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0,35-45 또는 10,42-45(연중 제29주일 ‘나’해)

“사람의 아들은…섬기러 왔고,…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by 지거 쾨더, 십자가의 길 5-시몬이 함께 십자가를 짊어짐








전교주일을 지내는 곳에서는 http://benjikim.com/?p=11823 에서 별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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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이루어진 직후에 열두 사도 중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특별한 청을 드린다.

마르코가 전하는 바에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장차 받으실 수난을 예고하셨는데, 그 예고 뒤에 매번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반응을 보인 것처럼 전한다. 첫 번째 수난예고 다음에 베드로 사도가 그래서는 안 된다며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마르 8,32)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는 야단을 맞았고, 두 번째 예고 다음에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마르 9,34)까지 벌이다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는 말씀을 들었으며, 세 번째 예고 다음에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고 청하며 은근히 자리다툼을 하기까지 한다. 오늘 복음은 그 세 번째이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제자들의 몰이해는 더 커지는 것처럼 드러난다.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을 이해 못 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탐낸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던 군중들과 제자들의 몰이해는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어진다.

1.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해 주시기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뒤(참조. 마르 10,32-34),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0,35)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터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더불어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었다.(참조. 마르 1,16-20) 어찌 보면 이 네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던 원조이며 원로 격인 제자들이었다.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은 살로메의 아들들인데, 살로메는 아마도 성모님의 사촌이었을 것이다.(참조. 마르 15,40 마태 27,56 요한 19,25) 그렇게 본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고 집안사람으로서 사촌 형제들인 셈이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뭔가 자기들이 특별하고 우대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야고보와 요한이 청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6-37) 겸손하게 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압박을 가하는 구체적 요청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누군가에게 이런 식의 요청 아닌 요청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이런 태도는 인간관계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며 우리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자이고 교회의 사람이니 믿지 않는 이들이나 교회 밖의 사람들인 다른 이들보다도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혹은 그럴 권리가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무의식중에라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2. “내가 마시는 잔내가 받는 세례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인내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르 10,38) 하고 대답하신다.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대답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죄수 두 명이 있을 것을(참조. 마르 15,27) 이미 아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관한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고 있음을 본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빛나는 성공과 권력의 순간으로 보고 있는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수난예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영광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넘겨주시기 위해 사형선고, 조롱과 배척, 그리고 죽음을 받으셔야만 하는 것으로 보시고 있다는 점이다. 한없이 인내로우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진정한 “영광”으로 나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하고 두 형제에게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개념을 빌어(참조. 시편 75,9 이사 51,17.22 등등) 당신의 고통과 제자들이 장차 겪게 될 고통을 상징하는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는 잔”이라 하신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하고 기도하시며 “잔”을 멀리하고 싶으셨던 유혹에 맞서셨던 대목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께서 가신 길을 가고 그분께서 사셨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저항하지 않고 유혹에 맞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고난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들이쳤으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시편 18,5) 하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몸소 그 고난을 사셨듯이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묵시 14,4)도 맞아야만 하는 일이다.

“내가 받는 세례”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세례”라는 그리스어 βάπτισμα, báptisma는 동사 βαπτίζειν, baptízein에서 오는데, 그 어근으로 볼 때 ‘(살짝) 담그다, 잠기게 하다’는 뜻이다. 같은 말씀을 전하는 마태오복음과 달리 마르코만이 삽입한 말로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마 6,3)이라 표현한다. 오래된 옛것이 물에 빠져 물속에 잠기고 죽어 새로운 창조물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하게 ‘너희도 빠져 죽을 수 있느냐?’ 하는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입문의 성사로서 세례성사는 죽음이라는 거센 파도가 우리를 압도하여 빠져 죽게 하는 날까지 죽어가는 삶을 살지만, 그래도 부활의 은총으로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어 영생으로 이끄시리라는 믿음으로 살기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마르 3,17)은 예수님의 질문에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 하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자기들이 했던 그 대답의 크기와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장차 훗날에야 알게 될 것이었다. 마르코복음이 기술된 시기를 기원후 70년경으로 본다면, “헤로데 임금이…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사도 12,1-2)라는 기록으로 보아 형 야고보는 44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고, 동생 요한은 교회의 전승과 기록에 따라서 볼 때 “파트모스 섬”에(참조. 묵시 1,9) 유배된 죄수로서 오랜 세월 고난을 살아야만 했다.

“할 수 있다”라는 형제들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르 10,39) 하시며 그들의 자발성을 담담히 받아들이신다. 그렇지만,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르 10,40) 하신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계획대로 된다고 하신다. 마르코복음과는 달리 마태오복음은 이러한 사건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마태 20,20)라고 하면서 그 형제들의 어머니까지 가세하여 벌어진 사건이라고 기록한다. 이러한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고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질투가 나고 아니꼬우며 자기들이 소외를 당하는 것 같아서)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마르 10,41)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동체 모습 그대로 우리들의 공동체 모습도 그렇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남녀 제자들 역시 “믿음이 없는 세대”(마르 9,19)요 “불신과 완고한 마음”(마르 16,14)을 지닌 자들임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서도 때때로 우리는 하염없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과 정체성에 모순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불러 뽑아 세우시고 몸소 당신의 말씀으로 기르신 예수님의 공동체이면서도 보잘것없고 그저 가난한 공동체이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너져내리고 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인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주저함이 없이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참조. 마르 1,16-20)로부터 복음을 기록하기 시작하더니, 끝내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어떤 젊은이(아마도 마르코 자신)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예수님)를 붙잡자, 그는…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 14,51-52)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했던 공동체의 두렵고도 수치스러운 비극적 현실과 모습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 뽑아 세우신 공동체도 그러한 모습이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이야 오죽하겠는가?

3. “섬기는 사람모든 이의 종

예수님께서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당신 공동체의 열두 제자들을 당신 주위로 “가까이 불러 (세속적 통치나 권력에 빗대어 매우 유익할 교훈의 가르침으로) 이르셨다.”(마르 10,42) “너희도 알다시피(너희가 보면 너희도 알 수 있고 빤히 보이지 않느냐?)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단순하고 강한 명령형으로 ‘너희가 그러면 너희는 나의 공동체가 아니다’ 하시는 듯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세속적 권력을 모델로 삼아 전체주의적인 시스템 안에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통치”나 ‘지배’가 아니다.

한편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세속적 “통치”와 “군림”, 그리고 “세도”를 부리는 이들을 구체적 현실 안에서 그대로 읽어 내고 계시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때로는 정말이지 감탄할 만큼 적절하게 정의를 실행해 나가는 세속 권력과 정부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권력을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고, 세속적인 권력들은 음모와 암투 속에서 서로를 물고 뜯는 어둠의 세력이며, 『첫째 자리를 추구하려는 전염병(교황 프린치스코)』에 감염되어 스스로 부패하고 마는 속성을 지니기 일쑤여서 그러한 권력이 살아남기도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자매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의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고, “첫째”는 “모든 이의 종”이라 하신다. 교회 공동체에는 연공 서열이 없고, 출세나 경력 서열도 없으며, 특권이나 우대 서열도 없고 명예 서열도 없다. 오로지 “섬김의 서열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 공동체의 기초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셔서 모든 이를 위한 대속물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통치하신 적이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기까지,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악행을 일삼는 이들에게 모욕을 당하시기까지, 항상 종으로서 섬기고자 하셨을 뿐이다.

예수님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대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시고자 하신 의로운 종”(이사 53,11)이시다. 이것이 메시아의 영광이요 예수님의 영광이니 곧 그리스도인의 영광이다. 세속적인 인정이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성공을 바라지도 않으며, 오로지 형제와 자매들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를 위한 사랑 때문에 온전한 자유의지로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이의 영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하신다.

오늘 복음은 역사적인 예수님의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교회라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섬김”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통치”와 “군림”과 “세도”, 혹은 공동체의 선익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일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음을 경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한 가지 더 분명히 할 것은 교회 안의섬김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심리적 안정이나 효율적인 복리 증진의 보장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섬김”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형제적인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주인은 주님이시고 공동체의 심장은 주님이시다. 우리 주님께서는 몸소 종이 되시어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 하신다. 아멘!

2 thoughts on “마르 10,35-45 또는 10,42-45(연중 제29주일 ‘나’해)

  1. 전 약간 다른 생각인데.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바라보게 됩니다.
    스승의 역할이란게..

    참 고단하셨겠다.
    말 안듣는 제자들에 대한 인간 예수의 생각?

    섬김
    잘 안됩니다.
    군림이 제겐 더 익숙합니다. 부끄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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