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루카복음은 “(공공연히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공공의 적’과도 같은) 세리들과 (인생길에 낙오자가 된 듯한)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라고 시작한다. 소위 사제들이나 열심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런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모여든 이유는 아무도 찾아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저 판단하고 멸시하였지만, 예수님만큼은 그들을 여느 다른 인간(죄인)과 같은 한 사람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이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2) 이런 상황을 맞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상대로 ‘되찾은 양의 비유(4-7절)’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8-10)’,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11-32)’라는 3개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일련의 비유들을 두고 성 암브로시오(337~397년)는 “세 겹으로 꼬인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코헬 4,12)라는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며 삼위일체에 견준다. 오늘 복음으로 우리는 그중 세 번째의 비유를 듣는다.
1. “두 아들…작은아들…저에게 돌아올 몫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대부분 보통 가정이 늘 그러하듯이 그리 이상적이지도 않고 이런저런 사연과 관계가 얽히고설킨 한 가정을 배경으로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신다. 우선 집을 나갔는지, 아니면 이혼이라도 하였는지 어머니가 없이 아버지와 두 아들만 남은 가정에서 아들들은 성장했고, 같은 환경과 배경에서 자랐지만 사뭇 달라 서로 아웅다웅하는 “두 아들”이 있다. 현대말로 결손가정이다. 젊은 날의 자녀들이 늘 그러하듯이 두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아버지를 부정하려는 태도에서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여느 아버지들과는 아주 다른 아버지로 등장한다.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루카 15,12)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나 받을 수 있는 유산을 미리 청한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가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있느냐?’ 하는 요구를 한 셈이다. 유다 법에 따르면 집안의 장자는 다른 아들들이 받을 수 있는 재산의 배를 받고, 여자들은 아무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돈과 재물은 아들들의 숫자에 하나를 더한 숫자로 나뉜다. 그러므로 복음의 큰아들은 3분의 2를, 그리고 작은아들은 3분의 1을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런 반대도 없고 화를 내지도 않으면서 말없이 유산을 배분한다. 비유의 이 첫 문장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악행 앞에 선 인간에게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시면서 온전한 자유와 선택을 허락하시고, 침묵하시며 떨어져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준다.” “가산”이라는 말보다는 그리스어 본문에서 사용하는 βίον, bion(life, living), 곧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훨씬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루카 15,13)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저 베푸는 마음과 한없는 사랑으로 말렸겠지만, 작은아들은 떠나간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손을 내밀고 강요와 거침없는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면서 멋대로 행동하고 아들다운 모습에서는 거리가 멀게 행동한다. 작은아들은 그렇게 스스로 감옥이라고 여겼던 집에서, 시시콜콜한 감시요 잔소리라고만 생각하는 아버지의 눈에서, 그리고 형이나 아버지와 나누어 써야 했으므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고 여긴 집에서 탈출하여 “먼 고장”으로 떠나간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루카 15,13) 작은아들의 떠남은 젊음과 돈, 그리고 자유의 결과였고, 삶에 대한 즐거움, 모험에 대한 야심,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술, 친구 아닌 친구와의 도박, 매춘부 등과 어울려 지내느라 “모든 것을 탕진”(루카 15,14)한 작은아들은 마침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루카 15,14) “그래서 (작은아들은)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고)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루카 15,15) 유다인에게 “돼지”는 끔찍하게 불결한 동물이었고 돼지를 치는 그의 신세는 처참한 몰락이었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자기의 끝이 어떨 것인지 예감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루카 15,16-17)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이라 한다. ἤρξατο ὑστερεῖσθαι, érxato hystereîsthai, 무엇인가 부족하고, 무엇인가가 필요한 상태이다. ‘부족과 궁핍’은 인간에게 스스로 질문하게 한다. 작은아들이 느낀 필요는 그동안 허비한 돈이며, 생존을 위한 음식이고, “아무도 주지 않는”에서 보듯이 “아무도” 보살펴주는 이가 없는 공허와 외로움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하염없이 약한 존재여서 누구나 실수를 연발하며 산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와 시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이는 실수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 사실 실수가 없었다기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겠지만, 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과거의 실수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과거의 미성숙이 은총으로 성숙하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 옛날의 나는 현재의 새로운 나를 수도 없이 가르쳐왔다. 나라는 존재를 과거의 실수투성이의 어두운 모습 그대로 한정 짓고, 과거에 한 번 그런 모습이 내 모습의 전부인 양 생각해 버리는 것은 함정이다.
2.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달려가 목을 껴안고”
작은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도 같은 처지로 전락한 뒤에야 자각하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아직 회심한 것은 아니지만, 굶주림과 외로움에 대해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넉넉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노여움을 달래고 종노릇이라도 해서 배고픔이라도 해결해보고자 한다. 돼지로 사는 것보다는 아버지 집의 하인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18-20ㄱ) 회심도 없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없이 그저 자기의 관심사만을 위해 움직인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해야 할 말들을 준비한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 나아갔을 때는 정작 이런 말들이 필요 없었다. 작은아들이 제정신이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첫째 돼지치기, 둘째 아버지께 돌아가 종살이 청하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혀 다른 세 번째의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우선 배고픔에서 출발하고, 향수와 수치심, 그리고 상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하는 작은 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죄를 지었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 죄와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는 낱낱이 고백하지 않는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도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와 살았으면서도 그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한 아들이었다. 비유의 초점이 아버지에게 있음을 유념할 것이다. 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아들로 남지 않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대로 아버지로 남아있다.
혹독한 꾸지람을 예상하던 작은아들이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ㄴ-ㄷ) 아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첫걸음의 발을 뗀다. 벌이라도 감수하고 종노릇이라도 하고자 했던 그를 얼싸안은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리기 시작했다.”(루카 15,22-24) 거짓 울음이라도 울며 아버지 발밑에 엎드려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던 그를 아버지는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다시 품위 있게 치장하고 잔치를 베풀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뉘우침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어떤 말도 할 필요와 여유를 주지 않고, 그저 아들을 꼭 껴안는다. 그렇게 아버지는 용서라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용서를 베푼다.
아버지의 명령은 3가지이다. 옷은 성대한 예복에 해당하는 긴 옷으로 격식과 품위의 표시이고, 당시 노예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던 것에 의하면 신발은 자유인의 표시이며(사실 일반인들도 당시 많은 경우에 신발 없이 다녔다), 반지가 인장의 구실을 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의 분신으로서의 권위와 권한(참조. 창세 41,42 에스 3,10;8,2)을 회복하는 표시이다. 살진 송아지를 잡는다거나 한 식탁에 앉는 것 등은 모두 기쁨, 축제, 나눔의 상징들이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작은아들을 다시 살리고, 다시 일어서게 하고, 아버지와 새로운 일치의 관계를 다시 살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을 때 「아버지의 팔은 아드님 그리스도」라 하고, 그보다 앞서 성 이레네우스(130~202년)는 「아버지의 두 손은 아드님과 성령」이라 한다. “가엾은 마음이 든” 아버지의 손은 한 마디의 나무람도 없이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합하여진 것이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아들을 껴안는 아버지의 손을 아버지의 손과 어머니의 손, 두 손으로 그린다.(1606~1669년, 영문명-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69년 作) 한편에서는 어루만져주고, 위로하며 안심시키는 어머니의 손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도와주고 이끌어주며 힘을 주는 아버지의 손이다.
3.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너의 저 아우”
마침내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진짜 얼굴, 자비의 얼굴, 아무리 해도 결코 다 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의 얼굴을 알게 되었으므로 비유가 이렇게 끝나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유는 2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으로 계속 이어진다. 비유의 전반부가 죄인들이 하느님의 참 얼굴을 알 수 있도록 회개와 용서로 초대되었다는 내용을 담았다면, 비유의 후반부는 의인들, 아니 차라리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착한 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큰아들에 관한 내용의 가르침을 담았다. “(부지런하고 일을 마다하지 않는)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큰 아드님의)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 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너무나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화만 치밀어올라)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루카 15,25-28)
집밖에서 맴돌고 있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나와 (달래고 간청하며 살아 돌아온 동생과 함께 기뻐하자며 같이 들어가자고) 타이르자, 그가 (짜증 내고 화를 내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느냐고 아버지에게 대들고 아버지를 경멸하며)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집안을 꾸려가느라 개고생하고)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이나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 아우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일 뿐인) 저 아들이(아들이라는 작자가)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큰아들의 마음에는 분노와 상대적으로 공평하지 않다는 반감이 가득하다. 맏아들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본 적도 없으며 아버지를 믿지도 않았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없었음이 자명해진다. 그런 의미로 맏아들은 자기 동생과 아버지를 싸잡아 단죄하고 심판한다. 맏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었으나 감옥 같은 집에 머물렀을 뿐이고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므로 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염소든 송아지든 네 마음대로 잡아 친구들과 즐길 수 있었)다. (어찌하여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이 비유는 진정 아들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는 아버지에 관한 비유이고, 온전한 사랑, 전적인 사랑, 끝없는 사랑, 베풀고만 싶은 아버지의 사랑에 비겨 비뚤어져 나간 아들들의 비유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하느님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작은아들이건 큰아들이건 그 아들들 쪽이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아버지의 저 아들”이라 한 것을 두고 “너의 저 아우”라고 고쳐 부른다. 큰아들에게는 매일매일 동생을 동생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이 숙제로 남는다. 우리도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지만, 그 형제요 자매들을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 ‘나의 피붙이’로 진정 인정하는가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나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잔치에서 빠져나와 우리 곁에 서서 우리 팔을 붙들고 간곡하게 ‘너의 저 형제’와 ‘함께 기쁨을 나누러 제발 좀 집에 들어가자’라고 조르고 계신다.
“늘 함께 있음”이 근본적인 기쁨이다. 과연 큰아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잔치에 참석하여 동생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는지 비유에서는 들려주지 않는다. 큰아들이 마음을 돌이켜 동생과 사이좋게 형제애를 나누며 살았는지, 끝내 원수지간으로 평생 의절하며 살았는지는 의문이다. 아멘!
형제가 사이좋게 살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