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성야 ‘다’해(루카 24,1-12)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ㄴ-6) *부활아침Davide Benati, Zafferano, Acquerelli su Carta intelata, 2013

성야聖夜’는 밤샘이고 깨어 기다림이며 깨어 지킴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큰 축일의 전야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열망으로 밤을 지새웠다. 유다인들의 파스카(과월절)는 이집트에서 주님의 천사가 그냥 지나가시고 통과하심으로 이집트인들의 맏배만 죽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남을 기념하였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날에 주로 새 입교자들의 세례식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매 주일 부활을 반복하였고, 이는 그들에게 가장 중대하고 유일한 축제였다.

이 밤은 사제가 『어둠 속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밝히는 밤,…사제가 어둠이어도 주님께서 빛이시니 ‘그리스도의 광명’을 노래하는 밤…해마다 내가 죽지 못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드는 부활절 아침. 나는 죄인이어도 당신이 사랑이어서 또다시 나를 살게 하는 찬미의 힘찬 노래 거듭나게 하는 노래 알렐루야 알렐루야(이해인 수녀님의 ‘부활소곡’)』이다. 오늘 전례는 ① 빛의 예식 ② 말씀의 전례 ③ 세례 예식 ④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다.

지난 이틀간 성삼일을 지내오면서 우리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기렸다. 이제 비로소 그 세 번째 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진정 돌아가신 분께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신 분”, 주 하느님을 만난다. 그저 단순히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분” 자체를 만난다. 영어로 ‘living’이 아니라 ‘the Living’을 만난다.

이 밤 파스카 성야聖夜는 참으로 우리를 살게 하고, 인간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참된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구세사救世史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해 준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감히 피조물의 하나가 되고자 하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 살이요 육신이 되고자 하셨으니,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와 몸짓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가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라는 여인에게서 몸을 취하셨고 기꺼이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의 몸이 되고자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어루만질 수 있고 다독이며, 보살피고 낫게 하는 손이 되고자 하셨고, 식별하고 돌아보시는 눈이 되고자 하셨으며, 우리와 통하는 말을 하기 위한 혀가 되고자 하셨다.……이로써 “더할 나위 없이” 그저 놀랄 수밖에 없도록 이룩하신 “훌륭한” 모든 일, “귀먹은 이를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을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모든 일,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신”(사도 10,38) 일을 이루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렇게 “훌륭하고 좋은 일”만을 이루라고 허락하신 몸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으며,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루카 22,19-20)를 통하여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당신 몸과 피의 성사, 결코 다함이 없는 성체성사를 우리에게 남기시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뭔가 미심쩍다는 일말의 의혹도 떨구어버리면서 온전한 순명으로 복음의 정점이요 대종장大終章의 내용을 루카복음서에서 듣는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 24,1) 안식일이 지난 다음 “주간 첫날”이요 주님이 날이 마침내 열린다. “새벽 일찍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온 여성들(참조. 루카 8,1-3;23,49), 금요일 저녁에 예수님의 죽음과 안장安葬을 목격한 여성들(참조. 루카 23,55)이 미리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온다.” 예수님께서 “오후 세 시”(루카 23,44)에 돌아가시면서 해가 져가고, 계명에 따라 쉬어야 하는 안식일(참조. 루카 23,56)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여인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무덤에 모셔야 했기 때문에 기름 바르는 예식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성실과 사랑으로 스승이요 예언자로 모셨던 분에게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온 여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루카 24,2-3) 무덤이 비어있었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나의 마음속에 나를 가두어 놓고 있는 커다란 돌, 너와 나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은 돌,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은 돌이다. 부활이란 삶을 방해하는 돌을 치우는 것이다. 무덤을 막은 돌은 삶을 방해하는 장애의 상징이다. 과거의 짐일 수도, 또한 살아가면서 입은 수많은 상처일 수도 있다. 또한 주변의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일어나 가야 할 길을 가로막아 가지 못하게 막는다. 거꾸로 누군가에게 그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내 자신일 수도 있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나 자신의 형체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나를 죽게 만든다. 이런 것들은 나만의 외로움일 수도, 나만의 아픔과 상처일 수도, 내가 원래의 내 모습을 잃게 만들어버린 누군가에 대한 미움일 수도, 절망일 수도, 죄악일 수도,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이 돌처럼 굳어 살이 아닌 단단한 돌 심장을 가졌다. 무덤을 막은 돌 너머에는 시체가 썩는다. 어쩌면 인생은 이러한 큰 돌로 막힌 삶이다.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돌로 봉인된 무덤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이렇게 죽음으로 봉인된 무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며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루카 24,4) 루카 복음사가는 여인들이 “당황(아포리아, ᾰ̓πορῐ́ᾱ, aporia)”했다고 한다. 불확실과 놀라움, 그리고 좌절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막막함이 덮친다. 그들이 보았고 따랐던 분의 몸, 마지막으로라도 정성스레 기름을 발라 모시려 했던 분의 몸이 없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부재不在’이다.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고, 그러한 당혹스러움에서 여인들을 누가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 그 어디에 그 누구도 없다. 오직 하느님 편에서의 계시,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빈 무덤의 의미와 뜻을 밝혀줄 수 있다. 인간적으로는 오로지 누군가가 시신을 어딘가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정말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살아서 도망이라도 친 것일까? 제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속임수를 쓴 것일까? 예수님을 죽인 이들이 사람들이 그분의 시신을 경배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서 몰래 치운 것일까?

2. “살아 계신 분되살아나셨다기억해 보라

그러나 여인들의 ‘아포리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처럼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 하늘의 전령이요 천사들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변모 때에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루카 9,30) 하였듯이 여인들에게 나타난 두 사람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ㄴ-6) 하는 말을 여인들과 나눈다. 성경의 언어를 아는 이들에게 “두 사람”은 구약 시대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준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서이다. 루카복음의 저자인 루카는 또 다른 저서인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승천 때에도 “흰옷을 입은 두 사람”(사도 1,10)이 나타나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하는 말씀을 전했다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자들이 (하느님의 임재臨在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루카 24,5ㄱ)라고 한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하는 말씀처럼 여인들은 아직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눈은 땅을 향해 있었으며 몸은 엎드려 있었다.

엎드린 여인들에게 두 사람이 말을 건넨다. 여인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은 몸을 찾아 기름을 발라 드리고, 그 몸이 썩지 않도록 하고자 예수님을 찾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므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하늘의 전령들인 천사들은 “눈부시게” 차려입고 여인들에게 빛처럼 강한 말씀을 전한다. 마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잘못이라는 듯 질책처럼 전해지는 말씀을 여인들은 거듭거듭 되풀이해 들어야 할 것이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는 길에 있으나 잘못된 길에 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루카 20,38)이라고 예수님 몸소 선포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찾으려면 그분이 진정 살아계신 분임을 알 때까지 산 이들 가운데에서 찾아야 한다. 복음서의 시작에서 루카는 이미 예수님을 찾는 것에 관해서 말해 준 적이 있다.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위해 다녀오다가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을 잃고 사흘 동안이나 마음 졸이며 요셉과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참조. 루카 2,41-52) 소년 예수님을 마침내 성전에서 찾았을 때(루카 2,46), 소년 예수는 마치 부모를 책망하듯이 부모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반문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산 이들의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찾아져야만 한다.

책망하듯이 말을 건넨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이어서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하고 선언한다.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신앙 고백인 부활절 선포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사도 2,32),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사도 3,15),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되살아나신” 주님을 선포한 천사들은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ㄴ-7) 한다.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네 번이나 반복하여(참조. 루카 9,22.44;17,25;18,31-33)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셨지만, 제자들이 그렇게도 알아듣기 어려웠던 예수님의 말씀, 급기야 두 번째로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는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라고까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보라”는 초대를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누누이 계시하셨지만,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 모든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으며(참조. 마태 26,56 마르 14,54.52) 맏이 격인 베드로도 믿음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천사들의 ‘기억하라’는 초대를 받은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루카 24,8-9)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낸 여인들은 믿음을 회복하면서 즉시 부활을 알리는 사도들이요 선교사들이 된다. 아포리아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해결되면서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 된다. 복음사가 루카는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루카 24,10ㄱ)라고 밝혀주면서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루카 24,10ㄴ) 한다. 이러한 이름들과 함께 부활의 증인이었던 여인들은 이어지는 사도적 전승 안에서 더 이상 부활의 증인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모든 복음서가 이 진실을 증언해 준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최초의 선포자요 증인들예수님의 여성 제자들이었다.

3. “사도들헛소리처럼베드로는

여인들의 말을 전해 들은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루카 24,11ㄱ) “헛소리(λῆρος, lêros, 영어에서는 nonsense라 번역)처럼”이라 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ㄴ) 그렇게 여인들의 증언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루카 24,12) 베드로자신이 본 것에 대해 당황하며놀라워할 뿐 아직 부활의 증인이 되지는 못한다. 빈 무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주님께서 친히 수수께끼와 같은 상황의 베일을 걷어 올려주셔야만 하였다.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5)라고 기록한 대로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여인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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