삶의 방식을 드러나게 바꾸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제1성으로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참조. 마태 4,17) 하신 것이다. ‘회개하여 믿고, 믿어서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저지르고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만나시고, 용서하시며,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로지 회개를 위해 주어지고 열린 시간이다. 그런 의미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의 기회이다. 회개란 우리가 모두 “구름(하느님의 현존, 셰키나) 아래에 있었던 사실, 모두 바다를 건넌 존재(출애굽)라는 사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스도라는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으며 살았다는 사실,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는 사실(참조. 오늘 제2독서 : 1코린 10,1-4)”을 상기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나아가 “악을 탐내지 말고, 투덜거리지 말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삶(참조. 오늘 제2독서 : 1코린 10,6-12)”을 말한다. 회개를 외면하는 것사랑을 외면하는 것, 회개하지 않는 것은 수많은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에프라임의 탄식처럼 “길들지 않은 송아지 같은 저에게 주님께서 순종을 가르치시어 제가 순종을 배웠습니다. 저를 돌아가게 해 주소서.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주, 저의 하느님이십니다.”(예레 31,18)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회개는 내 삶의 방식을 하느님의 사랑에 걸맞은 삶으로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니싸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335?~394년)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끝남이 없는 시작 안에서, 시작을 통하여, 시작과 함께 거듭되는 매일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의 연속」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 거듭거듭 용서를 빌고 또 비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3. “올해만 그냥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복음의 새로움을 이해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매우 아름다운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공들여)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해마다 열매철이 되면)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불만을 제기하며) 일렀다. ‘보게, 내가 (충분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삼 년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무익하고 다른 나무의 양분만 빼앗아가는 이 나무로)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누구나 무화과나무를 심은 포도밭 주인의 결정에서 우선 성과주의나 능력주의, 효율성을 따져 정의라고 생각하여 결정을 내리고마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뭔가 성과와 결실을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내줄 필요가 없고, 무엇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결과물을 따져 그에 비례하여 내주어야 한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비유에서 포도밭 재배인은 그가 일하는 땅, 그가 심은 것들, 잡초를 뽑고 물을 주었으며 비료를 주었던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포도밭 재배인은 자기가 가꾸는 포도밭을 자기 약혼자처럼 사랑하므로 감히 “주인님(Kýrie)”에게 중재안을 내놓으며 조금 더 잘 보살피고 세심하게 관리하며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겠다고 하면서 한 번 더 해보자고 사정한다. 재배인의 무화과나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각별하다.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며 자기의 수고와 시간을 기꺼이 더 투자하고자 한다. 그는 주인에게 그 불행한 나무를 특별히 보살피겠다고 약속한다. 설령 1년이 더 지난 뒤 아직 아무 결실이 없을 때라도 그 나무를 자기 마음대로 자르지는 않을 것이고, 자르게 되더라도 주인더러 “잘라 버리십시오” 할 것이라 한다. 이 마지막 말에는 재배인으로서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둘레를 파서 거름을…”이라 한다. “거름”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 은총을 받는 사람이 은총에 열려 있고 협력할 때만 은총의 열매가 열린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거룩하신재배인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한 번 더 인내하고 주변을 파서 거름을 주는 정성을 쏟()는지 돌아볼 일이다. 혹은 누군가가 나의 주변에서 그렇게도 하느님의 은총을 기도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며 갖은 정성을 다해 나를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비유에서는 인간의 응보적 정의하느님의 정의가 서로 대비된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저 자비가 아니라 언제까지라도 참고 기다리며 계속되는 위대한 자비이다. 성경 언어인 희랍어로서는 ‘마크로쑤미아, μακροθυμία, makrothumia’이다. 이는 영어로 ‘long-passion, patience, long-suffering, forbearance’ 등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우리 말로는 ‘한없는 기다림’이요 ‘기약 없는 고통을 참아 받으면서도 애정을 놓지 않는 마음’이다. 땅을 사랑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재배인)는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표상이다.

비유에서 재배인은 당연히 당신 포도밭에 오신 “아드님”이요 예수님이다.(참조. 루카 20,13과 병행구)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이사 5,1-2) 하며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서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라신” 하느님을 노래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 포도밭에 오시고 그 포도밭을 열과 성을 다해 가꾸시고 보살피셨다. 그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그 포도밭을 위해 중재하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과 포도밭 사이에 있고자 하셨고, 오로지 포도밭을 보살피는 일에만 매달리셨으며, 포도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살아주기만을 바라시며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포도밭 한가운데에서 하느님께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온갖 정성을 다해보겠습니다.’ 하신다. 그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과 교회라는 포도밭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포도밭 한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이다.(참조. 요한 15,1-8) 예수님은 당신 포도밭의 신랑(참조. 루카 5,35-35와 병행구)이시며, “그리스도의 인내”(2테살 3,5)로 기다리고 또 기다릴 줄 아시는 분이시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9 마태 3,10)라고 세례자 요한은 설파했다. 이러한 일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 아직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포도밭에서 하느님께조금만 더 인내해 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계신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죽음으로 우리 각자가 맞을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멘!

One thought on “사순 제3주일 ‘다’해(루카 13,1-9)

  1. Kyrie Elesion…..
    미사 통상문중 유일하게 라틴어가 아닌 자비송, 키리에 엘레이손, 크리스테 엘레이손… 그 부분이 나와 그 내용을 공유하신 신부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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