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장
사랑이 지향하고 나아가는 일치는 영신적인 것이다
하여간 일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사성이나 혈족관계의 일치 같은 자연적인 일치도 있고, 원인과 결과에서 나오는 일치도 있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일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의지적意志的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 일치가 비록 자연 본성을 따라 생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일치는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마치 선행에 근거를 둔 일치로서 의심 없이 은혜를 받은 이는 은혜를 베푼 이와 일치하게 하는 것이나, 또는 대화나 우정, 등에서 생기는 일치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일치가 자연적인 것일 때는 사랑을 생기게 하며 여기서 나온 사랑은 우리를 새로운 일치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일치이니, 마치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혹은 두 형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같은 핏줄을 서로 이어주고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일치 결합되어 있으니, 이러한 일치를 통하여 저들은 사랑으로, 즉 서로 사랑토록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사랑을 통하여 저들은 의지와 정신의 일치로 인도되는데, 그 기초가 자연적인 것인 한, 그러한 일치는 의지적이라고 부르는 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임의로운 것이 된다.(임의任意, = arbitrium이란 성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서 영향받은 것으로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자유libertas를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하였고, 원죄로 타락한 이후의 인간들이 누리는 자유arbitrium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자는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된 자유로운 자유이고 후자는 악으로 기울어지기 쉽고, 기울어져 가는 인간의 자유이며, 온전한 자유가 아니고, 죄의 종이 된 인간이 누리는 자유이므로, 이런 자유=임의=arbitrium는 진정한 자유libertas의 잔존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또 이러한 사랑 속에서는 자연 본성적 일치로 말미암아 일치 자체 이외에는 아무러한 대응성을 찾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일치 자체를 통해서 본성은 의지를 미리 다루며, 의지로 하여금 본성이 이미 만든 일치를 승인하고 사랑하고 완성케 하도록 의무를 부과시킨다. 그러나 의지적 일치에 관한 한 이러한 사랑을 쫓으며, 사랑은 참으로 그 일치의 효과적 원인이 되며, 따라서 그것은 사랑의 유일한 목적이며 종착점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마치 사랑은 일치를 지향하고 있듯, 그 일치도 매우 자주 사랑을 확장하고 증가시킨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받는 이들의 모임을 찾게 하며 이러한 모임은 매우 자주 사랑을 양육하고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또 사랑은 결혼의 일치를 열망케 하며, 이러한 일치는 서로 간의 사랑을 보전케 하고 증가시키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의미로 보아 사랑은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어떤 종류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테오티모여, 거룩한 정배는 입맞춤으로 자기 짝과 일치하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또 입맞춤이란 영혼들의 상호 통교로 이루어지는 영신적인 일치를 표시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사람은 사랑한다. 그런데 의지를 통해서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목적은, 의지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의지는 영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지향하고 있는 일치가 영신적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사랑의 어좌이며 근원이 되는 마음은, 육체적 사물에 의한 것으로는 완성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대단히 해롭고, 약화시켜 주며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재빨리 제거하지 않는 한, 마침내는 패망을 가져오게 되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영혼이 자신을 부리고 있는 무수한 여러 가지 작용과 활동에 있어서, 비록 그 작용이 동일한 것이든 다양한 것이든, 그러한 작용을 계속하면 점점 불완전해지고 약화되어 간다. 왜냐하면 영혼 자체가 우선 유한한 것이므로 이 영혼에서 발하는 모든 능동적 덕행도 유한하여 만일 다양한 여러 가지 작용을 위해 활동력(혹은 능동성)을 분배하게 되면 그 각 작용에 분배되는 힘은 줄어들게 된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에다 제법 주의를 잘 집중하지만, 사실상 그 여러 가지 중 개별적으로는 그만큼 덜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각을 통해서 어떤
얼굴의 생김새를 면밀히 뜯어보는 동시에 훌륭한 음악의 조화를 정확히 듣고 감상할 수는 없으며 윤곽과 색채에다 동시에 주의를 집중하기도 불가능하다. 또 우리가 이야기하는데 정신이 팔리면서 동시에 다른 것에 같은 주의를 기울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카이사르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내가 모른다는 것은 아니며, 또 오리제네스Origen 같은 천재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했다고 위대한 인물들이 말하는 것을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비례로, 그 각 대상에 기울어지는 집중이 감소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더 많이 보는 것, 듣는 것, 혹은 아는 것과 또 더 잘 보는 것, 듣는 것, 아는 것에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적게 보는 자는 잘 볼 수 있는 자이고, 많이 보는 자는 잘 볼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잘 알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지능의 힘과 능력은 각가지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발산發散되는데, 이러한 것은 그 힘이 한두 가지 대상에로만 집중될 때보다 훨씬 덜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자기의 온갖 힘을 사랑의 갖가지 작용에 종사하게 할 때, 그처럼 분산된 행위는 덜 힘 있고 덜 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행동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신적(spiritual)인 것, 이성적(reasonable)인 것, 그리고 감각적(sensitive)인 것이다. 사랑이 위의 세 가지 활동을 거쳐 동시에 이루어질 때 그것은 의심 없이 폭넓은 영역의 것이겠으나 긴장도와 밀도는 오히려 덜하며, 오직 한가지 작용에 의해서만 사랑이 실천될 때, 긴장된 밀도와 강도强度는 짙고 많으나 범위와 외연은 적다고 하겠다.(즉 질과 양의 반비례 관계가 적용된다고 하겠다-역자 주) 또 우리는 사랑의 상징과도 같은 불길이 대포 열을 통하여 대포구나 총구銃口를 통해서 내뿜어지는데, 만일 그것이 두세 개의 포열이나 총열을 통해서 나간다면, 동일한 양의 불길인 경우, 훨씬 힘이 없고 약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보지 않는가? 그런데 사랑은 우리 의지의 행동이니까 사랑을 갖고자 열망하는 자는 고상하고 관대할뿐더러 매우 정열적이고 능동적이며, 영신적 작용의 한계 내에 사랑의 덕과 힘을 내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의 감각적 또는 육감적 지체의 작용에다가 사랑을 적용하려는 자는 본질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지능적 작용을 아주 멀리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탈혼(ecstasies) 상태가 두 가지 있다고 보았으며, 그중에 하나는 우리를 위로 올리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으니, 이것은 곧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사람은 천사와 짐승들의 사이에 위치한 성질의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 지능적 부분에 있어서는 천사적 성격의 본성을 지녔고, 그 감성적 부분에 있어서는 금수들의 본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인간은 자기 생명의 활동으로 또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이 비천한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여 내고 해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능적인 행동에 자신을 많이 습관화시킴은 자신을 금수의 본성에 보다도 천사의 본성에 더 가깝게 가게 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감각적인 행동에 아주 많이 적용했다고 하면 그는 중간적 상태에서부터 금수의 상태로 떨어져 내려간 것이다. 또 탈혼 상태라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서 밖으로 나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 올라갔느냐, 아니면 아래로 내려갔느냐의 여하에 따라 진정한 탈혼이었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그래서 지능적이며 신적인 즐거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그러한 느낌에 의해서 취해져 버리며, 참으로 자신에서 나오므로, 즉 자기들 본성의 조건 위로 떠 오름으로, 오로지 복되고 열망함직한 출타出他에 의해서 되는 것이며, 이러한 탈혼은 한층 더 고상하고 훨씬 탁월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고, 영혼의 작용은 천사처럼 되어 본성의 실체는 인간이며 따라서 인간적인 천사, 또는 천사적 인간이라고 부를 만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육감적 쾌락에 빠져서 감관의 향락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자들은 그 중간 위치로 추잡한 짐승들의 가장 낮은 조건으로 떨어지며 본성으로는 인간이나, 작용으로는 짐승이라 하겠다. 자신이 이러한 처지로 빠져나온다는 것은 정말 가련하고도 비참하며, 자신의 본성적 상태의 한없이 무가치한 조건으로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탈혼 상태가 우리 위로 향한 것이든, 우리 아래로 향한 것이든 크면 클수록, 그만큼 영혼은 그 넋을 잃음으로써 제게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또 제 안에서 다른 작용을 하지도 못하게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나 하늘의 사정에 대해서 탈혼에 이른 사람들이 탈혼 동안에는 실제로 오관의 사용과 주의, 운동 그리고 모든 외적 행위를 완전히 멈춘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영혼이 자기의 능력과 행동을 그 신적 대상에 집중시키기 위해, 다른 모든 기능을 다른 능력에서 거두어들여 그것을 그 대상에 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감적 정욕에 꽉 잡혀 있는 자도, 특히 일반적 의미로 본 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이성과 정신의 기능과 조심성 및 활용을 상실케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로 가련한 영혼들은 금수적인 대상을 보다 더 온전히 실감하기 위해서 즉 짐승과 별로 다름없는 것에 잠기고 파묻히기 위해서, 심지어 영신적인 작용과 역량까지 그리로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위의 두 가지를 아주 신비롭게 따른 듯이 보이는 두 실례 중에는, 우선 엘리야가 있다. 그는 천사들 사이에서 불 병거와 불 말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으며(2열왕 2,11), 또 한 가지 다른 시범적 예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야수들의 반열에 떨어져서 짐승과 같이 된 사실이다.(다니 4,30)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은 영혼이 육감적 행동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또 자기 밑으로 보다 하급적인 것에로 내려가게 될 때, 보다 위로 가는 고상한 사랑을 실천하고 이에 맛들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지고 있었던 고차적인 사랑도 보다 훨씬 힘을 잃고 약화일로로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하고 본질적인 사랑은 감각적 사랑이 향하는 그러한 일치에 의해서는 도움을 받거나 보전되기는커녕 오히려 파괴되고 흩어지고 소멸될 뿐이다. “나귀들이 제 둘레의 풀을 뜯어 먹으면, 욥의 황소들은 뿔로 땅바닥을 파헤치며 식식거리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힘껏 일한 소들에게 주어진 목초牧草를 나귀들이 공연히 먹어 치우는 연고다.”(참조. 욥 1,14) 우리 영혼의 지능적 기능이(=부분이) 정당하고 덕스러운 사랑에 기울어져 작용하게 될 때 흔히는 그 하부적 부분의 감각적 기능들은 제게 적합하고 고유한 일치를 향하게 되며, 일치란 오로지 마음과 정신에 속한 것이고 마음과 정신만이 진정하고 본질적인 사랑을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부구조의 감각으로 기울어져 역행하게 된다.
엘리사Eliseus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Naaman을 낫게 한 후(2열왕 5,8-19), 자기의 의무수행으로 만족하였고, 결코 그가 주려던 금이나 은이나 그 외의 물건을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게하지Giezi라는 불신한 그의 종은 스승의 뒤를 쫓아가서 스승이 거절한 바를 청하여 취하였다.(2열왕 5,20-27) 지성적이면서 심리적인 사랑은 확실히 우리 영혼 속에서 주인의 구실을 해야 하며, 모든 종류의 감각적인 일치를 거부해야 하며, 오직 아주 단순하고 친절한 호의好)에 그치고 만족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정신이 부리는 종들에 지나지 않고 또 그러해야만 할 감각적 부분의 능력들은 이성이 거부한 바를 요구하고 되찾아 나서서 마침내 취하고야 말려고 들며, 또, 이성의 허락이 없이도 저들 나름대로의 일치를 강력히 욕구하여 밀고 나가며, 비열하고 치사스럽게, 바로 종처럼, 즉 게하지처럼, 스승의 청렴결백한 지향을 무시하며 부끄럽게 만든다. 이 주인의 지위는 우리 안에서 정신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이런 망측하고 순 감각적인 일치로 나아가는 그만큼, 그 비례대로 우아하고 지능적이며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오티모여, 이렇게 동물적인 쾌락과 격정에 관계된 일치란 진정한 사랑의 발생과 보전에 전혀 유해무익할 뿐 아니라, 아주 극단적으로 약화시킬 따름이다. 타마르에 대한 사랑으로 기절하고 죽은 암논이 감각적이며 동물적인 일치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너무나도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으므로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으며 아주 무례하게 그녀를 밖으로 밀어낸 다음, 철면피하게도 근친상간의 수치를 저지를 만큼, 사랑의 법도와 권리를 침해하였었다.(2사무 13,10-14)
바질Basil, 박하(박하의 일종으로 향미료와 약품의 원료로 쓰인다), 로즈매리rosemary, 상록수와(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상록수의 일종으로서, 절개, 충성 등을 상징한다), 마요라, 금잔화marigold(잉거시과에 속하는 관상용 화초로서 일년초며, 때로는 2년까지 간다. 봄 여름으로 붉고 누런 꽃이 핀다), 정향나무(정향수丁香樹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것으로서,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지만, 약용으로 쓰인다. 특히 그 꽃봉오리를 정향丁香이라 하여, 복통, 구통 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로 쓴다), 계수나무(계수나무는 중국 남부와 동인도에서 나는 상록교목常綠喬木으로서 대황백색의 꽃이 원추형으로 핀다. 이 나무의 껍질을 계피라고 하며 약용으로 쓴다), 육두구肉荳蔲 풀(肉荳蔲, nutmeg는 연대식물의 하나로서 담황색 꽃이 종鍾 모양으로 피는데, 이 꽃의 열매를 건위健胃 및 풍風을 없이하는 약제로 쓰며, 조미료로도 사용한다), 레몬lemon(레몬은 동인도에서 많이 나는 열대식물로서, 운향과芸香科에 속하며, 열매와 열매의 껍질을 조미료, 음료 향료, 등으로 쓴다), 궁노루의 사향麝香(궁노루의 사향, 또는 사향노루라고도 하는 특수한 노루의 배꼽에 향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사향이라고 한다. 이 사향을 가진 노루를 사향노루라 하며, 약용, 향액원료 등으로 쓴다.
사냥꾼들의 소원 중 하나는 사향노루를 만나서 잡아 보려는 것이다)을 한데 합쳐서 섞으면 아주 뛰어나게 훌륭한 향기를 내지만, 그것을 증류시켜 받아낸 향수에는 따를 수가 없다. 그냥 섞으면 제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을 다만 한데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향수는 원료인 향초의 향기가, 원체에서 분리되어, 더 잘 섞임으로써, 아주 완전한 향기를 이루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후각에 스며드는 향료가 된다.
이와같이 사랑도 지성적인 능력들과 일치되어 섞인 감각적 여러 능력과 기능 속에서 된 일치에서 어느 정도 발견될 수 있지만, 마음과 정신만으로 된 일치에서처럼 그렇게 탁월하고 훌륭한 일치는 되지 못하며 육체적인 모든 정情에서 분리된 마음과 정신에서 나오는 사랑만이 순수하고 영신적이 된다.
이렇게 섞인 애정의 향기는 가장 감미롭고 보다 나은 것 일뿐 아니라 가장 생기롭고 활성活性적이며 견고한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무례 망칙하고 세속적이고 지상地上적이며 치사스러운 정신자세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사랑의 가치를 마치 금으로 만든 화폐(옛날 유럽에서 사용하던 소단위의 금화金貨처럼 여기려 든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겁고 큰 것이 제일 비싸고 값진 것인 줄 알듯이 사랑도 그런 것인 줄만 안다. 즉 동물적인 사랑은 가장 강한 듯하여 큰 것인 줄로만 여긴다. 왜냐하면 매우 난폭하고 소란하기 때문이다. 또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며 지상적이므로 다른 것보다 더 견고한 것으로 알며, 다른 것보다 감각 할 수 있고 맹렬하므로 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여겨, 따르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사랑은 불과 같은 것이다. 이 불이란 것은 물질보다 훨씬 뛰어나고 우아한 것이고, 그 불길 역시 맑고 아름다우며, 이 불길을 누르고 흙으로 덮기 전에는 그리 쉽게 꺼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드높이 상승된 것이고 얼마나 영신적인 것이냐에 따라서 그만큼 그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과 작용도 생생하고 활발하며 본질적이고 영구적인 것이 된다. 비열하고 지상적인 일치로 이끌어 내려가는 것보다 더 쉽게 사랑을 소멸시키는 길은 다시 없을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가 말씀하셨듯이, 영신적인 쾌락과 육신적인 쾌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으니, 육체적 쾌락은 그것을 가지기 전에는 열망케 하고 가지게 될 때 맛을 잃고 싫증나게 하는 대신 영신적인 것은 가지기 전에 맛을 모르게 하고 싫증 나게 하며 가지게 될 때는 누리게 하고 기쁘게 한다. 그러므로 동물적인 사랑은, 그것과의 일치로써 제 만족을 불태우고 완성하려 하면, 오히려 반대로 그 만족을 달성시킨 가운데서 만족을 파괴시켜 버리며, 오로지 이러한 일치의 불만족한 허탈감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즉, 거의 모든 동물적인 것은 가장 강렬한 충동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고 나면 슬픔과 우울함과 짜증이 날 뿐이며, 많은 이득을 보려던 상인이 사업에 속아 손실을 본 것 같은 모양이 된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지성적인 사랑은 자기 대상과의 일치에서 바라지도 못했던 그 이상의 큰 만족을 맛보게 되며, 거기서 쾌락과 흡족을 더욱 완성해 가면서 끊임없이 더욱 더 일치시켜 나감으로써 항상 일치를 계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