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날로 발전하고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하여 이제 스마트를 넘어 무생물인 기계의 진화와 지능 그리고 윤리까지를 거론하는 시대를 산다. 하염없이 편해지는 시대를 사는 것 같아도 기계와 기술의 발전 덕분에 과연 노동의 양이 줄었으며 편해졌는가를 물으면 답은 ‘아니다!’이다. 편리한 컴퓨터나 자동화 덕분에 노동 시간이 반으로 줄었으니 그만큼 일찍 집에 돌아가 쉴 수 있다고 하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와 기술의 발전을 바라는 인간의 욕구 저변에는 좀 더 쉬고 싶고 간섭 없는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면서 편하게 게을러지고 싶은 갈망이 가득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갈망은 오히려 기계와 기술에 포섭당해 눈을 뜨자마자부터 스마트 기계의 포로가 되게 한다.
800년도 넘는 세월 전,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1224/5~1274년)는 오늘날의 현대 기술과 미디어 사회를 미리 보는 듯 이를 정교하게 묘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계와 그 기계나 기술이 파생하는 문화와 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기계들이 존재할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케디아(ἀκηδία, 나태, 게으름, acedia, sloth, negligence)”라는 개념으로 현대인의 기술 문명사회를 눈으로 보듯이 묘사한다.
사실 ‘아케디아ἀκηδία’라는 말은 ἀ-(없음, 부족, lack of) -κηδία(관심, 보살핌, care)에서 유래하는 수도승들의 오래된 개념이다. 직역하면 ‘관심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수도승들은 이를 ‘영적 태만’, ‘영적 무기력’, ‘정오正午의 악령(“한낮에 창궐하는 괴질” 시편 91,6 참조)’ 등으로 영혼 상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사막의 은수자였던 에바그리오는 은수생활을 하던 이들이 열악한 환경과 오랜 금욕 생활에 따른 심신의 미약 상태, 단순한 일의 반복, 앞날에 대한 불안과 염려, 영성 생활이 크게 발전하지 않는 데서 오는 좌절을 체험하면서 지루함과 무기력, 우울과 낙심으로 기도와 노동, 독서 등을 게을리하거나 은수 생활을 포기하는 모습을 두고 이를 아케디아라고 불렀다.(김인호, 칠죄종, 나태)」
다시 돌아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아케디아는 선善을 향한 영적인 슬픔의 일종(우울, a sorrow for spiritual good)이다. 이러한 슬픔은 영적인 선익善益을 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악으로 보거나 영적인 선익을 얻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여겨 절망하면서 이를 얻는 데 필요한 노력을 포기하고 거부하는 데서 온다.
아케디아는 일곱 가지 주요 악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일곱 악덕은 다른 많은 소소한 악덕을 낳는데, 특히 아케디아는 ‘악의(malice), 심술(spite), 무기력(마음이 없는 상태, faint-heartedness), 자포자기(despair), 굼뜸(sluggishness, 특별히 계명 준수에 있어서), 못된 일을 하고 나서 흔들리는 마음의 방황(wandering of the mind after unlawful things)’이라는 여섯 딸을 낳는다.
그런데 이 마지막 ‘방황’은 또다시 자신의 딸들을 낳고 마는데, 그 방황이 일정한 운율이나 이유가 없이 (산만하게) 그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쫓아다니는 마음 그 자체라면 ‘근심·불안(uneasiness of the mind)’이고, 상상력과 관련이 있으면 (쓸데없는) ‘호기심(curiosity)’이며, 말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면 ‘수다(다변多辯, loquacity)’이고, 몸에까지 영향을 미쳐 처해 있는 장소마저 바꾸도록 하면 ‘초조焦燥(restlessness of the body)’인데, 이때는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도록 하면서 결국 한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유부단(instability)’을 낳고, 이러한 우유부단은 결국 ‘목적이나 목표의 변경(changeableness of purpose)’을 초래한다.(Alejandro Teran-Somohano, The Vice of a Technocratic Age, wordonfire.org, 2025년 1월 1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적인 통찰을 읽다 보면 현대인의 모습이나 상태를 그리는 것만 같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끊임없이 방황한다. 산만함에서 산만함으로 옮겨 다니고, 온라인상에서 클릭과 스크롤을 끝없이 반복한다.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마음을 다잡아 책상에 앉아도 계속 울려대는 전화와 알림음들이 주머니에서, 손목에서마저 불쑥불쑥 방해하고 귀찮게 한다. 모니터를 두 개, 세 개로 확장하여 새 창을 몇 개씩 겹쳐 열면서도 하나의 창에서 다른 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집중력은 떨어지고, 마음은 괜스레 불안해진다. 그러한 불안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나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수많은 광고와 미끼 기사들이 유혹하고 추파를 던지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나의 창작 콘텐츠마저 수정하라고 강요하며, 심지어 어떤 이는 내 창작물에 댓글을 빙자하여 슬며시 자기 숟가락을 얹는다.
현대의 기술 문명은 인간을 아케디아에 흡수되도록 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의지 탓인 양 교묘하게 핑계를 대는 영특함마저 갖췄다. 과연 인간이 기술 문명을 잘못 흡수한 탓일까, 아니면 기술 문명이 그렇게 설계되어 만들어진 탓일까?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카 10,42)이라는데, 이를 놓칠까 또 불안해진다.
아케디아는 영적인 선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그 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오히려 더 큰 선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인다. 참된 선에 대해서 태만하게 하며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들에 맹목적으로 달려들게 만든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분주함을 가장假裝한 아케디아이다. 최고의 선이 아닌 것들에 매달리게 되면 인간에게 결국 진정한 쉼이 없다. 아케디아에 물든 이는 사랑하고 다른 이를 생각하는 열정에 무능력해진다. 이러한 사랑의 무능력은 자기애가 강해 자신만을 사랑하고, 사랑 아닌 자신만의 사랑을 위해 타인을 착취하고 이용하며, 자신을 타인에게서 고립시키며, 자신의 공허함을 우울함이나 슬픔을 통해 드러낸다.
아케디아에 사로잡힌 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즐기는 한량형, 사고와 행동 및 정체성의 일관성이 떨어져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열형, 의무와 책임은 외면하고 안락한 둥지에만 처박히는 둥지형, 문제와 주변의 요구를 외면하는 방관형,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두려워 모든 것을 하려 드는 분주형으로 나뉜다.(김인호, 경향잡지, 2019년 3월호)」(*이미지-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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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용문 영어 본문: 「St. Thomas Aquinas: Acedia is a “sorrow for spiritual good,” a sorrow that comes from either not thinking of spiritual goods as good and thus sorrowing because they are perceived as evil, or from being discouraged by the difficulty of attaining them and refusing to do the work needed to acquire them. Acedia is one of the seven capital vices. These are called capital because they spawn a host of others. In the case of sloth, Aquinas calls the offshoots six daughters: “malice, spite, faint-heartedness, despair, sluggishness in regard to the commandments, wandering of the mind after unlawful things.” This last one has daughters of its own:
This tendency to wander, if it reside in the mind itself that is desirous of rushing after various things without rhyme or reason, is called “uneasiness of the mind,” but if it pertains to the imaginative power, it is called “curiosity”; if it affect the speech it is called “loquacity”; and in so far as it affects a body that changes place, it is called “restlessness of the body,” when, to wit, a man shows the unsteadiness of his mind, by the inordinate movements of members of his body; while if it causes the body to move from one place to another, it is called “instability”; or “instability” may denote changeableness of purp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