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 금요일 ‘다’해(요한 18,1-19,42)

“목마르다…다 이루어졌다”(요한 19,28.30) by ALBERTO GIANQUINTO, Crocifissione

어제 성삼일의 시작인 성 목요일에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대로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고 성체성사의 표징과 이에 대한 해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당신 아버지께 드리고자 의도하신 대답이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감사”(εὐχαριστήσας, eukaristésas, 마르 14,23 마태 26,27 루카 22,17.19 1코린 11,24)와 “찬미”(εὐλογήσας, euloghésas, 마르 14,22 마태 26,26)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의 감사와 찬미는 실로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묵시 3,14)이신 예수님 자신의아멘”이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 제시하신 또 다른 가장 깊은 의미의 대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하느님 사랑의 불꽃(참조. 아가 8,6)이자 수난과 고통, 그리고 희생이며,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요한 1,18),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 당신의 몸으로, 마음으로, 당신의 온 존재로 살아내신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 한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악마(“세상의 우두머리”-요한 12,31;16,11)의 죽음 사이에 펼쳐진 대서사요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결에서 하느님과 인간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으로서 요한복음이 전하는 수난기 전체를 일일이 강해할 수는 없다. 수난기에는 질문이 있고 그에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이어지는데, 예수님의 대답 중 부활 승리와 관련된 몇 부분만을 강조한다.

1. “누구를 찾느냐?나다

예수님의 수난 장면은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요한 18,1)에 배반자 유다의 출현으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실 때 기도하고 밤을 지내기 위해 종종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그곳에 모이셨기 때문에”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요한 18,2) 제4복음서에서 유다는 캄캄한 밤에 예수님을 확인하면서 체포할 수 있게 도우면서 동시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안내하는 자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그리고 그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하셨다. 이제 유다는 그가 “하려는 일”을 한다. 예수님으로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로 드러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유다와 군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시고,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8,4-5) “나다.”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Egó eimi=I am 참조. 탈출 3,14)로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뜻하는 의미깊은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단순함으로 당신의 신원을 선포하시면서 그 어떤 폭력적인 행위나 방어의 몸짓이 없이, 이유도 따지지 않고 당신을 넘기신다. “나다.” 하실 뿐이다.

유다는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든 군사들과 함께 왔고, 예수님께서는 무장해제 상태에서 답하신다. 무장한 유다와 견주어 제4복음서는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요한 18,10) 하면서 제자 중 베드로 역시 칼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은 그러한 제자가 베드로라고 밝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부상을 입은 사람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베드로를 확실하게 밝힌다. 분명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로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무력적인 충돌을 감수할 정도로 제4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사랑은 지혜롭지 못한 사랑이었고, 앞뒤를 분별하지 못한 이기적인 사랑이었으며, 자신이 희생자인 것처럼 행세하며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그런 사랑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여정에서 수난과 죽음을 선포하실 때 이를 거절했고, 발을 씻겨주실 때도 이를 거부했으며, 마지막 만찬에서 유다에게 빵을 적셔주신 예수님의 성체성사에 관한 본질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만이 예수님께 여쭈어보아 예수님께서 배신자 유다에게 빵을 적셔서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제자는 이를 베드로에게 알려주지 않고 그저 베드로의 생각을 따라가는 듯이 처신할 뿐이었다.(참조. 요한 13,23-26)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급기야 칼을 빼 들어 저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하신다. 이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하신다. 앞서 유다에게 “나다.”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온전히 당신의 몫을 살고자 하신다.

2. “나는 아니요왜 나에게 묻느냐?”

군대와 그 대장과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요한 18,12) 이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8,15) 이들이 붙잡힌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참된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님 뒤에 있다. “다른 제자는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문지기 하녀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하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요.’ 하고 말하였다.”(요한 18,15-16)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나는 아니요.(Οὐκ εἰμί, Ouk eimí)” 한다. 바로 이 부분에 베드로가 스승이요 라삐이며 예언자로 알아모신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가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베드로, 당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당신의 공동체를 세우신다. 자기 자신만 아는 베드로, 예수님의 제자였기에 베드로일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마저 모르는 베드로이다.

하녀의 질문에 베드로의 부인否認이 있는 동안 대사제가 예수님께 질문한다. 이렇게 제4복음서는 문지기 하녀의 질문과 유다교 최고 권위권자인 대사제의 질문을 연이어 나란히 배치한다. 대사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였다.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요한 18,20-21)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대사제에게 하신 대답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내 제자들에게 물어라. 저기에 있는 베드로에게 물어보아라. 베드로와 나의 제자들이 내가 말한 것을 다 안다.’ 하시듯이 베드로에게 주신 간접적인 대답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으시면서 베드로가 당신의 제자임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베드로에게 본연의 제자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듯하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바에 따르면 대사제 카야파가 예수님께 질문하던 이 질문과 장면은 성령 강림 후 베드로와 요한(대사제 저택 안뜰에 베드로와 함께 있던 “다른 제자”)에게도 그대로 재연된다.(참조. 사도 4,1-22)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복음에서 베드로의 부인否認 후 닭이 울던 때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라는 구절을 덧붙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보셨다”(마르 1,16) 한 그대로 이제 예수님께서 그렇게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그의 소명을 새롭게 상기하시면서, 반석이요 기초가 당신을 배반하였다 하더라도 그를 다시 자기 자리에 돌려놓으면서 대답하신다. “곧 닭이 울었다.”(요한 18,27)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미리 자기의 부인否認을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2)

예수님의 대답이자 질문이 이어진다. 당신을 붙잡아 하느님과 인간을 모독했다는 핑계로 고발하여 십자가에 매달려는 적대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셔야 할까?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하시는 말씀은 당신을 때린 경비병 하나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예수님을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모든 이에게 하신 대답이요 질문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수난 과정에서 ‘영광송’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단순하게 전한다.

3.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대답으로서 절정은 “나는 당신을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요한 19,10-11) 하시는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권위를 부정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질서를 위해 필요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시지만, 빌라도에게 마치 ‘권력의 근원은 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권한은 위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 네가 나를 죽일 수도, 또 살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불의와 폭력으로라도 권위를 행사하려는 너에게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 까닭이다. 나는 폭력으로 반항하지도 않고 너의 편에 함께 하지도 않는다.’ 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주신 대답 안에는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권위를 부인하는 내용이 담기지 않는다.

4. “어머니의 아들네 어머니

죽음의 시간이 닥쳤을 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와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응답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그 자리에는 열두 사도를 비롯한 남성 제자들은 거의 모두 도망치고 단순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제자들만 있었다. 사실 당시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별 가치가 없었으므로 체포할 이유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여성들은 사형을 당하는 이들을 따라가 애도하면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고, 위험이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요한 19,26)라 한다. ‘다른 제자보다 더 사랑한 제자’가 아니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 한다.

사실 네 번째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상대적인 비교급 내용의 언급이 없고, 그저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기록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사랑하시는 제자”, 곧 당신의 공동체를 보신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를 대신하고, 두려움으로 도망친 다른 모든 남성 제자들을 대표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동체의 모성, 신자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모성, 자녀를 둘 수 있는 모성, 그 안에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교회 안에서 어머니를 인정하는 형태로 대답하신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배반자 유다를 알았던 제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던 유일한 제자,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사형을 당하시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ㄴ-27)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εἰς τὰ ἴδια, eis tà ídia)” 이는 풀어 말하면 ‘자기가 가진 것 중에 가장 큰 보물로 여겼다.’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교회가 선물이며, 성모님이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선물임을 안다.

5. “목마르다다 이루어졌다

수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응답은 아버지께 드리는 응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로 시편 42편을 읊조리며 기도하신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42,3) 하시듯이 “목마르다.”(요한 19,28) 외치신다. 예수님의 목마름이다.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해 느끼신 하느님을 향한 갈증이다. 정의와 사랑을 향한 목마름, 자비를 갈구하는 목마름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3) 하는 목마름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목전에서 당신의 갈증을 고백하신다. 물이 없어 목마름이고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목마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뜻만을 이루려고 하신 갈증을 느끼시며, 그러기 위해 하셨던 말씀과 행적을 돌아보시고, 사람들에게 주신 당신의 대답을 되돌아보시며, 진심 어린 감사와 찬미의 외침으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외치신다. 모든 것의 완결(consummatum est)을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소명이 충만하게 완결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받으신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는 소명을 진정 끝까지 사셨다. “다 이루어졌다” 하심은 기쁨의 외침이고, 감사의 외침이며, 축복의 외침이고, 승리의 외침이다. 예수님의 외침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이겼다.’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의 수난은 오직 이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이 응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실로 에우카리스티아, 감사를 “끝까지” 사셨다.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아버지의 모든 뜻을 완전하게 실현하셨다.

이 외침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숨을 거두셨다”라는 표현은 제4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영, 호흡,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난 숨을 넘기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숨을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와 인류, 그리고 온 우주 위에 불어넣으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무덤에서,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신다. 예수님의 온전한 대답에 이제 아버지 하느님께서 응답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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