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아가 1,1) 하는 구절은 성경의 구절이면서도 모든 사랑 노래의 중심 구절이기도 하다. 살만 쉬네르Salman Shneur(1887~1980년)는 입맞춤을 두고 “나의 비둘기여, 우리 유다인들이 어찌 입맞춤하는지 아시나요? 나의 심장과 그대의 심장이 더는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둘 중 누가 숨을 쉬는지 모를 때,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숨결만 남을 때, 말은 사라지고 오직 눈빛만이 오갈 때, 그것이 입맞춤입니다.(Mia colomba, tu sai come ci baciamo noi ebrei? Quando il cuore non si distingue più dal cuore dell’altro, quando petto contro petto nessuno dei due sa chi dei due respira, quando materiale e immateriale spariscono e non resta che un solo soffio, quando non esistono più parole ma solo il parlare degli occhi: quello è il bacio.)”라고 쓴다.
입맞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눈과 눈이 마주쳐 동공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며, 눈으로만 말해도 모든 것을 말하고, 서로의 가슴이 뛰면서 숨이 가빠지는 순간이다. 입맞춤은 사랑을 거행하는 시작이며, 아르튀르 림보Arhur Rimbaud(1854~1891년)의 표현대로라면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황홀한 갈망(désir d’ivresse)”이다. 입맞춤은 포옹으로 이어지고, 서로의 손이 열리고 손가락이 벌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며 애무가 된다. 애무는 서로에게 닿고 만지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떨림에 같이 떨고, 귀를 기울여 서로를 듣는다. 입맞춤과 애무는 정점을 열기 위한 전주前奏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어떨 때는 대담하게, 어떨 때는 안달이 나게, 읽다가 쓰다가 노래하면서 유희를 연주한다. 사랑의 유희 안에서 인간은 “그래, 그래!(Yes!)”라고 대답하며 말하는 법을 배우고 쾌락의 신비를 훈련한다.
“포도주보다 더 달콤한 입맞춤”으로 시작하는 성경의 ‘아가雅歌’는 교회의 2천 년 역사 동안 거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인간의 영혼 간의 사랑 이야기로 읽혔으며 그렇게 읽혀야 한다는 듯이 알려져 왔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학자들은 서로 사랑에 빠져 서로의 사랑을 좇는 두 젊은 연인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남자) 정원에 있는 그대여 친구들이 그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려. 나에게만 들려주오. (여자) 나의 연인이여, 서두르셔요. 노루처럼, 젊은 사슴처럼 되어 발삼 산 위로 서둘러 오셔요.”(아가 8,13-14)라고 마감되는 아가, 성 지롤라모St. Girolamo(1452~1498년)께서 환갑이 넘어서나 읽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염려했던 아가는 분명 남녀 간의 “죽음처럼 강한 사랑”(아가 8,6), 스스로 법이 되는 사랑, 언제 깨어나야 할지, 어떻게 불타올라야 할지, 어떻게 현실이 되어야 할지를 스스로 아는 사랑, 신성한 불꽃의 사랑, 타오르는 가시덤불 같은 사랑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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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년)

위대한 솔로몬은 상쾌하고도 경탄할만한 기백으로 엮은 신적神的 저서에서 구세주와 신심 있는 영혼 간의 사랑을 기묘하게 묘사하였으며, 따라서 이 책의 뛰어난 우아함 때문에 “노래들 중의 노래(아가雅歌, 영어-Song of Songs)”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 당신 권위에 영감과 더불어 갖는 대응성과 충동을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실천되는 이 영신적인 사랑을 보다 더 잘 관찰하도록 우리를 가장 부드럽게 들어 올리기 위하여, 솔로몬은 한 정결한 목동牧童과 또한 수줍음을 못 벗은 순결한 목녀牧女 간의 사랑을 구원久遠한 제시의 하나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애인이 사랑에 놀란 모습으로 먼저 말을 건네게 한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1)
테오티모여, 여기서 주시할 것이 있으니, 목녀牧女를 대신해서 상징된 영혼은 얼마나 오롯한 한 가지 목적만을 가졌는지 보라! 자기의 열망과 자기 애인과의 정결한 일치의 첫 표현에 있어서 그녀는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이 열망하고 있는 것과 그리워하고 있는 그것이 유일한 목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 입술로 날 입 맞추어 주오」라는 이 첫 소망은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뜻하지는 않는다.
입맞춤이란 모든 시대에 걸쳐 언제나 자연 본성적 본능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쓰여 왔으며, 그것은 곧 마음의 일치 결합이며, 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동물들과 공통된 면에 있어 우리의 영혼이 지닌 격정과 충동을 표현하고 알릴 때, 우리의 눈과 눈동자, 이마와 그밖에 안색이나 용모로써 한다. 그래서 성경도 말하고 있다. “사려 깊은 사람은 얼굴을 대하면 알게 된다.”(집회 19,29) 어째서 흔히들 위인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있어 얼굴만 그리는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즉 얼굴은 그 사람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말과 생각을 널리 퍼뜨리지 않는데, 이 언사言思는 우리 영혼의 정신적 부분에서 내놓는 것이며, 이 부분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이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동물과 다르며, 말할 줄 아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인데, 결국 이것은 입술을 통하여 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내쏟고, 마음을 열어젖힌다는 것은 곧 말한다는 것이다. 시편의 저자는, “그분 앞에 너희 마음 쏟아놓아라.”(시편 62,9)라고 말한다. 즉, 마음의 정을 말로 표현하고 발표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무엘의 경건한 어머니는 너무나 부드럽고 은은한 목소리로 기도하여 남이 그의 입술 움직임을 구별키 어려울 정도로써 하여,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1사무 1,15)이라 하였다.
이처럼 한 입술이 다른 이의 입술에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남에게 쏟아 넣는 입맞춤을 하는 것이며, 완전한 일치 속에서 서로가 결합하려는 열망을 입증하려는 것이 입맞춤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지 가장 거룩한 사람들 사이에는 입맞춤이 사랑과 애정의 표였고, 이러한 관습은 고대 신자들 간에도 보편화하였었음을 바오로 사도가 입증하고 있다. 즉,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로마 16,16 1코린 16,20)라고 로마와 코린토에 있던 신자들에게 써 보내셨다.
또 많은 이들이 밝히 말하고 있듯이, 유다 이스카리옷도 구세주를 팔아넘길 때 입맞춤으로써 알렸는데, 이 사실은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만나실 때 습관적으로 입 맞추셨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뿐 아니라 어린 애들까지도 사랑을 다하여 품에 끌어안으심으로써(마르 10,16) 당신 제자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마태 18,1-10 마르 9,35)을 실천토록 하셨는데, 많은 이들이 전하는 바에 따를 때, 그 어린이는 성 마르시알레St. Martial였다고 하며 얀세니오Jansenius 주교도 그렇게 말하였다.(얀세니오 주교, 1510~1576년, 겐트 Ghent 지방의 주교였으며 ‘복음의 조화 주해concordia evangelica’와 ‘복음조화 주해commentarius in concordiam suam’를 썼다. 신애론의 저자는 후자의 70장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입맞춤이란 마음과 마음의 일치 결합을 나타내는 생생한 표이므로, 끊임없는 자기 애인과의 결합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그녀는 부르짖는다. 즉, “그이의 입술로 내게 입 맞춰 주오!”라고. 나의 사랑이 내뿜은 그 무수한 탄식과 한숨과 불타는 창槍들이 내 영혼의 열망하는 바를 관철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는 계속 달리리라. 아, 그런데 내가 스스로 겨누면서 내달리고 있는 저 상급을! 즉, 마음이 마음과 일치하고, 정신과 정신의 일치인, 나의 하느님이요, 나의 사랑하는 분이시며 나의 생명이신 분과의 이 결합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내 영혼을 하느님의 마음 안에 모조리 쏟아부어 드리는 그때가 언제 오려나?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나의 영혼에 부어주실 것이니 아주 행복하게 하나 되어 서로 떨어지는 일 없이 살리로다!
성령께서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실 때, 성령께서는 거의 항상 ‘일치’나 ‘결합’이라는 말을 쓰셨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구세주께서도 모든 신자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다.(요한 17,21) 성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평화의 유대 속에서 정신의 일치를 보전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에페 4,3) 마음과 영혼과 정신의 이러한 일치는 많은 영혼을 하나로 묶는 완전한 사랑, 또는 사랑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나탄은 다윗의 영혼에 집착되었다고 말했었다. 또 성경은 덧붙여 말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사무 18,1)라고.
프랑스의 위대한 사도께서는(성 디오니시오St. Denis를 말함) 자기가 느끼는 감정대로 자기와 절친한 벗 히에로테오스Hierotheus에게 다름과 같이 썼다. 『내 생각에 백 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하느님다운 그 이름들(De Nominibus divinus)’의 단 1장에서만 봐도, 사랑이란 만사를 통일시키고, 일치시키며, 이끌어 합치고, 포옹하게 하며, 집합시키고, 거래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나찌안즈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Nazianzen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Ⅳ권 6장) 말하기를, 당신과 당신의 벗들은 모두 오로지 한 영혼이 되었다는 표현을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그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투를 인정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벗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려 할 때엔, 그와 나의 영혼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한다.”』라고.(윤리대전Magna Moralia, Ⅱ권 2장)
미움은 우리를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그래서 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를 일치시키는 데 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神愛論-제1권 제9장, 변기영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7년, 70-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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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Adoration)는 하느님께 ‘예!’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입맞춤을 받아들여 ‘예!’라고 하는 것이다, 경배adoration라는 단어는 입을 뜻하는 라틴어 오스os, 또는 오리스oris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배는 입에 대한 입, 하느님에게 드리는 ‘예!’이다.…기도는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입맞춤은 훌륭한 상징이다. 인간적 사랑에서, 받아들임과 베풂의 상호성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입맞춤이다. 시편의 한 구절은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시편 81,10)라고 한다. 나는 내 안에서 너의 숨을 받아들이고, 네 안에 내 숨을 불어넣는다. 받아들임과 베풂의 상호성을 통한 숨의 교환은 영혼의 깊은 교환을 뜻한다. 이것은 라틴어에서 ‘아니마anima’라는 단어가 숨과 영혼을 함께 뜻하는 만큼, 더욱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입맞춤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입맞춤은 놀랍고도 장엄한 일이다.(프랑수아 바리용François Varillon 1905~1978년, 흔들리지 않는 신앙Joie de Corire, Joie de vivre,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사, 2000년 1판1쇄, 2018년 12월 2판 6쇄, 443-4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