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레시오회에서는 죠반니 바티스타 보렐 신부(1804~1873년)를 공식적으로 ‘살레시오회 협력자’로 호칭한다. 그는 실제로 돈 보스코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조언자였으며 첫 협력 사제였다. 서품 후 5년여가 흐른 1846년 돈 보스코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병에 걸려 고향 집에서 어머니의 간병을 받으며 4개월여 요양을 해야 했을 때, 돈 보스코는 자기의 오라토리오를 보렐 신부에게 맡겼으며, 이는 살레시오회의 초기 정착 과정에 중대한 초석이 되었다. 돈 보스코는 “사제로서 열정적인 가르침, 항상 올바른 조언, 선善으로 나아가게 권면을 주신 분(lezioni di zelo sacerdotale, sempre buoni consigli, eccitamenti al bene)”이었다고 그분을 회상한다. 아울러 보렐 신부는 구수한 피에몬테 사투리로 청소년들을 단숨에 사로잡는 강론의 재능을 지니셨던 분으로 알려진다. 1931년 돈 보스코의 3대 후계자인 복자 필립보 리날디께서 그를 기려 발도코의 오라토리오에 설치한 청동 기념비의 소개 글에는 「신학자 G. 보렐: 돈 보스코께서 ‘담대한 친구요 성인 사제’라고 칭송한 오라토리오 탄생의 협력자이자 은인(1804년 5월 25일~1873년 9월 9일)」이라는 글이 새겨졌다. 돈 보스코와 보렐 신부 간의 관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돈 보스코가 보렐 신부에게 보낸 편지글 3편을 소개한다.(Memorie Biografiche, 제2권 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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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보스코는 심각하게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1846년 8월 초 둘째 주에 요양을 위해 오라토리오에 다니고 있었던 토닌이라는 학생과 함께 조용히 고향 모리알도를 향해 떠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일종의 중간 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카스텔누오보에서 친자노 신부의 배려로 얼마간을 쉰 다음 어머니 마르게리타와 함께 다시 베키 고향집으로 향하는데, 그 상태에서도 돈 보스코는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해왔던 성모 승천 대축일 외부 행렬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가 몹시 궁금하던 편지를 비롯하여 오라토리오의 전반 상황을 부탁드렸던 보렐 신부에게 1846년 8월 22일부터 31일 사이에 세 통의 편지를 쓴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학박사님,
저는 카스텔누오보에 있습니다. 중간에 당나귀에서 나뒹굴기는 했지만, 여행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저의 건강 상태는 아주 좋아졌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없으면서 언덕들을 산책하고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으니 말입니다. 이것들이 며칠 만에 저의 외모와 빛깔을 바꾸게 했습니다. 저는 저의 건강을 위해 협력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진심으로 압니다. 저는 병이 찾아오기 전보다 더 튼튼해지고 건강해졌다고 느낍니다. 동시에 턱 쪽에 느끼던 열과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틴어. Deo gratias)
토리노의 더위도 누그러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들판을 타들어 가게 하고 하느님의 뜻만을 간구하는 가난한 농부들의 한숨과 탄식을 자아낼 뿐인 극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활력을 돋우어주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토닌은 저를 아주 잘 동반해주고 있으며, 저를 무척 기쁘게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신부님과 파키오티 신부님의 손에 얼마나 많은 친구親口를 드려야 할지요.
온종일 오리토리오를 몇 번이나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지난주 토요일에 거행되었을 행렬에 대해 소식을 좀 전해주십시오.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파키오티 신부님, 도시오 신부님, 신학자이신 볼라 님께 각별한 안부를 전합니다. 금방 또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안녕(라틴어. Vale in Domino)! 안녕(Vale)!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종이자 친구(Aff.mo Servitore amico)
돈 보스코
추신: 토닌이 카발리씨께도 편지 내용을 전해달랍니다.
(이 편지를 받은 보렐 신부는 서둘러 답장을 보내 소식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성모 승천 대축일의 야외 행렬에 함께 했던 사제들, 성모님의 성상을 모시고 들판을 가로지르며 ‘아베 마리스 스텔라Ave maris stella-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 성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성모님의 자녀임을 되새겨 행렬했던 아이들의 질서 정연하고도 아름다운 모습, 그러한 모습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을 묘사한다. 이에 돈 보스코는 곧바로 보렐 신부에게 답장을 보낸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학박사님,
귀하의 편지는 저에게 몹시 소중했습니다. 매우 흡족하게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저에게 만일 날개가 있었더라면 즉시 그리로 날아가서 우리 애들과 함께 그 행렬에 참석하고 우리 오라토리오 애들에게 영성체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무척 기뻐했다고 애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오라토리오를 보살피며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계속 지도 편달하여 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저의 건강 상태는 항상 좋습니다. 저 때문에 마음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게으름뱅이가 되는 법(fare il poltrone)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고백성사를 주거나 강론하거나 미사 주례를 하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제가 모두 거절했으니 말입니다. 토닌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시험이 없으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방학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머지는 항상 저와 함께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가 아주 필요합니다. 아직도 (마르케사 후작 부인의) 구호소 제 방에 있는 책들과 함께 토닌의 짐을 좀 보내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달력도 하나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축일인지 평일인지도 모르겠으니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비가 충분히 내려 황량한 들판의 모습이 사라지고 봄 녘 모습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께서 박사님과 파키오티 신부님, 보시오 신부님 등과 함께 하시기(Dominus tecum a Lei)를 빕니다. 치통이 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D.V.S. Car.ma)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종이자 친구(Aff.mo Servitore amico)
돈 보스코
추신: 쥬셉페 카파쏘 신부님께도 제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신학자 보렐 신부는 돈 보스코가 부탁한 세세한 내용을 처리해주었으며 오라토리오 상황도 다시 전해주었다. 돈 보스코는 이에 답장을 보낸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학박사님,
박사님은 (정말이지) 최고이십니다! 박사님의 자상한 편지는 저와 저의 몇몇 친구들에게 아름다운 읽을거리였습니다. 저로서는 오라토리오의 일들이 생각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트리베로 신부가 오라토리오에 투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분께서 너무나도 왕성한 열정으로 우리 애들을 대한다는 점에서는 신부님께서 잘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저로서는 우리 애들 몇몇이 이미 그분을 싫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오라토리오의 모든 면면이 매끄럽게 돌아가기를 빕니다. 신부님께 이곳 헛간의 비둘기 두 마리를 보냅니다. 파키오티 신부님이 싫어하지 않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로서는 닭을 두 마리 보내고 싶어 했으나, 어머니께서 그런 음식은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즉시 먹어야 한다시면서 반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편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인근에서, 많은 얘깃거리를 남긴 한 사람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병을 얻어 의사들로부터 불치병이라는 판단을 받고 나서 신심 깊은 분의 도움으로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와 영성체를 하겠다고 약속하였었으며 하느님께서 그 약속을 기뻐하시며 건강을 다시 주셨습니다만, (낫고 난 다음) 그 약속을 잊어버렸으며 자기 부인이나 다른 이가 주님께 드린 그 약속을 지키라고 경고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건강을 누리다가 지난 토요일 갑작스레 병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고백성사도 하지 못하고 영성체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어제 장례에서는 모두가 이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 작은 책상 옆에 있는 사물함에 있을 성 루이지와 함께 하는 6주(Le sei Domeniche di S. Luigi), 루이지 코몰로(Luigi Comollo), 수호천사(L’Angelo Custode), 교회사(Storia Ecclesiastica)라는 책들을 좀 보내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저의 건강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며칠간 치통으로 고생을 했습니다만, 괜찮아질 것입니다. 포도는 벌써 맛이 들었습니다. 파키오티 신부님과 보시오 신부님께 말씀드려주세요. (물론) 신부님도 생각합니다.……
젠타 그리고 페레이 두 녀석, 피올라가 규칙을 잘 지키면서 사고나 치지 않는지 등을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파키오티 신부님과 보시오 신부님께 안부 전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온 마음으로 제가 말하는 것을 항상 믿으라고 해 주십시오.
아스티의 카스텔누오보, 1846년 8월 31일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종이자 친구(Aff.mo Servitore amico)
사제 죠반니 보스코
추신: 이 편지를 볼라 신학박사님께 전해 주십시오. 리보타(ribotta)를 하러 파세라노로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뜹니다.
(*리보타ribotta는 피에몬테 사투리로 점심이나 친구와 함께 즐기는 축제 같은 것을 뜻한다. 돈 보스코는 때때로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동료들이나 세속 친구들의 초대를 기꺼이 수락했다. 그는 다소 희생이 되더라도 사회적인 편의와 우정의 권리를 존중했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의로운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주님 경외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아라.”-집회 9,16-라는 성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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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ssimo Sig. Teologo,
Sono a Castelnuovo; il mio viaggio andò bene quantunque ben crollato dal somarello. Lo stato di mia sanità ha di molto migliorato; quel mangiare, bere, dormire e non di più, il passeggiare per queste colline, che spirano un’aria pura, fresca; anche in pochi giorni mi hanno fatto cangiar [504] colore e forma. Io conosco veramente la mano di Dio che cooperò alla mia sanità. Io mi sento più forte e più robusto che non era prima di quest’ultima malattia, e nel tempo stesso scomparsa quell’arsura da cui ero nelle fauci travagliato. Deo gratias.
Non so se il caldo siasi anche temperato in Torino: noi respiriamo un fresco veramente vivificatore, e questo, malgrado una siccità che desola tutta la campagna e fa sì che dai poveri contadini non altro intendasi che lamenti e sospiri di miseria, però molto rassegnati alla volontà Divina. Tonin mi fa ottima compagnia e mi tiene maravigliosamente allegro: quanti baci di mano farebbe a Lei e a D. Pacchiotti se potesse averli!
Quante volte lungo il giorno penso all’Oratorio! Me ne dia nuove, e specialmente della processione di sabato scorso. La prego a salutare tutte le persone che hanno con noi qualche relazione, data occasione; donare una stretta di mano a D. Pacchiotti, a D. Dosio, al Sig. Teol. Vola. Le scriverò dì nuovo presto. Vale in Domino, vale.
Aff.mo. servitore ed amico
D. BOSCO.
PS. Tonin la prega di rimettere la lettera inclusa a Cava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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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o Sig. Teologo,”
Mi fu oltremodo cara la compit.ma sua lettera, la quale lessi più volte con molta mia soddisfazione, e L’assicuro che se avessi avuto le ali, avrei fatto un rapidissimo volo per deliziarmi nella processione e nelle comunioni che i nostri figliuoli fecero nell’Oratorio; glielo dica che io ne fui contentissimo. Continui, Sig. Teol. a notificarmi le cose buone e avverse dell’Oratorio, e mi serviranno di dolce trattenimento. Lo stato di mia salute continua sempre in bene; non s’inquieti sul mio occuparmi; saprò fare il poltrone; sono già stato pregato a confessare, predicare, cantar messa, far ripetizione, e a tutti ho risposto: “no”. Tonin ad Ogni ssanti non prende l’esame, epperciò quivi non fa altro che il lavoro delle vacanze; del resto viene sempre meco in giro. Ne ha molto bisogno. La prego di consegnare al latore della presente i [506] fagotti di Tonin, che sono ancora in fu (al Rifugio) mia camera e insieme i libri dello stesso. Favorisca anche di mandarmi un calendario, se no quivi so nemmeno più se sia giorno festivo o feriale. Venerdì e sabato ora scorsi ha piovuto quivi sufficientemente e così fu tolto l’orrido aspetto delle campagne e ridonato un sembiante di primavera.
Un cordialissimo Dominus tecum a Lei, a D. Pacchiotti, a D. Bosio etc. Ho un po’ mal di denti.
D. V. S. Car.ma
Aff.mo Servitore amico
D. BOSCO
P.S. Dia anche nuove di me a D. Caf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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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ssimo Sig. Teologo,
Bravissimo, Sig. Teologo! La sua dettagliata lettera servì a me e ad alcuni miei amici di bellissima lettura. Sono molto contento chè le cose dell’Oratorio progrediscono nel modo che si sperava.
Va bene che D. Trivero si presti per l’Oratorio; ma stia ben attento chè egli tratta i figliuoli con molta energia, e so che alcuni furono già disgustati. Ella faccia che l’olio condisca ogni vivanda del nostro Oratorio. Le mando due piccioni della nostra stalla, i quali credo che, non dispiaceranno a D. Pacchiotti; io invece voleva
mandare due pollastri, e mia madre non ha voluto, perchè intende che questo genere di cibo si venga a mangiare sul luogo dove fu prodotto. Ma di questo parleremo in altra lettera.
Ieri quivi vicino si fece là sepoltura di un uomo che fu soggetto di molti discorsi. In una malattia, data dai medici per insanabile, ad istanza di una pia persona, fe’ vota di una confessione, comunione e di una messa. Piacque a Dio la promessa e gli donò la sanità. Senonchè l’altro dimenticò quanto aveva promesso; e sebbene fosse dalla propria moglie e da altri più volte avvertito a mantener la parola col Signore, tuttavia egli niente adempì. Che vuole mai! Godette egli un mese circa di sanità e sabato scorso venne sorpreso da improvvisa malattia, e l’infelice in poche
ore passò all’eternità, senza potersi nè confessare nè comunicare,
Ieri nell’occasione della sepoltura tutti parlavano di questo fatto.
Faccia il piacere di mandarmi una copia dei libretti Le sei Domeniche di S. Luigi; Luigi Comollo; L’Angelo Custode; Storia Ecclesiastica, i quali troverà nella guardaroba accanto del mio tavolino.
Lo stato di mia salute continua a migliorare; solo da alcuni giorni sono travagliato da’ mal di denti, ma questo secca e poi va via. L’uva è già buona: lo dica a D. Pacchiotti e a D. Bosio; ci pensi anche lei…..
Avrei molto piacere che mi desse nuove di Genta, Gamba, dei due Ferreri e di Piola, se si regolano bene, o se battono la luna ecc.
Saluti i cari nostri colleghi D. Pacchiotti e D. Bosio e mi creda mai sempre quale di tutto cuore mi dico nel Signore
Castelnuovo d’Asti, 31 Agosto 1846.
Aff.mo servitore Amico
Sac. GIO. BOSCO.
PS. Dia questa lettera al Sig. Teologo Vola. Parto all’istante per andare a Passerano a far ribotta.”
Deo grat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