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보스코께서 살레시오회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발도코에서 아이들과 함께 드린 첫 번째 성탄 미사는 1846년이다. 돈 보스코는 열악한 피나르디 헛간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여 이 청원이 수락되자, 아이들에게 영성체와 성체조배에 관하여 설명하고 성가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다. 돈 보스코의 전기 작가 레뮈엔 신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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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대축일은 거룩한 성탄절을 위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우리 거룩한 종교의 모든 신비에 대하여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하느님 말씀의 육화에 관한 자신의 뜨거운 신심을 표현하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장려하고 고무하고자 오라토리오 시작의 그 작은 성당에서 창미사로 거행하는 성탄 자정 장엄미사와 거룩한 영성체를 허락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습니다.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3년간의 허락을 주셨습니다. 돈 보스코는 이 기쁜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했고, 성가대원들을 조직하였으며, 아기 예수를 기리기 위해 몇 곡의 신심 어린 노래를 직접 작곡하기도 하면서 그 초라한 성당을 정성껏 장식하여 준비했습니다. 젊은이들 말고 다른 신자들도 초대하여 성탄 9일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대주교님께서 돈 보스코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성체강복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지만, 이는 감실에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경우에만 거행하였습니다.
많은 애들이 모였고, 돈 보스코는 지극히 사랑스러우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자기의 극진한 사랑을 자기 어린 친구들의 마음에도 심어주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혼자서 9일 기도 동안 다음날 영성체를 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으며, 일하러 나가야 하는 애들을 위해서 아침마다 매일같이 다시 성당에 내려갔습니다. 미사와 성체 분배 후에 애들에게 짧게 강론하였고, 뒤이어 그가 가르친 몇몇 교리교사가 예언서를 노래한 후, 성체강복이 이어졌습니다.
잊을 수 없는 성탄 전야에는 밤 11시까지 고백성사를 주었으며, 이어서 미사를 집전하고 수백 명도 넘는 이들에게 거룩한 성체를 모셔주고 난 다음에, 돈 보스코는 감격에 겨워 울먹이며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저는 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전례가 끝난 다음 어린 애들에게 소박한 간식을 나눠주고 집으로 돌려보내 쉬도록 하였습니다.
겨우 몇 시간의 수면 후에 돈 보스코는 다시 성당으로 돌아와 장엄 예절에 참석할 수 없었던 더욱 많은 이들을 기다려 고백성사를 주고, 두 대의 미사를 더 집전하여 성체를 나눈 후, 이어지는 성탄 축제 기간 일상의 수많은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돈 보스코는 다른 조력 사제가 생길 때까지 혼자서 몇 년 동안을 이런 식으로 성탄 9일 기도와 성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초창기 성탄 축제 시기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나르디씨 집에 결정적으로 오라토리오가 정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오라토리오가 정규적인 운영의 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미래 세대에 주님의 선하심을 전할 수 있는 거대한 건축(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되는 날 돈 보스코는 그를 통해 이루어진 섭리를 두고 “오, 하느님! 저희는 당신의 성전 한가운데에서 당신의 자비를 입었나이다. 오, 하느님! 당신의 이름과 영광이 땅끝까지 이르리이다! 당신의 오른손이 의로움으로 가득합니다!”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Memorie Biografiche, 제2권, 453-454쪽)

*참조: “당신의 오른손이 의로움으로 가득합니다.”(시편 48,11)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시편 118,15) “주님의 오른손이 드높이 들리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시편 118,16) “당신 손을 뻗치시어 당신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십니다.”(시편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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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esta dell’Immacolata Concezione era una preparazione a quella del santo Natale. Grande era la fede di don Bosco per tutti i misteri di Nostra Santa Religione. Quindi per esternare, con più vivo slancio del cuore la sua divozione verso l’incarnazione del Verbo Divino, e per eccitarla e promuoverla maggiormente negli altri, aveva domandato alla Santa Sede la facoltà di amministrare la santa Comunione alla mezzanotte di Natale, nella cappella dell’Oratorio in tempo della solenne Messa cantata. Pio IX gliela concedeva per tre anni. Annunciata ai giovani la lieta notizia, preparò e fece imparare ai suoi cantori una piccola messa e alcune devote canzoncine che egli aveva composte in onore di Gesù Bambino, e intanto addobbava il meglio che potesse la sua chiesina. Oltre i giovani, invitati altri fedeli, incominciò la novena. Mons. Arcivescovo le aveva permesso di poter impartire la benedizione col Venerabile ogni volta che lo desiderasse; ma solo in tali occasioni poteva conservare nel tabernacolo la Santissima Eucaristia.
Grande fu il concorso, avendo istillato nell’animo de’ suoi piccoli amici sentimenti di grande tenerezza verso il Divin pargoletto. Essendo egli solo sacerdote, alla sera dei nove giorni confessava molti che all’indomani desideravano di fare la Santa Comunione. Al mattino scendeva in chiesa per tempo affine di porgere questa comodità agli artigiani che dovevano recarsi al lavoro. Celebrata la Santa Messa, distribuiva la Santissima Eucaristia, quindi predicava, e dopo il canto delle profezie eseguito da alcuni catechisti da lui istruiti, dava la benedizione col Santissimo Sacramento.
La sera poi di quella notte memoranda, dopo aver confessato fino alle 11, cantò una messa, amministrò la santa Comunione a più centinaia di persone e poi commosso fino alle lagrime si udiva esclamare. – Che consolazione! mi par di essere in paradiso! – Terminata la funzione, distribuiva una piccola cena ai giovinetti e li rimandava alle loro case per riposarsi.
Egli dopo poche ore di sonno ritornava in chiesa, aspettando la turba più numerosa che non aveva potuto assistere alla solennità della notte, confessava, celebrava le altre due messe, comunicava e quindi ripigliava tutte le sue molteplici occupazioni dei giorni festivi.
A questo modo per più anni si celebrò la novena e la festa del Santo Natale, fintanto che don Bosco non ebbe in casa altri preti.
Ma queste prime feste Natalizie rivestirono un carattere speciale indimenticabile, perché segnarono come la definitiva presa di possesso della vaticinata casa Pinardi, essendovi ogni cosa ormai ordinata pel regolare svolgimento dell’Oratorio; e confermarono le promesse dei futuri vasti edifici che avrebbero narrata la bontà del Signore alle generazioni future. Don Bosco in questo giorno al recitare il divino uffizio, pieno la mente de’ suoi disegni, con quale affetto avrà esclamato: – Abbiamo ricevuto, o Dio, la tua misericordia in mezzo al tuo tempio. Qual è il tuo nome, o Dio, tale sia la tua gloria fino agli estremi confini della terra! Di giustizia è ripiena la tua destra!”」(Memorie Biografiche, 제2권, 453-454쪽)
사제로서 아이들의 영혼을 돌보는 돈보스코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영혼을 돌보는일이야 말로 최고의 선이니까요. 저를 돌아보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