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이 책 전체에 대한 준비
제1장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모든 기능을 의지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셨다
차별 안에 확립된 통일은 질서를 만든다. 질서는 조화와 균형을 낳고 또 온전하고 완성적인 사물 안에 있는 조화調和는 아름다움을 낸다. 군대란 질서정연하게 예하 모든 부대를 거느리고 있을 때 비로소 볼만 하며, 또 이 질서에 있어서 상호구별은, 한 군대를 이루기 위하여 예하 각 부대가 반드시 취해야 하는 비례대로 된다. 음악이 아름다워지려면 여러 목소리가 다 깨끗하고 맑고 서로 구별되어야 할 뿐더러, 화음과 조화가 제대로 되도록, 한 곳으로 일치되는 면이 있어야 하며, 그 어울림이란 불협화음의 조화나 혹은 화음의 부조리로 잘 맞지 않게 끝나는 법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천사다운 학자 성 토마스St. Thomas는 위대한 성인인 디오니시오St. Denis의 뒤를 이어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을 하였다.(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이하, “신학대전”, Ia IIae, q. XXV II, a, I.) 미美와 선善은 어떤 점에서 보면 서로 같고, 일치되지만,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고, 따라서 하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은 욕망과 의지를 즐겁게 하는 것이고, 미는 지능과 인식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면, 선이란 우리가 그것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즐거워하는 것이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오로지 두 감각의 대상물로 제공받고 있는데, 이 두 감각은 가장 지능적이고 또 이성理性을 가장 많이 섬기고 있는 것으로서, 바로 시각과 청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냄새가 아름답다거나 맛이 아름답다는 말을 쓰지 않고, 목소리가 아름답다거나 색깔이 아름답다고 표현한다.(프랑스 말에서뿐 아니라 우리말에서도, 냄새나 맛을 표현함에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목소리나 그림의 표현에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혹 어떤 이는 이 단어를 “소리”의 표현에는 못 쓰는 것으로 따지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불리게 되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체성이 지닌 일치와 구별, 또 각 부분이 지닌 질서와 조화, 이 외에도 인식되어 알아듣기 위해서는 많은 광채와 광명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목소리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맑고 깨끗해야 하며, 그래야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고, 색깔은 빛나고 찬란해야 한다. 흐리거나 그늘과 어둠 등은 만사를 보기 싫게 하거나 형체를 분간 못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질서와 구별도 일치와 조화도 다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오니시오 성인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아름다움 자체이시므로 아름다운 조화와 아름다운 광택과 좋은 은총의 창조주시며, 또한 그 은총은 만물 안에 잠겨 있게 하시고 아름다움을 분배하여 입혀 주시며, 빛으로써 만물을 아름답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자리 잡고 들어있도록 조화와 광명과 좋은 은총을 원하시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확실히 아름다움이란 빛과 광채가 그 아름다움을 살려주고 보람있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효력이 없으며 무익하고 죽은 것이므로, 빛과 광채가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색깔을 뚜렷이 이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차고 생기있는 것이 지닌 아름다움도 좋은 은총이 없이는 완전치 못한 것이니, 아름다움을 내주는 완전한 각 부분의 상호 조화를 제하고는, 그 좋은 은총이란 것이 운동과 몸짓과 활동의 조화를 더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곧 생활한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의 생명이며 영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신 최상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본질의 일치뿐 아니라 단일성까지를 고백하게 되며 더욱이 이 단일성은 각 위位의 구별 속에 들어있는데, 무한한 영광과 더불어 모든 완전한 행동과 동작과 최고로 포함하고 있는바, 그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조화가 함께 깃들여 있으며, 또 말하자면 그것은 하느님의 순수한 행동의 지극히 유일하고 지극히 단순한 완전성에 훌륭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니, 하느님의 행동은 바로 하느님 자체이시며, 불변적이고 비다양적非多樣的인데, 이에 대하여는 후에 다시 말할까 한다.(본서 2권 2장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좋고 아름답게 하시기를 늘 원하시어 그 모든 다양한 차별을 완전한 단일성에 귀결시키셨다. 말하자면, 만유에 질서정연한 등급을 매기시고 만유가 서로 화합하여 최고 으뜸이신 당신께로 모든 것이 돌아오게 하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육체에 속한 모든 지체도 한 머리 아래 두셨으니, 여러 사람이 모여 한 가정을 이루고 여러 가정이 한 마을을 여러 마을이 한 관할 구역으로 여러 관할 구역이 한 왕국을 이루며 전 왕국은 한 사람의 왕에게 속하게 마련하셨다. 이처럼 사랑하는 테오티모여, 사람에게 있는 모든 활동과 운동과 감정과 경향과 습성과 격정과 기능과 능력이 무수하고 다대하고 각양각색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의지 안에 자연적 왕국을 좌정케 하시고, 이 작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셨으며, 이는 마치 파라오 왕이 요셉에게 말하듯, 하느님께서도 의지에게 이르신다. “너는 내 집안에 전권을 가질 것이며, 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명령대로 온 백성은 순종하리라. 너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것도 옮기지 못하리라.”(창세 41,40.44) 그러나 의지의 이 같은 주인 노릇은 아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게 마련이다.
제2장
의지는 영혼의 여러 능력을 갖가지로 어떻게 다스리는가?
집안의 가장家長은 명령과 배치로써 아내와 자녀와 종들을 다스린다. 그들이 비록 그대로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하여간 가장의 명에 순종하기 마련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종이나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자라면, 강제로 다스리기도 하며 저들은 신분상 반항할 수 없다. 그러나 소나 말이나 당나귀나 이러한 것은 부업으로써 주인이 다루게 되며, 매어 놓거나 굴레를 씌우거나 재갈을 물리기도 하며 가두어 두거나 밖으로 내몰기도 하면서 다스린다.
사실 우리의 의지도 우리의 외부적 충동에 의한 기능을 마치 종이나 노예를 다루듯 다스린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외적外的인 것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반드시 순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벌리기도 하고 다물기도 하며, 혀나 손이나 발이나 눈이나 다른 모든 지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러한 지체에는 운동력이 주어져 있어서, 우리가 원하거나 뜻하는 대로 저항 없이 움직이게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양 섭취, 성장 및 생식을 위한 기능만은 그렇지 못하니 우리는 다른 기능을 다스리듯 그리 쉽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노력과 기교를 쓰게끔 되어 있다. 노예라면 부르면 오고, 서라면 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순종을 매나 독수리한테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매를 길들여 날렸다가 되돌아오게 하려면 미끼를 보여서 유인해야 한다. 또 이런 동물을 꼼짝 못 하게 조용히 있게 하려면 새장이나 그물 같은 것으로 덮어 두어야 한다. 종이나 노예는 우편으로나 좌편으로 돌라는 그대로 한다. 그렇지만 말이나 나귀를 그렇게 하려면 굴레와 고삐를 사용해야 한다. 테오티모여, 우리는 우리의 눈더러 보지 말라고 명령한다든가, 귀보고 듣지 말라고 하든가, 손 보고 만지지 말라든가, 위장 보고 소화시키지 말라든가, 몸 더러 자라지 말라고 하는 등의 명령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능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복종할 능력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음식하는 것이 우리 뜻대로 영양 섭취되거나 우리를 성장케 할 수는 없다. 자기의 기능을 지배하고 싶은 자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요람에 든 아기를 책임진 의사는 아기에게는 아무것도 명하지 않지만, 간호부나 유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하라고 명하며 때로는 유모에게 이러저러한 음식이나 고기, 약 등을 먹으라고 하여 그러한 영양이 젖을 통해 아기의 몸에 들어가도록 일러준다. 이렇게 하여, 이런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미약한 아기에게 의사는 자기의 뜻대로 일해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입이나 위장에게 금식하고 절제하며 극기하라고 명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러한 절제 명령은 우리의 손이 고기나 음료를 입에 가져갈 때, 필요한 만큼만 취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理性이 요구하는 만큼만, 우리의 기능에 대상물이나 주체물을 주거나 치워야 하며, 또 우리의 기능을 튼튼히 하는 음식을 취하는데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눈이 보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눈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할 것이고, 혹은 자연적인 가리개나 다른 적당한 것으로 눈을 가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위적人爲的 수단으로써 우리는 의지가 원하는 대로 기능을 이끌어 갈 수 있다. 테오띠모여, 이는 바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가 된 자도 있다는(마태 19,12) 말의 진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불구자로 고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의지가 거룩한 극기에 뜻을 두어 인위적인 노력으로써 된 것이다. 말을 보고 살찌지도 말고 자라지도 말고 발길질하지도 말라고 명령한다면 미련하고 우습기 짝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먹이를 주지 않으면 간단하다. 즉 말에게 명령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단순히 그렇게 만들면 된다.
그렇다. 의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지능과 기억력을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능이 이해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기억력이 기억할 힘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물에 대하여 우리의 의지는 제 기능을 거기에 적용하든가 아니면 분리하든가, 뜻대로 결정한다. 참으로 의지는 손이나 발이나 혀 같은 것을 다루듯, 그처럼 쉽게 아주 절대적으로 지성과 의지를 다루거나 관리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니, 앞의 것들은 감각적 기능이기 때문이나, 특히 환상이나, 상상력 같은 것은 그리 민첩하고 어김없는 순종을 의지에게 요구하지 않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성과 기억력의 여러 작용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지는 언제나 기능을 특히 지성과 기억력을 움직이고, 고용하며, 제 좋아하는 대로 적용하며, 비록 굳건히 또 변함없이는 아니지만,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상상력이 매우 빈번히 들어와서 잘 떠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이끌어 분심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부르짖으신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善)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일(惡)을 합니다.”(로마 7,15)라고. 이와같이 우리도 매우 자주 우리가 사랑하는 선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미워하는 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됨을 불만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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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글본을 두고 일러두는 점들
*이 한글본의 목적은 오직 <신애론>을 원문의 번역과 뜻대로 읽으려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변기영 신부님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음
*변기영 신부님은 각주를 매 권 끝에 별도로 수록하였으나 읽기가 불편하므로 매 각주를 끌어와 문장 안에 괄호로 첨가하였음. 각주는 변기영 신부님의 번역본을 우선 기초로 하였으나 오류가 많아 영문본이나 이탈리아어본 그리고 기타 자료 등을 참조하여 일일이 확인하고 수정하여 추가하였음. 그리고 ‘성경 검색’을 통하여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각주를 다소 추가한 부분이 있음
*외래어를 한국어로 표기할 때 변기영 신부님은 불어에서 음역하였지만, 여기서는 <TREATISE ON THE LOVE OF GOD>, TAN BOOKS AND PUBLISHERS, INC. Rockford, Illinois 61105, 1997년 판에 따라 사람 이름이나 지명과도 같은 고유 명사들을 영어식으로 첨부하였음, 영어로 분명치 않은 경우인데 변기영 신부님이 불어나 라틴어로 원문을 굳이 병기해 놓으신 부분은 그대로 남겨 두었고, 더욱 쉬운 이해를 위해 때때로 영어를 괄호 안에 첨가하기도 하였음
*모든 성경 구절은 되도록 현재의 성경을 따옴표 안에 그대로 인용하였으나 필요에 따라 다른 번역본을 인용한 경우 별도로 표기하였음
*변기영 신부님의 번역본이나 영어 번역본의 문단이 너무 긴 경우 문맥을 보아가며 이를 적당하게 나눈 적이 있음
*한자는 음이 같을 때 괄호 없이 병기하였으며, 다를 때, 그리고 뜻으로 보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변기영 신부님의 표기에 따라 괄호 안에 두었음
*한글은 현대 맞춤법에 따랐으나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고 생각하는 경우 맞춤법에 어긋나더라도 변기영 신부님의 한글을 되도록 그대로 두려고 하였음
(추후 이 ‘일러두기’는 게재하지 않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