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Loves Me

※ 다음 글은 2025년 4월 한국 살레시오회의 연례 피정에서 나누었던 내용 중 한 꼭지이다. 이 내용은 피정 인도자인 헨리 보네티(Henry Bonetti, 권선호, 1943년~) 신부님께서 <Peter Kreeft,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The God Who Loves You, Ignatius Press, SF, 2004>이라는 책의 제1장을 요약 정리하면서, 여기에 <James D. Whitehead and Evelyn Eaton Whitehead, Holy Eros, Orbis, Maryknoll, NY, 2009; 홀리 에로스, 성염 옮김, 성바오로, 2014>라는 책을 다소 참고하여 작성한 내용이다. 앞선 책의 저자는 총 10개의 chapter로 구성된 책의 제1장 타이틀을 ‘내 생애에 내가 만났던 가장 심오한 생각 열두 가지The Twelve Most Profound Ideas I Have Ever Had’라고 쓰면서 12개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15-34쪽), 권선호 신부님께서는 6. We will be perfectly and uniquely fulfilled by God’s love in Heaven과 8. Because of the love of God, we can love our neighbor freely라는 두 개의 내용을 앞뒤로 편입하면서 10개로 요약한다.(*권 신부님의 원고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보충하거나 수정·첨삭한 부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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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에 내가 만났던 가장 심오한 생각 열 가지(The Ten Most Profound Ideas I Have Ever Had)

내가 발견한 가장 심오한 10가지 생각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10가지라고 하지만 사실 한 가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 중 어느 것도 독창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가히 혁명적이다. 그 중 어느 것도 나에게서 나온 것이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이들 모두를 단순한 신념 정도가 아니라 깨달음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통찰들은 축성 생활을 합당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해준다. 다른 한편에서 이 내용을 두고 서원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혼인”에 대한 생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축성 생활을 하는 이들이 배우자이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위대한 삶으로 부르신 그분을 향한 사랑에 더욱 깊이 빠져들기를 기도한다.

축성 생활을 더 깊게 하려면 축성 생활이 바로 혼인 생활이라는 것을 깨우쳐야만 한다. 혼인 생활이기 때문에 이는 사랑의 삶이다.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을 통해 배우자인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하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지향을 가진 이들에게 ‘어떤 기본 원칙을 발견하도록 하심’으로써 당신과의 사랑이 더욱 깊어가게 하신다.

1.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카 10,42):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There is only “one thing necessary”: Follow His will)

아주 일찍 깨달았던 사실이긴 하였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했고,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듯 어느 순간이 있었다. 모든 것 중에서 꼭 필요한 한 가지라는 생각 아래 앞뒤가 맞아들어갔고 정돈되면서 질서정연해졌다.

그 ‘한 가지’는 항상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그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들다니!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하며, “신성한 지휘자에게로” 향하여 그분의 뜻, 즉 “말씀”이라는 지혜롭고 사랑이 가득한 지휘봉을 주시하여 그에 따르면, 우리 삶이라는 음악이 아름다운 교향곡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실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2. 행복으로 가는 길은 자기를 잊는 사랑(The way to happiness is self-forgetful love)

“오직 한 가지”가 정리되자 두 번째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이를 실제로 깨우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자기 자신을 잊는 사랑이고, 불행으로 가는 길은 자기 존중, 자기 걱정, 개인적인 행복을 찾는 것이다. 행복은 내가 나를 위해 추구하지 않을 때만 나에게 찾아온다. 행복은 타인의 행복을 추구할 때만 나에게 찾아온다.

사랑의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다. 혹자는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은 숨어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나는 숨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두운 땅 어느 구석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너희는 나를 혼돈 속에서 찾아라.’ 하고 말하지 않았다. 나 주님은 의로운 것을 말하고 바른 것을 알린다.”(이사 45,19) 하셨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숨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직 몰라도 되는 나만을 위한 그분의 은밀한 계획이 숨겨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숨어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나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신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요한 1,39) 하지 않으셨던가!

부처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인생이 고통 그 자체라는 첫 번째에 이어 부처님의 두 번째 진리는 모든 불행과 고통(두카, dukkha, 苦, 괴로움, 불만족)의 근원이 이기심(탄하, tanha, 혼자, 고립, 외로움)이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반대로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St. Mother Teresa(1910~1997년) 수녀님처럼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더라도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필리 4,4) 사람이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In everything God works for good with those who love him.”)

세 번째 깨달음은 로마서 8장 28절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이 말씀이 맞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 삶에는 끔찍한 일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100% 사랑이시라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분이 나를 위해 원하시는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비롯되고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 분명하다.

간단하지만 이것이 원칙이다. G.K. 체스터턴Chesterton(1874~1936년)은 “원칙이 없는 사람의 삶은 항상 복잡하다.(life is always complicated for someone without principles)”라고 말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원칙은 모든 것이 결국 선을 위해 풀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단순한 원칙 아래 생활이 단순해지면 모든 것이 잘 된다.

모든 것이 선으로 풀린다고 해서 당장의 선익이 눈앞에 온다는 것만은 아니다. 장기적인 선을 위해 단기적인 해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통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나의 궁극적인 선을 위해 작동할 수는 있다. 하느님은 온 세상을 손에 쥐고 계신다. 그분은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악이 우리의 더 큰 선을 위해 작동하기 때문에 악을 허용하신다.

우주에서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이것은 낭만적인 시詩가 아니다. 논리적 사실이다. 하느님이 위대(전능)하시고 하느님이 선(사랑)하시다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며, 우리는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4.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다.(Everything is a gift from God.)

모든 것은 선물이다. 자연, 사람, 사물, 사건 등 우리가 삶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은 오직 베푸시는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사물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물을 사물로 본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는 이에게는 그것들이 기호표징이 된다. 표지판은 단순한 사물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도로변의 금속 기둥에 있는 도로 표지판은 사물이면서 표지판이다. 사물로서 그것은 단순히 페인트를 칠해 디자인한 평평한 금속 표면을 가진 철판이지만, 표지판으로서 그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선물을 줄 때, 그것은 물건일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의 신호이다. 우리가 선물할 때 우리는 선물을 받는 사람이 뭔가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달하는 메시지도 얻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신호이다. 선물로서 그것들은 그것들을 주신 신성한 분을 가리킨다. 표징으로서 그것들은 한 통의 편지가 편지 쓴 사람을 드러내듯이 자신을 넘어 그것이 의미하고 드러내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로 온 세상은 하느님의 연애편지이다.

교회의 학자이자 하느님을 사랑했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 of Clairvaux(1090~1153년)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상처가 마치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입술처럼 느껴졌다(When I looked at a crucifix, the wounds of Christ seemed like lips speaking to me and saying, ‘I love you.’)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그렇다. 모든 것이 사랑을 말하는 하느님의 입술이다. 그것이 모든 것에 담긴 하느님의 메시지이다.

사물을 단순히 사물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물과 징표로 보는 이 방식은 우리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다르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본다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출을 기계적 작동이 아닌 하느님의 미소로 바라보며, 파도를 차가운 바닷물이 해안에 쏟아지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장난기 어린 행동으로 보는가 하면, 죽음조차도 생물학적 필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잠자리에 들게 하셔서 아침에 새 생명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실제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나무의 잎사귀와 꽃들이 우리가 보고,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도록 의도한 신성한 예술가가 만든 예술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연애편지의 모든 단어가 보고,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이고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세상을 매우 나쁜 습관으로 바라보곤 한다. 세상을 오직 원자와 분자의 작동, 우연, 감각과 과학이 밝혀낸 것만 존재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이 주관적인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참된 방식으로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5. 하느님께서 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God made it all for me alone.)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 사랑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에게 가까이 있으며 개인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온 우주는 나와 그분의 신비체인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육화, 중력의 법칙은 우주나 막연한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너만을 위해, 그리고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

나 혼자만 피조물이었다면 하느님도 나만을 위해서 똑같은 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나만을 위해 이 모든 수고와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하셨을 것이다. 실제로 그분은 나만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 십자가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주님은 익명의 인류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한 숫자 중 하나가 아니다. 그분의 사랑 편지는 내 이름으로 내게 온다. 그분은 양들을 한 마리씩 모아서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으로 부르신다.(참조. 요한 10,1-3) 하느님께서 내 이름을 아신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친밀하고 은밀한 개인적 지식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데 혼인이 사용된다. 하느님은 막연한 인류를 사랑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내 눈앞에 있는 진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내 앞에 있음으로써 나에게 현실적이고 불편한 요구를 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라 하셨다.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그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6. 하느님 사랑의 선물은 우리가 거저 받을 수 있는 것이다.(The gift of God’s love is ours for the taking.)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독일 루터교 주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공짜요 무상이다’라는 생각에 대해서 루터가 옳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가톨릭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이를 강력하게 확증하며, 이 중요한 점에 대해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믿음에 의한 의화와 그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를 그리스도교적 자유라고 불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관리자, 사업가, 회계사 또는 소유주가 아니라 우리의 연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기술적으로 이루어낸 정확한 성과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 단순하고 해방적인 진리를 다시 배우고 다시 강조해야 한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년)의 저서인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 나오는 말이 이를 잘 요약해 준다. 그는 “우리는 하느님이 특정한 종류의 ‘행동’을 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느님은 특정한 종류의 ‘사람’을 원하신다.(We may think God wants actions of a certain kind, but God wants people of a certain sort.)”고 말합니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어서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랑이 거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천국도 대가 없이 받는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차지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신다. 정말 간단하다. 이는 ‘내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준다면, 여러분이 선물을 받아들일 믿음이 있을 때만 그것을 얻게 됩니다.’라는 뜻이다.

믿음을 우위에 두는 것은 행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해방한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선행이 자유로워진다. 올바르게 행해야 한다는 걱정(performance anxiety)에서 자유로워진다. 선행으로 천국을 사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진다. 믿음으로 우리의 선행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사랑받는 것을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들고, 그에게 공덕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연인이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천국의 비용을 따지면서 선행 1,000개, 999개…를 따지는 것과 같은 사고는 유치하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실천하신다. 그분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죄만은 미워하신다. 탕자의 아버지는 회개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이제 그동안 네가 저지른 모든 해악과 낭비한 모든 돈을 내게 갚아야 한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네가 정신을 차리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참조. 루카 15,11-32)

밖에서 돌아온 형은 아버지의 행동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또 종일 일한 일꾼들은 포도원 주인이 늦게 도착한 일꾼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었을 때 분개했다.(참조. 마태 20,1-1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루카 23,43)라고 말씀하시며 용서하시는 것을 듣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과거의 모든 죄는 어떻게 하고요? 정의는 어쩌고요? 형벌은 어쩌라고요?”라고 말하면서 대들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요한 1서 4장 18장이 준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분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하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방탕한 삶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은 하인의 숙소가 아니라 연회장에 앉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하인으로라도 고용해주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축제 예복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었다.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의 요점은 하느님의 충격적이고 미친 듯하면서도 놀라운 사랑의 선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게 하느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믿음에 의한 의화에 관한 통찰에서 온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수직적 관계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직과 수평을 담은 십자가는 두 방향을 담았어도 하나의 사랑이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사랑(아가페)을 받았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성과에 대한 불안” 없이 자유롭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걱정 없이, 이제 우리는 성공이나 만족, 행복이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풍성한 사랑에서 우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생수”(요한 4,10.11;7,38)의 통로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엄청난 선물을 기꺼이 전달한다. 우리가 어떤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사랑할 때, 우리는 성취에 대한 불안과 걱정의 노예가 된다. 예수님은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34)

사랑의 성공 여부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된다.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은 우리를 성공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신실하라고 부르셨습니다.(God does not call us to be successful, but to be faithful.)”라고 자주 말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은 비록 나의 사랑이 이웃을 감동하도록 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성공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 사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랑이 세상에 의해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히더라도 그것의 원천, 곧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완전한 순종에서 비롯된 사랑이므로 성공이 보장되는 사랑이다.

‘이 사람 예수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이 질문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등장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왔을까, 아니면 인간에게서 왔을까?’ 이 질문은 우리와 우리의 사랑에 대해 던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사랑은 위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거듭난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사랑이 인간 본성의 산물일 뿐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여하에 따라 무한한 차이가 생긴다. 이는 우리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를 결정할 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생에서 하느님의 충만함 안에서 살고 사랑하는 거룩한 행복을 누릴 것이냐, 공허함과 궁핍함 속에서 살고 내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는 고통스러운 불안의 상태를 살 것이냐를 결정할 만큼 큰 차이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이다.

나를 가장 자유롭게 했던 발견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채우셨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양쪽 끝이 열려 있는 관과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한쪽 끝으로 들어오고 다른 쪽 끝으로 나간다. 그것은 믿음으로 들어오고 행위로 나간다. 반면, 한쪽 끝만 열린 관, 즉 이웃의 끝만 열려 있는 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마치 치약(치약 튜브는 한쪽만 열려 있다)이 조금만 남아서 조금만 쥐어짜 사용하게 되듯이, 영적인 공급(사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낭비할까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주신다. 그래서 성인들이 그토록 무모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

7. 하느님의 사랑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객관적인 실재이다.(God’s love is an objective reality that makes a real difference.)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또 다른 큰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전에는 이 개념이 항상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나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 밖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실제 효과를 일으키는 객관적인 현실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부 안에서만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신성한 인격인 성자로 영원히 태어나신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은 그분들 안에서만 존재하는 주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또 다른 신성한 위격인 성령으로 영원히 발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태양의 빛처럼 객관적이다. 태양은 어떤 의미에서 빛, 또는 빛의 근원이다. 태양은 실제로 지구에 빛을 비춘다. 그리고 지구는 실제로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기 때문에 매일 아침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실제로 사랑을 주신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삶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인 태도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객관적인 존재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며, 일종의 영적 수혈이다. 진짜 혈액은 아니지만 실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2코린 5,17) 한 그대로이다.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물어본다면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많은 경우에 그 대답은 모두 믿음, 감정, 행동에 초점을 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 그리스도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단지 무엇을 믿거나 느끼거나 행동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전혀 다른 존재,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인은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한다. 믿음으로 하느님을 내 영혼에 모시면 내 태도뿐만 아니라 내 존재가 바뀐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을 나누면서 아내가 임신하게 되고 아내는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여인에서 어머니가 되고 바뀐다. 그러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임신하기를 원하신다. 믿음은 우리 영혼을 임신시키려는 하느님의 소망에 “예”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생명을 품은 임신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이자 끝, 원인이자 결과, 알파와 오메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삶은 하느님과의 영적 혼인 관계라고 반복해서 언급된다.

8.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해 창조되었다.(We were made to be united to God forever.)

신앙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임신하는 것과 같다면, 천국은 우리의 영적 생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의 몸에 생명의 씨를 심듯이, 은총으로 우리 영혼에 새 생명이 심어진다. 씨가 자궁 안에서 아기로 성장하듯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영혼의 자궁에서 자라나고 형태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영광을 위해 준비되고 있으며, 자궁에 심어진 배아가 완전히 꽃을 피우는 것이 출산이라면, 우리의 천국 생활은 우리 영혼에 심어진 이 신성한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것과도 같다.

수도자는 서원을 통해 하느님과 영적인 혼인을 한다. 이 결혼을 통해 천국의 기쁨을 앞당겨 즐기게 된다. 다른 비유를 빌리자면, 이 땅에서의 신앙은 엄숙한 약혼식이고 천국은 결혼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운명은 신비주의자들이 말했듯이 하느님의 얼굴을 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로(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하느님과 친밀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의식과 사랑을 공유한다. 이 땅에서도 결혼이든 지속적인 우정이든, 개인적인 친밀감은 상대방과 단순히 객체로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공통의 인생관과 하나 된 얼굴(두 존재가 서로의 내면을 완전히 나누는 것)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우리와 혼인하시려고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결혼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먼 거리로부터 우리를 데려오셨다. 먼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다음 육체에서 영으로, 아담에서 새 아담으로, 저주에서 구원으로 우리를 데려오셨다. 하느님은 무엇을 위해 이 모든 수고를 감수하셨을까? 우리와의 혼인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며 완전한 결합이 사랑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주를 창조한 궁극적인 이유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마다, 자기 뜻에서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설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에 “예”라고 말할 때마다, 온 우주가 기뻐하고 충만해진다. 우리는 별들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하거나 좌절시킬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사제들이다.(We are the priests of the universe.)

9. 기쁨에 대한 열망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도한다.(Desire for joy points us to the love of God.)

기쁨에 대한 열망은 또 다른 큰 개념을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기쁨이라고 부르는 신비로운 갈망이다. 기쁨은 돈 보스코의 예방 교육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지상에서의 기쁨과 천국에서의 기쁨이 있다. 우선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주는 기쁨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이 기쁨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행복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전문 용어이다. 무엇보다 기쁨은 즐거움이나 행복과 구별되어야 한다. 기쁨은 만족이 아니라 갈망이요 강렬한 동경이다. 다른 어떤 만족보다 더 만족스럽고 더 즐겁기 때문에 불만족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기쁨의 두 가지 특징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쁨의 대상이 하느님이기에 신비이다. 그래서 바라는 것을 정의할 수 없고, 적어도 이 생에서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갈망하는 대상은 반드시 실재해야 한다. 왜 그럴까? 갈망은 타고난 것이며 (본능적인 것), 모든 타고난 갈망은 어떤 현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있는 곳에는 배를 채울 수 있는 진짜 음식이 있다. 목마름이 있다면 물이 있어야 한다. 지상에 대한 신성한 불만족이 있다면 천국이 있어야만 한다.

이 신비한 갈망에 대한 설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의 위대한 문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불안합니다.(Thou hast made us for Thyself, and [therefore]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Thee.)”(고백록, 제1권 1장) 우리가 세상과 불안정한 사랑 싸움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과 약혼했기 때문이다. 코헬렛(3,11)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형상을 한 진공 상태이며, “이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 영원한 대상, 즉 하느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this infinite abyss can only be filled with an infinite and eternal object, i.e., by God)”(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년, 팡세Pensées)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더 큰 기쁨을 향한 이 불만족, 이 미지의 기쁨을 향한 갈망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갈망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10. 낭만적인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드러내고 하느님과 우리와의 결합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Romantic love reveals the beloved and is meant to point us toward union with God.)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소중한 경험은 낭만적인 사랑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낸다. 기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낭만적인 사랑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이유를 안다. 낭만적인 사랑은 기쁨의 한 형상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기쁨이 수평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상의 연인은 두 가지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대신할 수 있다. 하나는 우상처럼 하느님을 대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사랑이 우상이 될 때, 사랑은 단지 눈이 멀 뿐만 아니라 눈에 꺼풀까지 뒤집어쓴다. 다른 모든 우상 숭배나 중독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그것이 행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의 경우 그 사랑은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하게 정확히 보는 것이다. 사실, 가장 높고 가장 정확한 정확도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의 가장 완벽한 지식이다.

이는 성경에도 반영되어 있다. ‘아가’의 신랑은 전통적으로 우리 영혼의 연인이신 하느님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그의 신부이다. 신성한 신랑은 인간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흠 없는” 것이 사실일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눈이 멀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정체성과 운명에 대한 예언, 즉 예언으로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말씀하시며, 그분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영원히 있는 모습 그대로 보신다. 우리에게는 이 “흠 없음”이 미래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영원은 끝없는 미래의 여러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시간이다. 죽은(지난) 과거나 태어나지 않은 미래는 없다. “이미 지나감(no longer)”과 “아직 오지 않음(not yet)”이 없다.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하느님께서는 눈이 멀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 아가페적인 사랑이 맹목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맹목적일 수 있다. 오로지 에로스만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아가페 같은 사랑 안에서 나누는 사랑이 될 수는 있다. 이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나눌 때 연인의 신비로운 중심에 침투하여 연인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 즉 “나”로 보기 때문에 연인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모든 객체, 모든 것은 양적 또는 질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유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객체가 아니다. ‘나’의 가치는 계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인 ‘나’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느님의 본질적인 이름이 ‘있는 나(I AM)’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왜냐하면 사랑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실하고 명확하게 본다. 사랑은 서로 눈을 맞추듯, ‘나’와 ‘너’를 보고 이해한다.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The heart has its reasons which the reason does not know.)”(파스칼, 팡세) 마음은 진정으로 본다. 사랑이 본다. 바로 이 새로운 비전이 우리를 그토록 신비롭게,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맹목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이 아니다.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엿보게 한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말씀하신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1813~1855년)는 그의 책 제목 <마음의 순결은 한 가지를 의지하는 것(Purity of Heart Is to Will One Thing)>을 통해 이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 22,37-38) 이러한 순수한 마음과 사랑을 지닐 때만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격체이시며, 그 인격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고, 온전한 이해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온전한 사랑뿐이다.

우리 모두는 이 원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누가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 누가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가? 마음이 넓은 사람인가, 아니면 머리가 큰 사람인가? 당신을 깊이 사랑하지만 똑똑하지 않은 사람인가, 아니면 똑똑하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가? 천재는 당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만이 당신을 안다. 천재는 사물을 알지만 사랑은 사람을 안다.

낭만적인 사랑은 특별하고 독특한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이웃 사랑처럼 명령이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도 않는다. 우리는 구덩이에 빠지듯 사랑에 빠진다. 그것은 선물이자 영광이다.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천국 역시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자 영광이다. 이 땅에서 필요한 공로와 율법, 순종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천국에 없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하느님께서 이 땅의 순례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천국의 표본이다. 에로스는 아가페를 위한 애피타이저(식전의 간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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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가장 심오한 10가지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들어본 것 중 훨씬 더 심오하다고 여겨지는 생각 하나가 있다. 1962년 4월 23일 시카고 대학의 록펠러 경당에서 주고받은 질의응답 시간에 한 질문자에 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1886~1968년)가 했던 답변으로 알려지는 내용이다: 질문자가 바르트에게 “바르트 교수님, 당신은 수십 권의 위대한 책을 저술하셨고 많은 사람이 당신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수많은 사상을 한 문장으로 말씀해주실 수는 없을까요?”라고 묻자 위대한 신학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Jesus loves me.)”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린이 때 어머니의 무릎에서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라는 노래를 배웠고, 그 노래에서 배운 문장 하나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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