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장
사랑을 자극하는 적성適性(affinity, convenance)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흔히, 눈은 보고, 귀는 들으며, 혀는 말하고, 지능은 추리하며, 기억력은 기억하며, 의지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대로 말하자면, 다양하고 상이한 여러 기능으로 온갖 작용과 활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이란 정적情的인 기능, 즉 의지라고 이름하는 이 기능을 통하여 선으로 자신을 향하게 하고 거기서 자신을 즐기며, 따라서 사랑의 출처出處이며 기원이 되는 적성適性, 또는 친화력을 선을 위해 지니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유사성類似性이 곧 사랑을 내는 유일한 적성이라고 믿는 이들은 매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어린 아이들을 매우 귀여워하고 부드럽고도 살뜰히 사랑하는데, 그 대신 저 아기들한테서 노인들이 사랑을 받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식한 사람들은 무식한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로 하여금 온순한 자들이 되도록 보살펴 도와준다. 또한 병자들은 의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만일 무감각한 무생물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표상에서 내 이론을 입증키 위한 논거를 끄집어내어 보기로 한다면, 도대체 어떠한 유사성으로 인하여 쇠붙이는 지남철로 향하게 만드는 것인가? 한 지남철은 전혀 종류가 다른 쇠나 돌보다도, 다른 지남철끼리 훨씬 더 비슷한 유사성을 가지지 않았는가? 또 비록 어떤 이가, 모든 적성을 다 유사성에 돌리기 위해서, 쇠는 쇠를, 지남철은 지남철을 이끈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려 든다 해도 어찌하여 쇠가 쇠를 끌어당기는 것보다 훨씬 힘있게 자석이 쇠를 당기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물과 석회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이 있으며, 물과 스펀지(海綿) 사이에는 무슨 비슷함이 있는가? 그런데도 석회와 스펀지는 물을 만나면 비길 데 없는 탐욕을 발동하듯 물을 흡수해 버린다. 이것은 바로 무생물의 무감각 하지만 비상한 사랑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똑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도 때로는 매우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아주 반대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퍽 강하게 일어나고 당기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내는 적성이란 항상 유사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비례, 거래去來 및 상응相應함에 있다고도 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의사를 병자에게 사랑스러운 자로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이 지닌 유사성이 아님과 같이, 또한 그것은 오히려 한 사람의 풍요함이 다른 사람의 궁핍에 끼치는 상응성 때문이리라. 위의 경우 하나는 곤궁한 지경에 처해 있고, 다른 이는 도울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 있는데, 좀 더 다시 본다면, 의사는 환자들을, 스승은 제자들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자기들이 일하는 대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기들의 힘이 그들 위에 미치게 되는 연고다. 노인은 어린이를 몹시 귀여워하고 사랑하는데, 그것은 호감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천진난만하기 때문이며, 다시 말하면, 어린이의 지극한 순진함과 허약함, 그리고 온유함은 다른 이의 슬기와 고집을 더욱 뚜렷이 들어 올리고 드러내 주기 때문이며, 이러한 비유사성은 인정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어린이들은 노인들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 이유가 다름 아니라, 노인들이 자기들을 즐겁게 해주며, 같이 놀아 주고 또 자기들을 보살펴 준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어린이들은 노인들이 이끌어주어야 할 필요성을 은연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조화는, 즉 화음은 불협화음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 불협화음을 통하여 서로 닮지 않은 각 목소리들이 상응하게 되고, 모두가 비례대로 각각 다 함께 어울리게 된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닮지 않은 여러 종류의 보석이나 꽃이, 에나멜의 윤택과 다채로운 장식의 일치된 짜임새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사랑이란 항상 유사성과 동정(resemblance and sympathy)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응성과 비례(correspondence and proportion)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즉,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일치함으로써 양자 서로 완전한 것이 되고, 보다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경우에 생기는 것이다. 머리는 몸과 비슷하지 않고, 손은 팔을 닮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는 서로 잘 상응하며 자연스럽게 결부되어 있어서, 이 결합을 통하여 아주 훌륭하게 서로를 완성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이러한 지체들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면 이들은 매우 완전하게 서로를 사랑하겠으나 이 사랑은 유사성에 의한 것이 아니겠으니, 그들은 유사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지체들이 상호 완성을 위해 가지는 상응성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한 사람과 명랑한 사람, 또 몹시 까다로운 기질의 사람과 양순한 사람 이렇게 상반된 기질을 지닌 이들도 때로는 흔히 애정의 상응함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서로 받게 되는 영향으로써 아기들의 기질이 서로 조절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간의 상응성, 또는 대응성이 유사성이라는 것과 결부되는 경우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태어나게 마련이다. 그 까닭은 바로 유사성이란 단일성의 참다운 모상이므로 두 가지 비슷한 것이 같은 목적을 향한 비례에 의하여 일치될 때, 이것은 일치라고 하기보다도 차라리 단일성으로 되거나, 단일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것 사이에 있는 적성, 또는 이른바, 친화력(affinity)은 사랑의 첫째 근원이며, 이 적성은 상응성에 있고, 이 상응성이란 상호관계성 이외에 별다른 것이 아니며, 이 상호관계성은, 두 가지 상대자 양편에게 어떤 완전성을 중개하여 통해 주기 위해서 일치시키기에 알맞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우리의 이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9장
사랑은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
위대한 솔로몬은 상쾌하고도 경탄할만한 기백으로 엮은 신적神的 저서에서 구세주와 신심 있는 영혼 간의 사랑을 기묘하게 묘사하였으며, 따라서 이 책의 뛰어난 우아함 때문에 “노래들 중의 노래(아가雅歌, 영어-Song of Songs)”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 당신 권위에 영감과 더불어 갖는 대응성과 충동을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실천되는 이 영신적인 사랑을 보다 더 잘 관찰하도록 우리를 가장 부드럽게 들어 올리기 위하여, 솔로몬은 한 정결한 목동牧童과 또한 수줍음을 못 벗은 순결한 목녀牧女 간의 사랑을 구원久遠한 제시의 하나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애인으로 하여금 사랑에 놀란 모습으로 먼저 말을 건네게 한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주었으면!”(아가 1,1)
테오티모여, 여기서 주시할 것이 있으니, 목녀牧女를 대신해서 상징된 영혼은 얼마나 오롯한 한 가지 목적만을 가졌는지 보라! 자기의 열망과, 자기 애인과의 정결한 일치의 첫 표현에 있어서 그녀는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이 열망하고 있는 것과 그리워하고 있는 그것이 유일한 목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 입술로 날 입 맞추어 주오」라는 이 첫 소망은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뜻하지는 않는다.
입맞춤이란 모든 시대에 걸쳐 언제나 자연 본성적 본능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쓰여 왔으며, 그것은 곧 마음의 일치 결합이며, 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동물들과 공통된 면에 있어 우리의 영혼이 지니고 있는 격정과 충동을 표현하고 알릴 때, 우리의 눈과 눈동자, 이마와 그밖에 안색이나 용모로써 한다. 그래서 성경도 말하고 있다. “사려 깊은 사람은 얼굴을 대하면 알게 된다.”(집회 19,29) 어째서 흔히들 위인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있어 얼굴만 그리는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즉 얼굴은 그 사람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말과 생각을 널리 퍼뜨리지 않는데, 이 언사言思는 우리 영혼의 정신적 부분에서 내놓는 것이며, 이 부분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이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동물과 다르며, 말할 줄 아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인데 결국 이것은 입술을 통하여 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내쏟고, 마음을 열어젖힌다는 것은 곧 말한다는 것이다. 시편의 저자는, “그분 앞에 너희 마음 쏟아놓아라.”(시편 62,9)라고 말한다. 즉, 마음의 정을 말로 표현하고 발표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무엘의 경건한 어머니는 너무나 부드럽고 은은한 목소리로 기도하여 남이 그의 입술 움직임을 구별키 어려울 정도로써 하여,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1사무 1,15)이라 하였다.
이처럼 한 입술이 다른 이의 입술에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남에게 쏟아 넣는 입맞춤을 하는 것이며, 완전한 일치 속에서 서로가 결합하려는 열망을 입증하려는 것이 입맞춤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지 가장 거룩한 사람들 사이에는 입맞춤이 사랑과 애정의 표였고, 이러한 관습은 고대 신자들 간에도 보편화하였었음을 바오로 사도가 입증하고 있다. 즉,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로마 16,16 1코린 16,20)라고 로마와 코린토에 있던 신자들에게 써 보내셨다.
또 많은 이들이 밝히 말하고 있듯이, 유다 이스카리옷도 구세주를 팔아넘길 때 입맞춤으로써 알렸는데, 이 사실은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만나실 때 습관적으로 입 맞추셨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뿐 아니라 어린 애들까지도 사랑을 다하여 품에 끌어안으심으로써(마르 10,16) 당신 제자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마태 18,1-10 마르 9,35)을 실천토록 하셨는데, 많은 이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어린이는 성 마르시알레St. Martial였다고 하며 얀세니오Jansenius 주교도 그렇게 말하였다.(얀세니오 주교, 1510~1576년, 겐트 Ghent 지방의 주교였으며 ‘복음의 조화 주해concordia evangelica’와 ‘복음조화 주해commentarius in concordiam suam’을 썼다. 신애론의 저자는 후자의 70장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입맞춤이란 마음과 마음의 일치 결합을 나타내는 생생한 표이므로, 끊임없는 자기 애인과의 결합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그녀는 부르짖는다. 즉, “그이의 입술로 내게 입 맞춰주오!”라고. 나의 사랑이 내뿜은 그 무수한 탄식과 한숨과 불타는 창槍들이 내 영혼의 열망하는 바를 관철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는 계속 달리리라. 아, 그런데 내가 스스로 겨누면서 내달리고 있는 저 상급을! 즉, 마음이 마음과 일치하고, 정신과 정신의 일치인, 나의 하느님이요, 나의 사랑하는 분이시며 나의 생명이신 분과의 이 결합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내 영혼을 하느님의 마음 안에 모조리 쏟아부어 드리는 그때가 언제 오려나?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나의 영혼에 부어 주실 것이니 아주 행복하게 하나 되어 서로 떨어지는 일 없이 살리로다!
성령께서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실 때, 성령께서는 거의 항상 ‘일치’나 ‘결합’이라는 말을 쓰셨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구세주께서도 모든 신자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다.(요한 17,21) 성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평화의 유대 속에서 정신의 일치를 보전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에페 4,3) 마음과 영혼과 정신의 이러한 일치는 많은 영혼을 하나로 묶는 완전한 사랑, 또는 사랑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나탄은 다윗의 영혼에 집착되었다고 말했었다. 또 성경은 덧붙여 말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사무 18,1)라고.
프랑스의 위대한 사도께서는(성 디오니시오St. Denis를 말함) 자기가 느끼는 감정대로 자기와 절친한 벗 히에로테오스Hierotheus에게 다름과 같이 썼다. 『내 생각에 백 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하느님다운 그 이름들(De Nominibus divinus)’의 단 1장에서만 봐도, 사랑이란 만사를 통일시키고, 일치시키며, 이끌어 합치고, 포옹케하며, 집합시키고, 거래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나찌안즈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Nazianzen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Ⅳ권 6장) 말하기를, 당신과 당신의 벗들은 모두 오로지 한 영혼이 되었다는 표현을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그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투를 인정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벗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려 할 때엔, 그와 나의 영혼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한다.”』라고.(윤리대전Magna Moralia, Ⅱ권 2장) 미움은 우리를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그래서 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를 일치시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