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복음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며 마치 또 다른 대영광송처럼 장엄하고도 단순하게 육화의 신비를 고백한다. 물론 공관복음 역시 하느님의 말씀께서 나자렛 사람이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내용을 전한다.
그중 공관복음사가 루카는 그 말씀께서 공개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 전에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 사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노력한다. 루카는 하느님의 사자使者인 천사의 전갈로 “성령께서 (나자렛이라는 고을의 처녀)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게”(루카 1,35) 되었으며, 이로써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아담의 아들이요 당신의 아들이신 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은밀하게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육화요 인간화, 인간 되심이 이루어진다. 마리아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품으심으로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요 말씀이 머무르시는 장막이 된다.
루카에 따르면 “땅 위에 슬기가 나타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바룩 3,38) 한 것처럼, 이렇게 나자렛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세상의 저 끝, 로마에 이르기까지(참조. 루카 2,22.41;9,51;24,47 사도 1,8;28,30-31) ‘하느님 말씀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여행’이 시작한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처럼 빠르게 퍼져나가…”(2테살 3,1)라고 했듯이 복음화의 여행은 이렇게 열렬하게 시작했지만, 가끔은 너무 쉽게 그 시작이 잊히는 경향이 있다. 오늘 복음은 한 시골 여인이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여행 장면으로 시작한다.
1.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준 소식, 하느님의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참조. 루카 1,26-38), 그리고 사촌 엘리사벳 언니가 노년에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뭔가 솟구치는 내적 충동으로 “유다 산골을 향해 서둘러 길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갈릴래아로부터 유다로 며칠이 걸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마리아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루카 1,36) 여인이요 나이가 많은 사촌에게 벌어진 일을 듣고 그녀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그녀에게 벌어진 일을 소상하게 들어보고 천사의 알림을 통해 자기에게도 일어난 기쁜 소식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애덕의 여인이요 선교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마리아가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것에 게을러서도 안 되고 마지못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둘러” 길을 떠났다는 사실을 두고 성 암브로시오(337/340~397년)는 ‘nescit tarda molimina Spiritus Sancti gratia’라고 해설한다. 이는 ‘성령의 은총은 때늦은 도움을 모른다. = 때늦은 수고와 성령의 은총은 맞지 않는다 = 성령의 은총은 (결코, 언제나) 때늦은 수고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한 초조함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혹은 이점에 대해 우리는 (그저 말뿐인) 사람들입니까? 추상적이 아닌, 말로만이 아닌, 구체적으로 우리가 만나고 우리 곁에 있는 형제들! 그들의 필요를 보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갇혀 있습니까? 공동체라기보다는 우리의 (안주와) 안일함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8월 28일 로마에서 성 아우구스티노회의 총회 개막 미사 강론)』
사실 우리의 인생살이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저 해야 할 일로 생각만 하거나 그저 공상으로 꿈만 꾸다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써야 할 편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쓰지 못하고 말았던 편지, 뭔가 인사나 표시를 해야 한다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때를 놓쳐버린 감사, 마땅히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러지 못한 채 결국 영영 남이 되어버리거나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친구…주저와 망설임, 게으름들이 결국은 우리 인생을 조금씩 짓누르게 되거나 실의에 빠지게 하고 만다.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리아가 아론의 자손이자 사제 직무를 수행하다가 천사의 알림으로 아기를 얻게 해달라는 청원이 들렸음을 알게 되었으나 그 말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어 성소 밖으로 나와 백성들에게 축복을 전할 수도 없게 된(참조. 루카 1,5-22)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40) 하느님의 은총과 힘으로 불과 얼마 전 임신한 마리아가 역시 하느님의 은총과 힘으로 아기를 가진지 여섯 달이나 된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반갑게 맞이한다.
두 여인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기를 지닌 여인들이요 어머니가 될 사람들이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이름으로 불릴 선택된 두 아기의 장막이다. 마리아의 아들은 “예수” 곧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으로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루카 1,31-32)이며,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다.(루카 1,35) 엘리사벳의 아들 “요한”은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으로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루카 1,17) 아기이며 태어나기도 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아기였다.
2. “엘리사벳…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기뻐) 뛰놀았다.”(루카 1,41) 마리아가 사촌의 집에 들어가 인사를 건네자마자 연로한 사촌 부부로부터 예상치 못한 반응을 맞는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엘리사벳은 반가운 사촌끼리의 만남을 넘어 “주님의 어머니”를 알아본다. 메시아를 품은 마리아가 인사하자 메시아를 만난 기쁨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가 (기뻐) 뛰놀았고”,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곧 엘리사벳에게 성령이 내렸으며,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의 힘인 것을 알고 “주님의 어머니”를 알아모시는 식별을 하게 하신다. 세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사랑의 방문이자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기 위한 마리아의 방문에서 그녀의 단순한 “인사말” 목소리가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스바 3,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즈카 2,14) 하는 오래된 예언자들의 예언을 불러 깨우고, 엘리사벳에게 성령이 내려오시도록 한다. 엘리사벳의 태중 아기는 즉시 “즐거워 뛰놀며”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의 깊은 내력을 알린다. 이렇게 해서 즈카르야에게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루카 1,15) 하고 알려진 예언이 성취된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요한은 말로가 아니라 “즐거워 뛰놀며” 기쁨의 동작으로 예언을 한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로부터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기와 어머니 간의 교감으로 예언이 이루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진 마리아의 사촌 방문에서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한 대로 예언, 선포,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며 그분 안에서 기뻐하는 요한의 사명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이 “주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모실 때 다윗이 그 궤 앞에서 “뛰며 춤추었듯이”(참조. 2사무 6,12-15) 어머니의 태중에 계시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메시아 앞에서 역시 어머니의 태중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예언자요 선구자가 주님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뛰며 춤을 춘다. 이스라엘의 온 역사와 예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 예언의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었다는 기쁨이요 환호이며 춤을 추는 즐거움이다. 이 모든 일이 두 여인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진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태중에 있는 아기의 뛰놂을 해석할 수 있게 되면서 ‘전례적인 환호’로 “큰 소리로 외친다.” 굳이 ‘전례적인 환호’라고 사족을 붙인 것은 여기서 사용되는 동사가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며 악기를 울리고 함성을 지르는 것과 같은 ‘아나포네오(ἀναφωνέω, anaphonéo)’라는 동사이기 때문이다.(참조. 1역대 15,28;16,4.5.42 2역대 5,13-칠십인역)
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전례적 환호’로 노래한다. 엘리사벳은 잉태 자체를 축복하는 것(참조. 신명 28,4)만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주님”을 고백한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찬송하리라.”(시편 111,1) 하고 시편에서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을 위해 복되신 분이요 복된 땅이시며, 하느님의 결정적인 축복을 충만하게 담으신 마리아의 아들이신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한다.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사라로부터 엘리사벳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구원의 역사 안에는 실로 많은 복된 여성들이 있다. 그렇지만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야말로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과연 모든 세대가 행복하다 하는”(루카 1,48) 여인이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복되시다” 칭송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진정 누구신지를 고백한다. 마치 다윗이 계약의 궤를 마주하면서 “주님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2사무 6,9) 한 것처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하고 당치도 않다는 듯이 놀라 외친다. 주님의 궤가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쉐키나(שכינה, Shekinah 거주·임재)인 것처럼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그렇게 대한다.
교회가 영적인 지성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진정 마리아는 주님을 모신 구원의 배(舟)이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묵시 11,19-2) 하고 묵시록이 암시하는 메시아의 어머니, 바로 그 여인이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라는 고백을 통해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자기의 태胎에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을 알고 있으면서 아울러 마리아께 하신 일이 어떻게 다른지를 안다. 마리아께서 계약의 궤이시며,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몸소 사람의 살이 되시기로 하신 곳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무엇보다도 숨어계신 하느님의 신비이다. 아직 이름도 없는 한 아기 안에 당신을 숨기신 분, 아직 인간의 이름을 취하지 않으신 분, 그러나 장차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름 “예수”라는 이름을 얻으실 분의 신비이다.
동시에 예언의 신비이다. 아직 “소리”를 내지 못하는 배 속의 아기 요한이지만 이미 “오실” 분, 주님을 가리킬 줄 아는 요한, 곧바로 주님에 앞서 선구자로서 사명을 살아갈 것을 알고 있는 요한의 신비이다.
이 모든 것이 아기를 가진 두 여인의 만남과 태胎에서 이루어진다.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를 듣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서로 기뻐한다. 엘리사벳의 말에 ‘마리아의 노래’가 이어진다. 엘리사벳의 고백에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마리아의 노래 시작 첫마디가 라틴말로 마니피캇이므로 이로부터 마리아의 노래 제목이 되었음)이 이어진다.(참조. 루카 1,46-55)
외로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두 여인의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두 여인은 서로를 필요로 했고, 함께 있고 싶었으며, 서로 보호하고, 서로 도우며,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믿음을 더해 준다. 우정(friendship)과 보살핌(care), 그리고 사랑(love)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을 함께한 두 여인은 서로 마주한 두려운 상황의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고, 받았던 은총에 감사하며, 그 감사를 하느님 앞에서 거행한다. 그렇게 둘은 어머니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여 각각 어머니가 된다. 오늘 복음은 메시아에 관한 선사先史 시대 기록이 아니며 바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우리 안에 사람이 되신 분의 역사歷史이다. 이 장면에 성령으로 가득한 두 여인, 주님의 말씀을 믿을 줄 아는 두 여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있다. 아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이룬 위대한 신비, 사랑의 만남의 길을 저 또한 시작하고 싶습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두 분 귀한 어머님들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기꺼이 제게도 오시기를
청해 봅니다.
그분의 오심을…
우정/보살핌/사랑의 단어 아래 표현된 우리의 말과 행동들이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와 눈물의 기억을 만들 때도 있다. 나의 말과 행동들이 혹시 한쪽으로 치우친 내 마음 안에서 생기는 것 때문에 혹시 상대의 뜻 만으로 보여지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게 아닌지…. 나와 상대를 떠난,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기에 성모님과 엘리사벳은 두려움을 기쁨과 믿음으로 바꾸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구나 묵상해 보며, 환희의 신비를 오늘 밤 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