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성 생활과 양성Formation To Consecrated Life
※ 아래의 글은 2025년 4월 한국 살레시오회의 연례 피정에서 나누었던 내용 중 한 꼭지이다. 피정 인도자인 헨리 보네티(Henry Bonetti, 권선호, 1943년~) 신부님께서 축성 생활을 위한 양성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들 몇 가지를 양성을 담당하는 이들이나 양성과정에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정리한 것이다. 이는 몇 가지 기본 요소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충실한 기초로 구성된다. 수도자들이요 축성생활자들이라면 누구나 이 요소들을 거쳐왔거나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요소를 다시 살펴보다 보면 양성책임자들뿐만 아니라 초기 양성기를 이미 지나온 축성생활자들이라 할지라도 평생 양성 차원에서 각자의 축성 생활에서 부족한 점을 가늠해볼 수 있고,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점들을 고려해볼 수 있게 된다.(*권 신부님의 원고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보충하거나 수정·첨삭한 부분이 있음)
이 내용은 축성생활자들을 위한 양성에 특별히 주의가 필요한 중요한 영역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한다. 물론 우리는 서로서로 서로를 양성한다. 또한 양성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의 모습, 구성원들의 태도나 행동, 관계, 장상이나 다른 회원들의 모범과 가르침, 타인과의 상호작용, 특별히 양성담당자와의 피양성자 간의 상호작용, 상담과 영적 지도, 수퍼 비전 등등 생각할 점이 참 많다. 누구에게나 양성은 평생 계속된다.
1. 고독을 위한 양성(Formation to Solitude)
페르세뉴의 아담(Adam de Perseigne, 1145~1221년, *르망 교구에 있는 페르세뉴 수도원의 원장이자 프랑스 시토회Ordre cistercien 회원)은 “침묵이 신성한 사랑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고독이 최고라는 의미)”라며 고독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 말이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선뜻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연결을 우선시하는 현시대에 혼자 떨어져 시간을 보내는 것이 견디기 힘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의미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은 세상과 나 사이에 세워진 벽이나 울타리라기보다는 전원이 꺼진 휴대전화기일 것이다. 오늘날 수도자들의 공동체는 전자 미디어 사용과 개인 네트워크 관리의 지침에 어떤 형태로든 합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부 청원자는 개인 시계나 알람 시계, 가족이나 친구의 연락처를 기록한 유일한 수단으로 휴대전화기를 사용할 것이다. 오늘날 세상 어디서나 휴대전화기 없이 생활하는 것은 마치 팔다리가 없이 사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나를 막론하고 인터넷 접속은 창밖을 내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날씨가 어떤지 알고 싶다면 커튼을 여는 것보다 날씨 예보 앱을 켤 가능성이 더 큰 세상이다.
고독, 세상과의 분리가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중요하다. 고독은 우리 수도 생활의 활동 중 하나로 긍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수도 생활에는 진정한 공동체, 침묵, 렉시오 디비나, 묵상, 기도, 사목 등도 있다. 수도자는 공동체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되, 고독을 카리스마의 표현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하며,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를 세속으로부터 도피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2. 공동생활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the Common Life)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옛날보다는 형제자매가 많지 않거나 외동으로 자란다. 집에는 대부분 개인 침실과 개인 공간이 있다. 사회생활에서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대부분 자기만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며, 여가에 원하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곳에 물건을 두며,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세상에서 산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란 이들이 정해진 시간표, 규칙, 제한된 개인 공간으로 구성된 수도 생활 공동체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공간을 공유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취향을 존중하고, 그들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이는 초기 양성을 겪는 이들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일 수 있다. 선택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공동 식사가 이들에게 시련이 될 수도 있다. 정해진 기상 시간, 특히 일찍 일어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늘 해오던 심야 활동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나이 든 수도자들은 공동생활에 익숙해져 그것에 잘 적응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수도원으로 들어 온 이들에게는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수도자들의 공동체에는 독특한 관습과 언어가 존재하는데, 그 언어는 겉보기에는 같은 언어일지라도 때때로 거의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일지 모른다. 따라서 세대 간 대면 소통의 기술이 연마되어야 한다. 이러한 소통은 수도원 내에서 전자 기기를 통한 연락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진다.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상주의라는 물결을 타고 수도원에 들어온다. 하지만 막상 수도 생활이 시작하면서 그 높은 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지닌 소양과 자질 및 자원에 대한 부정확한 평가 때문일 수도 있다. 양성은 공동체와 자신에 대하여 더욱 실제적인 시각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3. 노동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Manual Work)
수도생활에서 수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육체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노동은 수도자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 되지 않도록) 땅에 발을 딛고 살게 하면서 앉아서 하는 다른 일과 균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공동체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수도자는 자신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느낀다. 또한 자신의 적성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수작업을 거의 해본 적이 없이 수도자가 된 수도자는 이 분야에 대한 양성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수도자는 재미없으면서도 반복적인 일을 조용히 해내는 방법,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지시를 받는 방법, 비효율적인 일 처리 방식에 인내심을 갖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뜻으로 초기 양성기에 있는 이들에게는 정기적인 작업시간이 배정되어 있다.
수도자들은 또한 어떤 작업의 수행이 기도와 전례에 충실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수도자들은 자신의 손재주가 부족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주저하거나 반대로, 또 다른 수도자는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심하게 밀어붙일 수도 있다. 작업은 양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화 중에는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성향이 일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장상은 작업을 통해 양성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4. 충실함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Commitment/Stability: Perseverance)
평생을 헌신한다는 개념이 초기양성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양성을 받는 이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결혼을 많이 보았을 수도 있고, 그들의 여러 친구가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다. 양성을 받는 이들은 많은 경우에 급격한 변화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그 어떤 것도 오랫동안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양성을 받는 이들은 지킬 수 없을 것을 약속하고 싶지 않을 만큼 솔직하다. 현 사회에서 수도 생활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기다려보거나 일단 해보는 자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생활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또 다른 뭐가 있을까?”라고 곧잘 말하거나 속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는 안정적인 수도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헌신 또는 안정·정주定住(한 수도회에 머무르며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것)를 서프보드를 타는 사람의 모습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안정됨은 관 속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파도 위를 미끄러져 가는 동안 서프보드 위에 서 있으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동안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안정과 헌신은 일시적인 좌절로 성장의 역동성을 멈추지 않고 그 과정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자에게 정주定住를 약속하도록 요청했다.
헌신과 안정은 현대 생활의 또 다른 특징인 ‘즉각적 만족 증후군’으로 위협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 생활의 영향을 받은 수도자들은 원하는 결과를 빨리 얻지 못하는 일에 인내심을 갖기 어렵다. 수도 생활은 단거리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에 가까우므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양성이 필요하다.
5. 고요함에 대한 양성(Formation of Quietness)
젊은이들과 함께 역동적이며 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살레시오 회원에게도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중 대부분은 묵상이 언제 끝날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본다. 지루함을 느끼는 우리는 참신한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잘 알려진 아케디아ἀκηδία의 악습(*참조–아케디아https://benjikim.com/?p=12593), 즉 어떤 일에 진지하게 몰두하지 못하고 동시에 에너지를 여러 곳에 소모하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불안한 무능력을 가져온다. 생티에리의 윌리엄(William of Saint-Thierry, 1075/80/85~1148년)은 “게으름을 피하려고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
이렇게 무의미한 일들은 우리가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겸손과 봉헌된 삶을 위한 유일하고 확고한 토대인 자기 인식을 해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 고독과 침묵에 대한 양성과 여가의 영적 힘에 대한 이해는 세속에서 이와 매우 다른 분위기를 지닌 수도원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하다. 적절한 고독의 순간을 유익한 활동으로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나중에 위기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6. 렉시오 디비나와 기도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Lectio Divina and Prayer)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렉시오 디비나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인터넷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에는 독서 습관도 포함된다. 뇌는 면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DNA는 유지되어 있지만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뇌는 변한다. 인터넷이라는 환경에 노출된 뇌의 신경 경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니콜라스 카(Nicholas G. Carr, 1959년~)는 많은 인터넷 사용자들의 뇌가 전자 매체에 적응하면서 책을 읽는 경험이 급격하게 변했다고 지적하면서 “인터넷의 보급이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분석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었고, 뇌는 이에 맞춰 변화할 것이다. 그런 변화는 사색, 암기, 반복을 통해 발전하는 장기기억에 반反하는 변화이며, 이로 인해 인간은 더 생각하지 않게 된다.”라고 주장한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한 주제가 점진적으로 깊게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참을성을 잃어가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 카Carr는 “영구적인 주의력 결핍이나 산만 상태”를 이야기한다. 현대인에게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기존의 명상이나 묵상 방식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고대의 독서법을 되돌아보며 Carr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일련의 인쇄된 페이지를 읽는 것은 독자가 저자의 말에서 얻은 지식뿐만 아니라 그 말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지적인 진동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조용한 공간에서 책을 오래도록 방해받지 않고 읽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추론, 비유를 통해 책의 내용을 자신과 의미 있게 연결했습니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키웠습니다. 그들은 깊이 읽으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Nicholas Carr, 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
모든 관계자가 이 어려움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렉시오에 입문할 때 읽기 기술을 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읽고 있는 내용의 단어, 구절, 문장 하나하나에 깊이 관여하여 모든 요소를 음미하고 텍스트가 마음에 메아리를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도를 늦추고 속독을 선호하는 자세를 자제해야 한다. 이를 위한 좋은 방법이자 다른 이점도 있는 방법은 책을 읽을 때 조용히 소리 내어 읽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텍스트가 두 번째 경로(청각)를 통해 인식된다. 이것은 지속적인 독서에 대한 만성적인 불안감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7. 청빈에 대한 양성(Formation of Frugality)
청빈이라는 개념은 프란치스코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질적 재화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되는 것은 대부분의 영성 운동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며 개혁을 위한 모든 노력의 일반적인 목표이다. 우리가 가난이나 물질적 부족보다는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허락된 범위 내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더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돈 보스코는 살레시오회가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빈은 많은 수도자가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종종 스캔들을 일으켰던 분야이다.
오늘날 수도 생활에 입문하는 많은 이들이 풍요로움에 젖어 평생을 보냈을 것이다. 기존의 수도자들은 입문자들에게 그들의 소비주의 습관을 깨도록 장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도록 리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인 만족을 물질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12단계의 겸손 중 여섯 번째 단계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겸손의 여섯째 단계는, 수도승이 온갖 비천한 것이나 가장 나쁜 것으로 만족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을 나쁘고 부당한 일꾼으로 여겨 예언자와 함께 “나는 쓸모없는 자이오며 알아듣지도 못하였나이다. 나는 당신 앞에서 짐승과 같은 처지오나 늘 당신과 함께 있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베네딕토 성규, 7,49-50)」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항상 만족할 것이다.
8. 정결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Chastity)
혹자는 수도회에 따라 각 수도회가 특징을 보이는데, 예수회는 순명, 프란치스코회는 청빈, 살레시오회는 정결/순결(chastity/purity)이 그들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속설이 있다. 정결에 대한 수도자 양성의 목표를 두고 베네딕토 성인은 이를 잘 표현한다. 그에게는 수도자들이 “정결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하지만 살레시오회 회원으로서 정결/순결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정결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정결이 곧 독신이라는 의미는 아니며, 정결하다는 것이 곧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부부생활을 하는 많은 부모님 중에도 매우 정결한 분들이 계시며, 그분들에게는 따뜻한 가족이 있고, 이는 그들이 성관계를 통해 가족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결과 순결은 일차적으로 성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경험의 적절성에 관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결/순결은 경건함이다. 그리고 죄는 불경건함이다. 정결하다는 것은 사람, 사물, 장소, 오락, 우리 삶의 단계, 그리고 성을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정결하다는 것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정결하다는 것은 경건하게 사물을 다루는 것이다. 사물은 그런 방식으로 경험되어, 그 경험이 사물과 우리 자신을 덜 통합된 상태가 아니라 더 통합된 상태로 남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 생리적, 정서적, 미적, 성적 경계를 넘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정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급함, 불경건함,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을 망치지 않을 때 정결하다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우리가 성급하게 또는 경솔하게 경계를 넘을 때,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정체성을 약화시킬 때, 그 신성을 더럽힐 때, 우리의 정결/순결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결/순결은 존중, 경건, 인내이다. 그 열매는 통합, 감사, 기쁨이다. 정결의 결여는 조급함, 불경건,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 열매는 영혼의 붕괴, 비통함, 냉소를 동반한다.
우리 모두 정결이 수도 생활의 필수요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결을 두려움과 억압이 아닌 성숙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결에 대한 진정한 접근 방식은 인간으로서 성적 욕구, 친밀감 욕구, 생식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면서 시작한다. 따라서 정결한 삶에서 인간적인 성취와 충족감을 찾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하고 고귀한 일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정결은 열렬한 기도 생활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국 베네딕토회의 리차드 사이프(Aquinas Walter Richard Sipe, 1932~2018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5년 동안 독신 생활을 연구하면서 저는 독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다는 기본 규칙에 대한 예외를 단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면 독신 생활에 실패하게 됩니다. 독신 생활의 어느 지점에 있든, 독신 생활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오늘부터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Celibacy: A Way of Loving, Living and Serving)」
9. 진실함(투명성)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Truthfulness/Transparency)
많은 양성책임자는 자신이 담당하는 이들이 항상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오늘날 사람들은 인터넷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인터넷은 진실을 작은 크기로 잘게 쪼개어 놓는다. 각 조각은 여러 다른 각도에서 다른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대주의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진리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건이 현재의 사고에 부합하는 의미로 재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며, 영구적인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둘째, 수치심에 기반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은 돌아올 대답이 예상되거나 칭찬받을 가능성이 있는지 알기 전까지는 직접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답변으로 질문자를 기쁘게 하고 싶어 한다. 무엇이 정답인지 확신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가끔’, ‘아마도’와 같은 단어로 답변을 한정하려 든다. 이런 식으로 질문자가 주는 단서에 따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사람들이 공개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숨기고 있을 때 발생한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진실하지 않음에 연루된 사람들은 스스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책임자들은 따뜻한 수용과 긍정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진실하지 못한 경향을 방지할 수 있다. 비판적이지 않아야 한다. 몸짓으로 충격이나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아야 한다. 비밀을 보장하면서 피 양성자가 신뢰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10. 신앙에 대한 양성(Formation to Faith)
많은 축성생활자는 수도원에 오기 전 문화 속에 내재하는 무신론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무시하는 풍조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축성 생활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행동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엄격한 도덕의식이 장려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에 대한 양성이 윤리나 도덕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수도자 중 많은 사람이 수도원에 오기 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자주 언급했던 ‘죄의식의 상실(The Loss of Sense of Sin)이나 부재’ 상황에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의 윤리적 양심이 얼마 동안 심각할 정도로 흐려지는 일은 종종 있습니다. 본인은 2년 전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화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이 양심의 둔화나 사멸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요한 바오로 2세, 삼종 기도 연설, 1982.3.14) 우리 시대에 이런 위협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공의회가 “인간의 가장 은밀한 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사목헌장 16항)라고 규정한 양심이 “인간의 자유와도 절대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인간의 내적 존엄성과 하느님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그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삼종 기도 연설, 1982.3.14)
감사합니다~요^^
다시 기억하게 해주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