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다’해(루카 1,1-4;4,1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by Maria Cavazzini Fortini, 2019년

신약성경에서 루카복음 1,1-4 그리고 사도 1,1-5에만 서문(헌사獻辭)이 있는데,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루카복음의 서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머리말을 두어 자기가 기록하는 복음의 주제와 집필 방법 및 목적을 명시한다. 루카는 당대 그리스 작가들의 관례에 따라 집필 대상과 선례, 내력과 동기를 밝힌다. 복음의 뒷 대목인 4,14-15절은 갈릴래아에서 벌인 예수 활동의 집약이고, 이하 16-21절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신 대목이다. 루카 복음에서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고 자라신 고향의 회당에서 이루어진 정례 집회에 참석하시어 성경 말씀을 읽으시고 그 완성을 선포하신다.

마태오, 마르코가 모두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루카는 복음사가 중 유일하게 이방계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상당히 교육을 받은 사람, 아마도 의사였을 것이고, 2차, 혹은 3차의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동행한 후 복음서를 집필하였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다. 그는 이방계 그리스도교인들을 대상으로 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하면서, 예수님의 전기를 쓰려고 하기보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밝히고자 했고, 그분을 왜 우리의 왕이요 주님으로 받들어 모셔야만 하는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1.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한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기록해가면서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루카는 하느님 앞에서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루카 1,1)이 전해 주었다는 내용, 곧 자기보다 앞서 예수님과 함께 “줄곧 동행”하고 가깝게 지내면서(참조. 사도 1,21-22) 이를 기록으로 남겨 복음을 기록했던 이들의 권위를 존중해야만 했다. 또한 루카는 복음을 기록하면서 그 대상을 그리스도교인으로 삼고, 이미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그 믿음을 키워가고, 믿음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말씀으로 이를 기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루카는 이른바 ‘세 번째’ 복음을 사도들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과 감수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기원후 85~95년경 희랍말을 알고 있는 이들을 위해 복음을 써 내려갔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네 가지 기억에 의해 네 목소리로 부르는 4중창이면서도 사람이 되신(참조. 요한 1,14)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노래이다.

『루카복음의 서문(루카 1,1-4): 본문은 네 단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저 ① 역사적 사건들이 나오고(1,1), 다음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믿음으로 해석하는 그리스도인 ② 공동체와 목격 증인들이 기억해서 후대에 전해주며(1,1-2), 이렇게 전승된 기쁜 소식들을 ③ 엮어 기록한다는(1,1.3) 이야기가 있고, 마지막으로 이 기록의 ④ 수신인들에 관한 이야기가(“존귀하신 테오필로스님” 1,3-4) 나온다. 한 복음서가 작성되기까지의 역사라 할 앞의 세 단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주석과 역사의 비평(생긴 사건들을 다룸), 그리고 본문비평문학비평(복음서들의 편집과, 편집되기 이전의 역사)의 임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일단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것이 오늘의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해석’의 임무이다.(엔조 비앙키, 영적 성경 해석, 이연학 옮김, 분도출판사, 2019년, 148쪽)』

2.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루카는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매우 조심스럽게 증언한다. “말씀은 하느님”(요한 1,1), 곧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성령은 『서로 나뉠 수 없는 동반자(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329/330~379년)』이시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곳에는 성령께서도 항상 함께 계신다. 복음의 첫 장들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과 관련하여 그 아드님이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고(참조. 루카 1,35), 세례자 요한의 제자이신 그 아드님께서 공적으로 대중 앞에 등장하실 때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르단 강물에 잠기셨는데, 이때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셨다고(참조. 루카 3,22) 기록한다.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신(루카 4,1)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2) 이렇게 시종일관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고 예수님을 동반하신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광야의 유혹 후에)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루카 4,14)라고 오늘 전례 복음 후반부의 첫 구절이 시작한다. 예언자요 세례자인 요한을 따라 멀리 광야로 나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당신의 고장 “갈릴래아”로 돌아오신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을 통해서 루카는 예수님께서 내적인 원천이자 하느님 아버지의 숨이신 “성령”으로 깊이 충만하셨음을 강조하려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여느 예언자들처럼 일시적으로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예수님 안에 거하시며, 예수님께 “머무르시고”(요한 1,32.33), 하느님의 스타일과 하느님의 행동에 참여하는 힘(역동, 뒤나미스, δύναμις, dýnamis≠권력)으로 채우시기 때문이다.

변방이요 불결하게 여겨지는 땅,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 이사 8,23)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 칭송을 받으셨다.”(루카 4,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예루살렘도 아니고 성전도 아닌 곳, 하느님을 믿는 보통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평범한 마을의 “회당들”을 선택하신다. 사람들은 늘 안식일에 회당에서 모여 기도하였는데, 토라(히브리어: תּוֹרָה, 율법, 통상 모세오경으로 알려지는)에서 발췌한 성구나 율법서를 낭독하며, 시편을 노래로 기도하고, 말씀을 해설하거나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무작위로 열고 우연히 발견하는 대목(히브리어, 하프타라, הפטרה, haftarah)을 선포하곤 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주일에 드리는 예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복음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서른 살쯤”(루카 3,23) 되셨지만, 사제 가문에 속하지 않으셨으므로 사제가 아니라 “열두 살”(참조. 루카 2,41-42)에 이르러 누구나 공개적으로 말씀을 읽고 해설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스라엘의 아들이자 ‘율법의 아들’이라는 보통 유다인의 신분으로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신다. 안식일 예배순서는 대체로 『신명 6,4-9;11,13-21 민수 15,37-41을 합친 신조-18조항의 기도문-모세오경의 독서-예언서 독서-설교(평신도도 가능)-가난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모금-축복』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회당”이 성전을 대신하는 지역 성전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희생제물이 바쳐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전에만 사제가 있고 회당에는 사제가 있을 수 없었다. 회당은 말 그대로 대중의 집회 장소로서 안식일을 지내기 위한 장소이고, 또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함께 모여 의논하기 위한 장소이거나 연령이 낮은 어린이들이 성서를 통해 읽기 쓰기를 배우는 장소였다. 회당은 모든 마을에 하나 이상씩 있었고, 모세오경이나 예언서를 보관하기 위한 특정 장소나 함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밤낮으로 우리 감실 등처럼 등이 켜져 있었다. 또한, 말씀을 읽거나 풀이하는 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신앙을 키워왔고)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독서대에 오르시어)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그 안식일에 읽기로 되어있던 제2독서로서 이사야서 제61장)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루카 4,16-17) 이사야 예언서의 바로 이 부분은 익명의 예언자가 자기의 소명과 사명을 스스로 증거하고자 하는 대목에 해당한다. 고대 수도자들의 전통은 이 장면을 마치 예수님께서 수련을 마치시고 첫서원을 하고 나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하신 장면에 비겨 이해하기도 하였다.

3.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오늘 이 성경 말씀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에크리센, ἔχρισεν, échrisen, 참조. 사도 4,26;10,38 히브 1,9 2코린 1,21)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참조. 이사 61,1-2a ; “은혜로운 해” 곧 “희년”에 관해서는 레위 25,8-13 참조) 2025년 올해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표어로 “희년禧年”을 보내고 있다. 주님의 메시지는 참으로 해방, 치유, 희망의 메시지였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물질주의, 소비주의, 개인주의, 무한 경쟁주의의 노예가 되어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한편 이사야가 소개했던 이 익명의 예언자는 누구였고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도 고대하던 그는 언제 오는 것일까? 이사야서의 내용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들이 생긴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서는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루카 4,20) 이에 예수님께서는 읽으신 예언의 말씀을 두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는 단 한 문장만을 말씀하신다.

오늘”(세메론, Σήμερον, sémeron)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며 바로오늘”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날은 항상 “오늘”이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그 자리에서 그 말씀을 이루신다. 지체할 시간도 없고 벌어질 공간도 없는 바로 “오늘”이다. 루카는 ‘하느님의 오늘’에 관한 신학을 설파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루카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을 통해서 12번 정도 의미 깊은 “오늘”을 기록한다. 그중 새겨볼 만한 내용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로 시편 2,7을 인용한다는 전제 아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루카 3,22)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서)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2-33)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며)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5.9)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며)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34.61) “(십자가 위에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는 죄수에게 구원을 알려주시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시편 95,7ㄹ) 하는 말씀처럼 “오늘”은 항상 우리 각자가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도록”(시편 95,8), 그래서 그분 약속이 현실이 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날이다. 힘과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 8,8 참조. 마르 4,9 마태 13,9) 하고 항상오늘에 울려 퍼진다. “오늘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또 거부한다. 그에 따라 “오늘” 우리의 생명과 죽음이 결정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항상 바로 “오늘”에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26) 하고 외친다. 그리고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우리는 ‘오늘 다시 시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끝이 없는 시작을 통하여, 시작 안에서, 시작의(니싸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y of Nyssa, 대략 335~395년경)』 삶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경이 알려주었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예언자이시지만, 당신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잘 살펴 알아듣고 이해하여 이를 참된 복음으로 받아들이도록 개별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언자이시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시지만, 그저 기름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으로 성별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정의, 곧 복음을 기다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온갖 권력에 짓밟힌 이들을 해방하며, 눈먼 이를 보게 하고, 온갖 악에 짓눌리는 이들을 풀어 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 자비의 때, 하느님 은총의 때를 선포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표징과 말씀으로 시작하신 예언적인 사명이지만, 이 사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땅의 역사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도 맡겨진 사명이다. 아직도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고, 억압받는 이들과 갇힌 이들이 한탄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마저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암울하고, 예수님의 약속된 예언이 절대 이루어지거나 실현되지 않을 약속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행하신 말씀의 전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앉아있고 듣고 있는 말씀의 식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독서자와 해설자만을 위하여 있는 말씀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말씀을 살아내고 실현하며 성취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렇게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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