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대축일 밤 미사 ‘다’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루카 2,12) 2021년 자정 미사 *사진 출처-바티칸 뉴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칩니다. 한 천사가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 주위를 비추며 마침내 몇백 년을 두고 기다려온 소식이 들립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천사는 이어서 뭔가 놀라운 소식을 알립니다. 천사는 목자들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한 아기, 극도로 가난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바로 그 표징입니다. 더이상 밝은 빛이나 천사들의 합창은 없습니다. 오직 한 아기입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일 뿐 그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길: 작음

복음서는 이러한 대조를 강조합니다. 복음서는 초대 황제의 위엄으로 칙령을 내려 온 세상이 호적등록을 하도록 한 아우구스토 황제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참조. 루카 2,1) 그러나 그 말 다음에는 즉시 전혀 웅장함이 없는 베들레헴으로 우리를 안내하는데, 그곳에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가난한 아기와 목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작디작은 미소微小(piccolezza, littleness)이 있는 바로 그곳이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위엄을 드러내시지 않고 자신을 낮추셔서 비천함과 미소함 안에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진정 중요한 것으로 돌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이 바로 ‘작음’이라는 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유 장식 앞에 서서 우리는 모든 아름다운 조명과 장식을 넘어 무엇이 핵심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아기를 바라봅니다. 이 작음 안에 하느님께서 온전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아기가 되신 하느님이십니다.”라는 이 사실을 의식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진리에 놀라워합시다. 우주를 품으시는 분이 누군가의 팔에 안기셔야 할 필요가 있고, 태양을 창조하신 분께서 따뜻함을 느끼셔야 하며, 한없이 부드러우신 분께서 어루만지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분께서 한마디 말도 못 하는 아기이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분께서 받아먹으셔야만 합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신 분께서 집이 없으십니다. 오늘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하느님께서 작음 안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위엄이 작음 안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어봅시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도전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눈으로 보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저 작은 모습으로 만드시는데, 우리는 세속적인 눈으로 그저 크고 위대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는 커지려고만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 중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목자들을 찾으시는데, 우리는 눈에 띄고자 하고 보이는 것만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고자 태어나셨는데, 우리는 평생 성공만을 쫓아다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힘과 권세를 찾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드러운 사랑과 내면의 작음을 요청하십니다.

작음의 은총

성탄절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 저희에게 작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십시오. 작음이 진정한 위대함의 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작음의 은총(la grazia della piccolezza, the grace of littleness)’입니다. 이러한 ‘작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선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의 작은 것들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상, 우리가 매일 집에서나 가정에서, 그리고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하는 일들 속에 들어오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비범한 일을 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은 엄청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삶의 작은 것들을 재발견하고 소중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작은 것들 안에 계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거창한 것에 대한 욕구를 그만둡시다. 우리의 불평과 어두운 얼굴을 치워버립시다.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욕심들을 내려놓읍시다! 작음과 놀라운 작은 아기, 이것이 바로 메시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초라함

다른 것도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일상사의 작은 것들 안에만 오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우리 자신의 초라함 안에도 오시고자 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약함과 취약, 부적절함과 심지어는 ‘엉망’인 부분이라고 느끼는 체험 안에도 오시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약 베들레헴에서 밤의 어두움이 여러분을 덮쳐 온다면, 또 차가운 무관심에 에워싸여 있다고 느낀다면, 내면에 품고 있는 여러분의 상처가 “너는 보잘 것 없어. 너는 별 볼 일 없어. 너는 절대 네가 원하는 식으로 사랑받을 수 없어.”라고 외친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느낀다면, 오늘 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단다. 너의 왜소함이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너의 실패들이 나에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내가 그러한 너를 위해 작은 자가 되었다. 너의 하느님이 되기 위해 내가 너의 형제가 되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야, 나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 안에서 너의 위대함을 다시 찾아라. 내가 네 곁에 있다. 오직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나를 믿고 네 마음을 나에게 열라는 것뿐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미소한 이들

작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미소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품어 안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가장 작은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난 안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다. 이 사랑의 밤에 우리는 단 한 가지의 두려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것, 우리의 무관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두려움만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며, 언젠가 그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천국에서 환영해줄 것입니다. 어떤 시인은 “(이미) 아래에서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위에서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Who has found the heaven – below – Will fail of it above.)” (E. 디킨슨, 시詩, P96-17) 천국을 잃지 맙시다. 지금 예수님을 보살핍시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쓰다듬읍시다. 그들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들

우리는 다시 한번 구유를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정확하게 가난한 이들과 미소한 이들에 에워싸여 계셨음을 봅니다. 바로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은 가장 단순한 사람들이었고 주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이라는 기록처럼 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일 때문에 있었고 가난해서 그곳에 있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의 생활 계획이나 시간표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양 떼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곳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보살피는 양 떼의 필요에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그런 사람들 곁에서, 변두리의 잊혀진 사람들 곁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시험당하는 곳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제된 사람들을 고귀하게 하시려고 오시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먼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높은 교육을 받고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밤 노동의 고단함이 지닌 존엄성을 찾아주고자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노동으로 존엄성을 부여하시고, 뿐만아니라 인간의 노동에 존엄성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합니다. 인간은 노동의 노예가 아니라 그 노동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생명의 날에 ‘인간의 일터에서 다시는 죽음이 없기를!’이라고 반복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투신합시다.

동방박사들

마지막으로 구유를 한 번 더 바라보면서 주님을 경배하러 먼 길을 온 동방박사들을 봅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목자들, 배운 자들이나 부자들, 박사들까지 모두가 어우러져 있음을 봅니다. 베들레헴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있고, 동방박사들처럼 경배하는 이들도 있으며, 목자들처럼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 살아계시는 분이 중심에 계실 때 모두가 하나를 이룹니다.

베들레헴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베들레헴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원천으로 돌아갑시다. 믿음의 본질, 우리의 첫사랑, 경배와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함께 가는 교회, 여행하는 교회로서 순례길에 있는 동방박사들을 바라봅시다. 그렇게 베들레헴으로 갑시다.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계시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 있는 그곳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자리를 잡으시고 경배를 받으십니다. 그분과 가장 가까이에 가난한 이들이 있고,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모든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형제애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형제적인 교회로서 우리의 찬미를 받아주시기를 빕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에게 성가정, 목자들, 동방박사들, 여행 중에 있는 모든 이들을 보여주는 성탄절 복음에 순명하면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인생 자체가 순례이니 그렇게 합시다. 일어섭시다. 오늘 밤 빛이 비치었으니 기억합시다. 아름다운 빛입니다. 우리의 작음 안에서 우리는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5) 하는 말씀처럼 사랑받는 자녀들, 빛의 자녀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함께 기뻐합시다. 그 누구도 이 빛,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예수님의 빛을 꺼트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21년 12월 24일 금요일, *중간 소제목들과 굵은 글씨는 원문에 없으나 임의로 삽입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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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EMNITY OF THE NATIVITY OF THE LORD

In the darkness, a light shines. An angel appears, the glory of the Lord shines around the shepherds and finally the message awaited for centuries is heard: “To you is born this day a Saviour, who is Christ the Lord” (Lk 2:11). The angel goes on to say something surprising. He tells the shepherds how to find the God who has come down to earth: “This will be a sign for you: you will find a child wrapped in swaddling clothes, and lying in a manger” (v. 12). That is the sign: a child, a baby lying in the dire poverty of a manger. No more bright lights or choirs of angels. Only a child. Nothing else, even as Isaiah had foretold: “unto us a child is born”(Is 9:6).

The Gospel emphasizes this contrast. It relates the birth of Jesus beginning with Caesar Augustus, who orders the census of the whole world: it presents the first Emperor in all his grandeur. Yet immediately thereafter it brings us to Bethlehem, where there is no grandeur at all: just a poor child wrapped in swaddling clothes, with shepherds standing by. That is where God is, in littleness. This is the message: God does not rise up in grandeur, but lowers himself into littleness. Littleness is the path that he chose to draw near to us, to touch our hearts, to save us and to bring us back to what really matters.

Brothers and sisters, standing before the crib, we contemplate what is central, beyond all the pretty lights and decorations. We contemplate the child. In his littleness, God is completely present. Let us acknowledge this: “Baby Jesus, you are God, the God who becomes a child”. Let us be amazed by this scandalous truth. The One who embraces the universe needs to be held in another’s arms. The One who created the sun needs to be warmed. Tenderness incarnate needs to be coddled. Infinite love has a miniscule heart that beats softly. The eternal Word is an “infant”, a speechless child. The Bread of life needs to be nourished. The Creator of the world has no home. Today, all is turned upside down: God comes into the world in littleness. His grandeur appears in littleness.

Let us ask ourselves: can we accept God’s way of doing things? This is the challenge of Christmas: God reveals himself, but men and women fail to understand. He makes himself little in the eyes of the world, while we continue to seek grandeur in the eyes of the world, perhaps even in his name. God lowers himself and we try to become great. The Most High goes in search of shepherds, the unseen in our midst, and we look for visibility; we want to be seen. Jesus is born in order to serve, and we spend a lifetime pursuing success. God does not seek power and might; he asks for tender love and interior littleness.

This is what we should ask Jesus for at Christmas: the grace of littleness. “Lord, teach us to love littleness. Help us to understand that littleness is the way to authentic greatness”. What does it mean, concretely, to accept littleness? In the first place, it is to believe that God desires to come into the little things of our life; he wants to inhabit our daily lives, the things we do each day at home, in our families, at school and in the workplace. Amid our ordinary lived experience, he wants to do extraordinary things. His is a message of immense hope. Jesus asks us to rediscover and value the little things in life. If he is present there, what else do we need? Let us stop pining for a grandeur that is not ours to have. Let us put aside our complaints and our gloomy faces, and the greed that never satisfies! Littleness and the amazement of that little child: this is the message.

Yet there is more. Jesus does not want to come merely in the little things of our lives, but also in our own littleness: in our experience of feeling weak, frail, inadequate, perhaps even “messed up”. Dear sister or brother, if, as in Bethlehem, the darkness of night overwhelms you, if you feel surrounded by cold indifference, if the hurt you carry inside cries out, “You are of little account; you are worthless; you will never be loved the way you want”, tonight, if this is what you are feeling, God answers back. He tells you: “I love you just as you are. Your littleness does not frighten me, your failings do not trouble me. I became little for your sake. To be your God, I became your brother. Dear brother, dear sister, don’t be afraid of me. Find in me your measure of greatness. I am close to you, and one thing only do I ask: trust me and open your heart to me”.

To accept littleness means something else too. It means embracing Jesus in the little ones of today. Loving him, that is, in the least of our brothers and sisters. Serving him in the poor, those most like Jesus who was born in poverty. It is in them that he wants to be honoured. On this night of love, may we have only one fear: that of offending God’s love, hurting him by despising the poor with our indifference. Jesus loves them dearly, and one day they will welcome us to heaven. A poet once wrote: “Who has found the heaven – below – Will fail of it above” (E. DICKINSON, Poems, P96-17). Let us not lose sight of heaven; let us care for Jesus now, caressing him in the needy, because in them he makes himself known.

We gaze once again at the crib, and we see that at his birth Jesus is surrounded precisely by those little ones, by the poor. The shepherds. They were the most simple people, and closest to the Lord. They found him because they lived in the fields, “keeping watch over their flocks by night” (Lk 2:8). They were there to work, because they were poor. They had no timetables in life; everything depended on the flock. They could not live where and how they wanted, but on the basis of the needs of the sheep they tended. That is where Jesus is born: close to them, close to the forgotten ones of the peripheries. He comes where human dignity is put to the test. He comes to ennoble the excluded and he first reveals himself to them: not to educated and important people, but to poor working people. God tonight comes to fill with dignity the austerity of labour. He reminds us of the importance of granting dignity to men and women through labour, but also of granting dignity to human labour itself, since man is its master and not its slave. On the day of Life, let us repeat: no more deaths in the workplace! And let us commit ourselves to ensuring this.

As we take one last look at the crib, in the distance, we glimpse the Magi, journeying to worship the Lord. As we look more closely, we see that all around Jesus everything comes together: not only do we see the poor, the shepherds, but also the learned and the rich, the Magi. In Bethlehem, rich and poor come together, those who worship, like the Magi, and those who work, like the shepherds. Everything is unified when Jesus is at the centre: not our ideas about Jesus, but Jesus himself, the living One.

So then, dear brothers and sisters, let us return to Bethlehem, let us return to the origins: to the essentials of faith, to our first love, to adoration and charity. Let us look at the Magi who make their pilgrim way, and as a synodal Church, a journeying Church, let us go to Bethlehem, where God is in man and man in God. There the Lord takes first place and is worshipped; there the poor have the place nearest him; there the shepherds and Magi are joined in a fraternity beyond all labels and classifications. May God enable us to be a worshipping, poor and fraternal Church. That is what is essential. Let us go back to Bethlehem.

It is good for us to go there, obedient to the Gospel of Christmas, which shows us the Holy Family, the shepherds, the Magi: all people on a journey. Brothers and sisters, let us set out, for life itself is a pilgrimage. Let us rouse ourselves, for tonight a light has been lit, a kindly light, reminding us that, in our littleness, we are beloved sons and daughters, children of the light (cf. 1 Thess 5:5). Brothers and sisters, let us rejoice together, for no one will ever extinguish this light, the light of Jesus, who tonight shines brightly in our world.

One thought on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다’해

  1. 주님의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단다~”라는 말씀에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거 같아 갑자기 무딘 마음이 뛰기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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