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두고 그가 그리스도 앞에서 진정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선구자로 남으려 했다고 말하지만, 그의 또 다른 위대함 중 하나는 어둠과 시련의 순간에 홀로 결정하거나 답을 내리지 않으면서 예수님께 그 답을 청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의 권력과 권세 앞에서 움츠러들거나 떨지 않고 확신에 차서 단호하게 거침이 없었다. 그는 주님 앞에서가 아니라면 세상 그 누구에게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꼿꼿한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이나 사제들이 득실거리는 왕궁으로부터는 항상 멀리 있으려고 했으며 화려하고도 부드러운 고귀한 옷차림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가진 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세뇌하고 오염시켜 노예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하신 증언 그대로 요한은 그의 도덕성과 품성으로 보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1. 참고 기다리며·우주적인 기쁨
오늘 제1독서로 이사야서 35장의 말씀을 듣는다. 제1독서는 황량한 “광야와 메마른 땅”이 비옥하고 온갖 것이 무성한 땅이 될 것이기에 기뻐하고 즐거워 노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 안에 누리는 기쁨은 인간적인 세상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차원의 기쁨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광이 도래하여 더는 먼지와 돌멩이가 나뒹구는 광야가 없을 것이고 레바논의 숲과 같은 영광, 카르멜이나 사론처럼 꽃이 만발한 대초원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오심은 “맥 풀린 손”, “꺾인 무릎”,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힘을 얻고 굳세어지며 두려움이 없으리라는 초대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다. 슬픔과 탄식의 끝, 충만한 은총, 안녕과 평화의 선물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우리가 “시온”, 곧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은 확실하고도 기쁨과 즐거움에 충만한 길이다.
사도 야고보(제2독서)께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다가 지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마크로쑤메오, μακροθυμίω, makrothyméo(영어로 be patient)’라는 동사가 세 번이나 반복되는데, 이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기대에 찬 견딤이다. 이러한 기다림은 주님의 ‘다시 오심’(파루시아, parousía)을 기다리는 이들이 세속의 일상사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단호한 태도요 결정적인 자세이다. “문 앞”에까지 이미 와 계신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판가름해 주시리라는 든든한 믿음이요 긍지이다. 이러한 기다림 속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기에 서로 원망하거나 서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한다. 이러한 모범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리라는 희망 속에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끈기”(makrothumía)”로 “고난”(κακοπαθεία, kakopatheía, 영어로 hardship, misery, sorrow, suffering, trouble 등으로 번역)”을 견뎌 낸 예언자들이다. ※더 읽기: 인내–https://benjikim.com/?p=3738 / 인내(忍, 마크로쑤미아)–https://benjikim.com/?p=13981
2.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직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유혹이 닥친다. 왜 우리는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하느님께서 다시 보내실 그분은 누구이실까? 우리의 기다림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굳센 믿음을 지녔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이러한 유혹은 엄습하며 행여 자신이 실수한 것이나 아닌지, 다시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오해하거나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앞서고, 삭막하고도 어두운 시간을 지나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확실하게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기로 나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환상은 아니었을까에 대해 문득문득 의심이 들게 마련이다. 혼신을 다해 노력했던 결과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볼 때 모든 것이 희망과 추구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실망하고 암담할 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세례자 요한에게도 이러한 시련의 순간이 있었다. 부르심을 느낀 세례자 요한은 광야로 나갔고, 메시아 구세주를 열망하는 이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꾸렸으며, 하느님의 계시로 자신의 제자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예언이 담긴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그 말씀에 동화되어 메시아의 오심과 이미 와 계심을 알리고자 세례자 요한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그가 생각한 메시아는 강한 분이며 성령의 힘으로 충만하신 분으로서, 구세주요 심판자로서 도끼를 내려치듯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쳐내시고, 손에 키를 드시어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실 것이라고 믿어서 이를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알렸다. 이렇게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오심에 맞추어 모든 백성이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시급히 회개해야 한다고 설파했다.(참조. 지난주 복음인 마태 3,1-12)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온 많은 이들과 함께 요르단 강으로 찾아온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고, 헤로데 임금에게 체포된다. 급기야 예수님께서는 유다 광야를 떠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당신의 사목을 시작하시러 갈릴래아 지역으로 떠나신다.(참조. 마태 4,17)
사해 근처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알려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활약과 스타일에 관한 소식을 접한다. 이는 세례자 요한에게 감옥에 갇힌 일과 함께 시련의 순간이었다. 사방이 막힌 철저한 고립과 고독의 감옥에서 헤로데의 처분만을 기다리던 세례자 요한으로서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읽었던 대로 예언자들이 알려준 심판과 종말에 자신에게 마땅히 정당하고도 올바른 하느님의 판결이 있을 줄 알고 믿어서 이를 기다렸는데, 이것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대단한 혼란에 빠졌다.
자기가 메시아로서 가리켰던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였던가를 묻게 된 것이다. 듣는 소식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판가름하시는 분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감옥에 갇힌 자를 풀어 주시는 메시아를 선포하였는데, 오히려 자신은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갈 것만 같은 암담함을 본 것이다. 주님의 날에 내려칠 통쾌한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 그와 비슷한 소식이 도무지 들려올 것 같지도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대중에게 발표했던 것과 예수님의 행적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았고, 그에 따라 자기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를 몇 번이고 되씹어보면서 뭔가 서로 오해했던 부분이 있지나 않았었는가를 되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일부는 자신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했던 단식을 하지 않고 있었고(참조. 마태 9,14-17), 공공연한 죄인으로 여겨지는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는 소식도 들렸다.(참조. 마태 9,9-13) 한 마디로 세례자 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의 행적은 죄인들과 떨어져 사는 광야의 삶이나 금욕 생활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이러한 이유로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오셔야만 할 분, ὁ ἐρχόμενος, ho erchómenos)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0,2-3) 암담한 시련 속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거나 답을 내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 답을 주시도록 내맡긴다. 바로 이 점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모습 중 하나이다.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자신의 비전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행적으로 본 현실 사이에서 의심하고 번민하면서도 이를 예수님께서 설명하시고 결정하시도록 내맡긴다.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고 직접적인 답을 주시지 않는다. 일찍이 이사야가 익명의 예언자가 지닌 사명으로 전해준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6 참조. 이사 61,1-3)라고 하시면서 이런 예언이 바로 당신 행적의 증언이라고 대답하신다. 구체적으로는 이사야 예언서의 몇몇 구절(이사 26,19;29,18-19;35,5-6)을 선별하시어 당신이 어떤 메시아로서 오셨는지를 밝히신다. 당신은 심판관도 아니고 힘 있는 개선의 임금도 아니며, 낫게 하시고 좋게 하시며 위로하시고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시는 분임을 밝히시면서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돌아가서) 전하여라(ἀπαγγείλατε, apanghéilate, 영어로 report).”(마태 11,4ㄴ)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행동과 태도가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을 보는 입장에서는 적이 실망스러울 수가 있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인간적인 나의 판단에 따라 좌절하고, ‘도대체 이것이 과연 성령께서 이루어가시는 역사인가?’ 하고 실망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자신의 미약함과 가난함 안에서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자이다. 요나 예언자가 하느님께 실망하고 그분을 떠나 도망가려고 발버둥을 쳤다고 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권위자로 인정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군중에게 말씀하실 필요를 느끼신다.
3.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마태 11,7-9) 하신다. 세례자 요한은 과연 누구일까? “허리를 동여매고”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떨지 않는” 사람, “맞서 싸우는” 사람(참조. 예레 1,17-19)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꼿꼿한 자세로 주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사람, 부드럽고 값비싼 “고운 옷”을 걸친 사제들이나 왕, “왕궁”과는 거리가 먼 사람, 외모의 치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하수인으로 만들어 조종하려는 이들을 내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요, 하느님의 대변인이며, 주님의 선구자요 심부름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레자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9),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도덕성과 인간적인 품성으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하고 예수님께서 증언해 주신 바로 그 사람이다. 이렇게 요한에 대해서 군중에게 알려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하신다. 예수님 몸소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버림을 받으시어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가 되시어 “큰” 영광을 입으신 분이시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이 전해준 바를 듣고 예수님께 “의심을 품지 않는 이”(마태 11,6)라면 세례자 요한은 실로 “행복하다.”
오늘 복음에서 듣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를 당하고 있다. 폭행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하는 신비스러운 말씀을 이어가신다. 세례자 요한이 담담하게 받아들인 고통과 폭행이 예수님의 하늘 나라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열쇠임을 암시하시는 듯하다. 오시는 분, 우리의 계획과는 멀게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알아듣는 이는 참으로 행복하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