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0,46ㄴ-52(연중 제30주일 ‘나’해)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제가 다시 볼 수 있게”(마르 10,47.48.51) by Maria Cavazzini Fortini,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곧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죽음에 이르시게 되는 길을 가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여러 가르침을 주시면서 당신을 따르던 이들과 당신께서 형성하신 공동체 양성 이야기를 오늘 복음으로 마감한다. 마르코복음 10장의 오늘 마지막 대목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축제의 분위기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나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참조. 마르 11,7-11)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마르코는 예루살렘 입성 바로 직전소경의 치유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가시는 고난의 길에 대해눈을 떠야만예루살렘에서 전개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이 복음은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하며 요한복음 9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므로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한다고 할 수 있다.

1.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저에게 자비를

복음상으로 우리는 유다의 동쪽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예리코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마르 10,4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알고 소리를 지른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따를 때, ‘~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 괜찮은 집안이었다가 몰락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도 보살펴주는 이 없이 길거리에 앉아 그저 구걸에 생존을 맡겨야 하는 가련한 처지였다. 눈이 멀었던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었지만, 소문을 통해 갈릴래아의 용한 라삐라는 예수님을 알았고, 그저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이라도 뜨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 속에 살고 있었던 이였다. 바르티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바르티매오의 외침은 극적인 희망과 극적인 절망, 곧 자신의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주님께서 지나가시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사이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다. 바로 여기에 절망과 희망의 연결고리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매달려야 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을 모르거나, 진정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헛것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희망이 충분하게 깊지 못함은 우리의 절망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 말고는 그 어떤 방법이나 묘책이 없다는 의미에서 철저한 절망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출발점이다. 철저한 절망에서 나온 『간절하고도 고집스러운 부르짖음의 갈망이 온갖 장벽을 뛰어넘어 천국 문을 두드리게 된다』라고 성 요한 클리마쿠스(7세기)는 말한다. 무언가를 볼 수 없음은 어쩌면 a)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것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너무나 멀리 있는 상황이기에 b) 우리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눈물을 닦은 후에는 선명히 볼 것 c) 보아도 본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지 때문이다.

바르티매오의 외침 안에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유다인의 믿음이 담겨 있고, 치유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으며, 구원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고, 스스로 외치는 자발성이 담겨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외침에는 소리를 지르고 들으려고 하는 힘이 있으며, 예수님이라는 라삐가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과 치유를 베풀었으므로 자기를 위해서도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이 담겨 있다. 바르티매오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한 내용을 다른 말로 되풀이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베드로는 자기가 고백한 내용,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다는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백하였으므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책망까지 들었던 반면(참조. 마르 8,30-34), 오늘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성경에서 이르는 대로 메시아께서 눈먼 이들을 보게 하신다는 내용(참조. 이사 35,5;42,7)을 이미 아는 듯이 확신에 차서 예수님께 소리를 지른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듯이 예수님과 예수님을 찾는 이들 사이에는 항상 다른 이들이 끼어있다. 예수님께 외치는 바르티매오와 예수님 사이에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10,48) 여기서는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에 끼어있는 이들이 군중으로 묘사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공동체가 예수님께 다가오는 이들, 또 예수님께서 만나고자 하시는 이들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장애가 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예수님을 가로막았다기보다는 선한 동기나 거룩한 동기, 예수님을 보호하고 예수님께 폐弊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 사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려 할 때 그럴 필요가 없다거나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면서 나 자신을 내가 가로막는 내면의 장애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군중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면서 그 외침이 마침내 예수님께 다다른다.

2.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무엇을바라느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마르 10,49)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하는 말은 고통과 죄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시면서 수도 없이 되풀이 하셨던 바로 그 말씀이다. “용기를 내어라”(마태 9,2.22;14,27 마르 6,50 요한 16,33)라는 초대에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루카 8,50)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겼다. “용기”를 내는 것은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첫 번째 태도이다. 용기는 두려움, 충분하지 않은 기대, 내가 감히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일어나다’라는 동사는 에게이로(ἐγείρω, egheíro)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면서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뜻을 담은(참조. 마르 5,41;6,14.16;12,26;14,28;16,6) 중요한 동사이다. ‘인간이 희망으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는’(희망으로 일어선 인간homo spe erectus) 자세이다. 일단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 스스로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되면 주님께서 인간을 하나하나 각별한 사랑과 애정으로 부르시고 있음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눈먼 거지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마르 10,50) “해가 질 무렵에는 담보물을 반드시 돌려주어, 그가 자기 겉옷을 덮고 잘 수 있게 해야 한다.”(신명 24,13)라는 신명기의 내용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겉옷”을 담보물로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해 질 무렵에 돌려주라 한다. 이로 보아서 어쩌면 그 거지의 유일한 재산이자 소외된 사람으로서의 표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그 마지막 것을 눈먼 거지는 “벗어 던진다.” 자기 소유라는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라는 부자(마르 10,21-22)와는 달리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과거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마지막 안전장치까지 과감하게 벗어 던진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자기 발로 서서 “예수님께 간다.” 완전히 자신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과감하게 예수님께 다가간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가 원하는 것을 알고 계셨으나 그를 대충 만나시지 않고 개인적인 깊은 관계로 만나시기 위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으시고,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0-51)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예수님께 또렷하게 말씀드린다. 기도는 예수님 앞에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보기(ἀναβλέψω, anablepsō)’를 청한다. 『‘아나블렙소’는 ‘치켜보다·위를 보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원의에는 단순히 사물과 사람만을 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이 위를 향하는 것, 그러니까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신앙의 눈으로도 바라보기를 원한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바라보기를 원한다.(참조. 안셀름 그륀, ‘예수, 자유의 길’, 157-162쪽)』 그는 자신의 삶 위에 열린 하늘을 보기 원한다. 육체적인 눈으로만 보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보며, 어둠이 아닌 빛 안에서 보기를 청한다.

3.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나시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상태에 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와 소통하시고자 한다. 바르티매오와 만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가 그동안 살아온 처지를 깊이 아시고 그와 말씀을 나누신다. 바르티매오의 청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확실한 어조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마르 10,52)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께 구원을 청하는 많은 이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이다.(참조. 마르 5,34과 병행구. 루카 7,50;17,19;18,42)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으시고 그저 “가거라” 하시며 자기 발로 걸으라고 초대하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들의 온전한 자유로 그들 스스로 움직이게 하신다. 상대방의 온전한 자유와 선택에 맡기는 것,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사람들 안에서 믿음을 끌어내시는 독특한 방식이다. 그 사람 안에 이미 담겨 있는 믿음을 받아들이시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그 믿음을 끌어내는 능력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거나 보게 했다’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다. 인간의 생명이 담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 하느님께서 애초에 모든 사람 안에 담으신 믿음을 보아야 한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하는 말씀을 바꾸어 ‘누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믿지 않고, 그 형제 안에 하느님께서 담아 주신 믿음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해볼 수도 있겠다. 형제를 믿고 형제를 볼 수 있어야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구원하였다” 하신다. 단순히 육체적인 시력을 되찾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온전히 살리셨다 하시고 “구원하였다” 하신다. “곧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예수님을 믿는 이의 “구원”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항구하게) 길을 나서는” 긴 여정이다. 바르티매오는 제자들과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처럼(참조. 마르 1,18;2,14.15;5,37;6,1;8,34;10,21.28.32;11,9;14,51.54;15,41)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참조. 마르 1,17.20;8,33.34) 눈먼 이었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이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오른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가 외쳤던 “다윗의 자손이시여” 하는 외침은 곧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마르 11,9-10) 하는 군중의 외침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환호의 외침을 소리 높여 외쳤던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이 바르티매오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눈먼 바르티매오를 치유하여 주셨다는 이 일화를 그저 또 다른 하나의 기적 사화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주도면밀한 복음 편집과 배치를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여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상징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여정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으나 첫째로 베드로의 무지가 드러났고(참조. 마르 8,32), 둘째로는 열두 사도의 오해와 곡해가 드러났으며(마르 9,34), 셋째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엉뚱함이 드러났었다.(참조. 마르 10,35-37) 예수님의 수난 예고 앞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눈먼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시점에서 눈먼 바르티매오의 외침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예수님의 계시 앞에 눈먼 자들임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르티매오처럼 그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면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만 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려고 고집스럽게 감겨 있는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시라고, 얼굴을 맞대고 보아야 할 이웃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외면하려고 틀어 막혀 있는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시라고, 복음 말씀 안에 살아 움직이는 주님의 현존을 왜곡하려고 고집스럽게 가려진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시라고, 갈라지고 메마른 땅에서 미움과 질시를 먹고 자라 싹을 틔우는 그 독한 잡초들을 식별할 수 있는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외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 눈에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찢어버리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이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매 미사 때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우리가 외치는 외침으로 주님께 외친다. 그런 의미로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바르티매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에 나선 바르티매오는 우리에게 중요한 믿음의 모범이다. 주 예수님 앞에 선 나를 보고 믿음과 기다림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하나하나가 눈먼 이임을 알게 된다. 그저 “용기를 내어 벌떡 일어나”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한다. ‘주님, 자비를!(키리에 엘레이손, Κύριε ἐλέησον, Kýrie eleison)’이라 외치는 우리의 외침이 매우 짧아도, 이 외침이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온전한 신뢰를 담은 기도문임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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