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다’해(요한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by Maria Cavazzini Fortini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사순시기가 종반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하느님 자비의 절정을 맛보게 된다. 제4복음서만이 전하고 있는 오늘 복음은 상당히 물의를 빚을만한 내용이라고 여겨져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매우 독특한 운명을 겪었다. 이 본문은 오래된 고대의 필사본에서는 대목 자체가 빠지기도 하고, 라틴 교부들에 의해서는 4세기까지 무시되기도 하였으며, 희랍의 교부들은 근 천 년 동안 해설 자체를 하지 않기도 하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 본문은 비로소 요한복음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복음 대목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역점을 두려고 했던 루카복음의 맥락과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곳으로 나가 묵곤 하셨다. 온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계신 그분께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루카 21,37-38)라는 구절과 어우러지게 배치할 때 대단히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의 정경 목록과 배치에 순명하면서, 율법과 죄의 관계가 논의되는 복음이 위치한 현재의 맥락에서 이를 읽어나갈 것이다.

1.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요한 7,53-8,2)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붙잡혀 끔찍하게 놀라고 아마도 이미 많이 두들겨 맞았을)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요한 8,3-6) 복음서는 종종 예수님이 율법을 잘못 해석한다는 구실로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소위 신성모독 혐의를 씌워 고발하려고 반대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온다고 서술한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 예수님께 다가온 못된 사람들의 의도는 율법의 해석 정도가 아니라 율법의 준수와 관련한 현장 즉결 처분의 실행 여부를 가지고 예수님께 들이댄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전문가들은 ‘현행범’을 잡아서 다른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내세워놓고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간다. 그들이 근거로 삼는 율법은 정확히 말해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간통하면, 곧 어떤 남자가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10) “어떤 남자가 남편이 있는 여자와 동침하다가 들켰을 경우, 동침한 그 남자와 여자 두 사람 다 죽여야 한다.…너희는 두 사람을 다 그 성읍의 성문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2.24) 하는 구절들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판단 및 선언과 고발은 상당히 그럴듯하여 보이지만 실제로는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간음한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는 반쪽짜리 고발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배신한 젊은 시절의 네 아내와 너 사이의 증인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동반자이고 너와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이다. 한 분이신 그분께서 그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느냐? 몸과 영이 그분의 것이다.…너희는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 배신하지 말거라.”(말라 2,14-16)라는 말씀에 따를 때 ‘간음’이란 하느님의 창조가 지닌 원뜻을 위배하는 것이며 인간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심각한 상처이기 때문에 가혹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마태 23,5)을 중요하게 여기며 외형적으로 전혀 흠이 없고 떳떳하며 경건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권위를 추구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전문가들이 나서서 간음이라는 꼼짝 못 할 현행범으로 체포한 여인을 두고 예수님께 스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자가당착에 빠트리려는 계략이었다. 예수님께서 사형의 정당성에 동조하지 않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율법 내용에 따라 그 여자를 단죄해도 좋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어울리며 음식까지 나누는(참조. 마르 2,15-16 루카 15,1-2) 태도가 이율배반이 아니냐고 따질 참이었다.

이 장면을 잠시 동영상처럼 상상해 보자면, 이미 분명한 죄가 있다고 단죄를 받은 한 여인을 사람들이 데려온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약간 거리를 둔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오로지 예수님을 올가미에 가두려고 기세등등한 종교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 앞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한가운데에 초라하게 떨고 있는 한 여인이 서 있다. 그녀를 고발한 사람들이 분위기를 압도한 상황에서 그 여인의 사연이나 항변, 혹은 느낌을 고려하고 들어볼 만한 여지는 전혀 없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6ㄴ)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 속에서 그 여인에게 절을 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신 셈이다. 예수님께서 수치심에 휩싸인 여인을 바라보시지 않고, 오히려 “몸을 굽히시어땅을 바라보시며 여인의 자존심을 다소라도 회복시켜주고자 하셨거나 사람들이 법을 따져 묻는 말에 무관심으로 대응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모습을 따라 아름답게 지어진 피조물이 참혹하게 망가져 처참하게 끌려온 모습을 차마 바라보실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이 몸짓은 어떤 의미일까? 또 무엇을 쓰셨을까? 성 지롤라모(1452~1498년)께서 생각하셨듯이 예수님께서 그녀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죄들을 땅바닥에 쓰신 것일까, 아니면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듯이 이러한 상황과 관련한 성경 구절을 쓰셨던 것일까? (어떤 이들은 여인을 향해 ‘너, 나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말을 쓰셨다고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하느님의 뜻에 맞는 답을 하시기 위해 시간을 벌고 계셨던 것일까? 예수님께서 정작 무엇을 쓰셨는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 예수님의 동작을 해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강한 의미를 담은 상징적 제스처인 것만은 분명하다. 차가운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신봉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 아담과 그 후손들이 원래 지어지게 된 기원인 흙(참조. 창세 2,7)이요 땅에 무엇인가를 새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대비하여 묵상할 필요가 있다. 율법은 돌판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으로 얼룩진 우리의 삶과 몸에 새겨져야 한다. “손가락으로” 쓰기 시작하셨다 하는데, 모세의 율법 역시 “하느님의 손가락”에 의해 돌판에 새겨졌다가(참조. 탈출 31,18 신명 9,10),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파괴되었고, 다시 하느님과 “계약”(탈출 34,28)을 맺어 다시 새겨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땅에 쓰고 싶었던 말씀은 예수를 시험하려 드는 사람들,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 여인, 그들 모두를 향하여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라는 한 마디를 쓰고 싶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2.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줄곧 (고집스럽게) 물어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시고 질문이자 요청이기도 한 말씀을)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8) 세상에 “죄 없는 자”가 누구이고, 또 누가 자기는 죄가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동정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그를 감싸주지도 말아야…너희는 오히려 그를 반드시 죽여야…그를 죽일 때에는 너희가 먼저 손을 대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라야…증인들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 가운데에서 그 악을 치워버려야 한다.”(신명 13,9-10;17,7) 하는 율법을 인용이라도 하시듯이 악의 증인들이라면 죄가 없는 첫째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셈이다. 물론 그 여인은 분명히 간음이라는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를 고발하는 증인들은 과연 죄가 없을까, 아니면 숱한 죄를 감추고 있는 이들일까? 만약 그 증인들 역시 죄인들이라면 그들이 어떤 권위로 죄인을 고발하고 그 죄인을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그녀에게 돌을 던지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율법을 거스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비의 실천에도 위배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을 고발하는 이들의 마음에 가닿는다. 그래서 (여인을 고발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9ㄱ) 사는 것이 죄라는 말처럼 “나이 많은 자들”은 자신의 삶이 죄 중에 있음을 안다. 이러한 ‘양심’의 소리는 다른 이를 향한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예수님의 질문 하나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살고 있다면서 그 율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이들을 가로막는다. 오로지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만이 여인을 단죄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삶이 그 죄를 뛰어넘도록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그녀를 대하신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이를 이렇게) 알려주셨다.”(요한 1,18)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33,11) 이것이 바로 죄인을 두고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지니신 단 하나의 마음이다.

3.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일어서시어 당신을 드러내시어 면대면으로 바라보시며)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이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8,9ㄴ-10) 끔찍했던 악몽이 사라지기라도 하듯이 모두 사라지고 험악한 분위기도 사라졌으며 비로소 차분히 말다운 말을 서로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 우리 말에서 지금까지 ‘여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말마디를 예수님께서 “여인아” 하셨다고 번역하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여인아(여인이시여)” 하신 예수님의 표현은 예수님의 어머니께(참조. 요한 2,4),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참조. 요한 4,21),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참조. 요한 20,15) 사용된 것과 같은 호칭이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이를 “여인아”라고 부르시면서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라 존엄성과 품위를 되찾아야 할 여인으로 대하신다. 이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여인은 자기 앞에 마주한 예수님을 단순하게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생님”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믿어 고백해야 하는 분이다.

여인과 예수님의 진솔한 대면은 자비와 연민, 평화와 해방, 기쁨과 안심의 순간이었다. 우리 자신들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질긴 속성으로 얽매여 있고 집착하고 있는지, 동시에 우리 자신들이 타인의 잘못을 대함에 있어서는 얼마나 옹졸한지 묵상해야만 한다.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만이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않을힘을 주시고 죄에 저항할 힘을 주신다. 어쩌면 이 세상과 교회가 용서와 자비에 인색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해 보지 않은 까닭이라 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유리로 만든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 서로에게 돌을 던지면 서로가 깨지는 공멸이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 본성에는 타인의 잘못에 돌을 던지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다.

복음에서 여인의 반응이나 감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이 장면을 『예수님과 여인, 예수님의 거룩함과 여인의 죄가 만나면서 자비와 가련함relicti sunt duo, misera et misericordia이 만난다』, 곧 하느님의자비’와 사람의가 면대면으로 직접 만나는 순간이라고 묘사한다. 고백성사의 사죄경 같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단죄가 배제된 조건 없는 용서, 한없는 자비, 그리고 삶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만 담긴다. 복음에는 그녀가 인생을 바꾸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든지,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든지 하는 기록이 없지만, “가거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미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자유 의지로 다시는 죄짓지 않는 새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바로 뒷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8,15)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죄하고 벌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 아니라 자비를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시기 위해 자비를 충실하게 몸으로 살아내신다. 이렇게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으며…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고…믿음으로 얻어지는…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신다.”(로마 3,21-26)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과 자비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부름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거스르지 않는 자비를 선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도 똑같이 살라는 부르심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되어도 하느님의 자비만이 남는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숱한 죄인들을 만나실 때마다 그들을 죄에서 해방하셨을 뿐 그 누구도 단죄하거나 벌하시지는 않았으며 벌罰로 의義를 이루고자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회개로 사람들을 초대하셨고, 심판에 대한 경고를 선포하셨지만, 아무도 벌하신 적이 없었으니 이는 죄인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이 회심하여 다시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만을 실행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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