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8,16-20(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나’해)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나 전교주일이므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릴 수 있다.(교황 비오 11세, 자의 교서 Romanorum Pontificium, 1922년 5월 3일, 인류복음화성 총회 결정, 1992년 4월 27-30일) 우리나라는 전교 지역이기 때문에 인류복음화성 총회의 결정에 따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린다.

교회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그리스도의 이 장엄한 분부에 따라, 신자들의 선교 의식을 높이고,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1926년부터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을 ‘전교주일’로 지낸다. 이날 봉헌하는 특별 헌금은 교황청 전교회로 보내져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는데 쓰인다. 한국교회는 이에 발맞추어 신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더욱 일깨우고자 1970년부터 해마다 10월을 ‘전교의 달’로 지낸다. *복음 강해 뒷부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금년도 제98차 전교주일 담화문을 수록하였다.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서 취하는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모여 온다”라고 말한다. 마땅히 전교주일의 전례를 의식해서 선택된 독서 말씀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라고 역설한다. 세상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 믿음을 얻어야 한다는 전교주일의 취지에 맞는 말씀이다.

오늘 복음은 ‘가’ ‘나’ ‘다’해 모두 전교주일의 복음으로서는 같다. 또한, 이 복음은 ‘가’해의 주님 승천 대축일과 ‘나’해의 삼위일체 대축일의 복음이기도 하다. 전교주일에 읽는 오늘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것 ②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 그리고 ③ 예수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것 등을 당부한다.

1. “열한 제자갈릴래아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

전교주일에는 마태오복음의 대종장에 해당하는 구절들을 복음으로 취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에 따라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마태 28,16) 배반자 유다가 빠진 “열한 제자”이다. 아직 마티아 사도가 뽑히기 전이다.(참조. 사도 1,12-26) 완벽한 숫자인 ‘열둘’에서 하나가 빠진 숫자이다. 그러나 이 ‘불완전’이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태 26,32)”하고 약속하신 적이 있고, 또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신 적이 있다.(참조. 마태 28,7.10) 그래서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왔다가 이제 다시 “산으로 갔다”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고(마태4,12-17), 이제 같은 땅에서 제자들을 시켜 세계 만민을 상대로 하는 전도를 시작하신다. 갈릴래아 지방은 유다 지방과 달리 이방인이 많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예수님과 제자들의 전도 시작이 갈릴래아로부터인 것은 상대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 말고도 이방인들에게까지 즉, “모든 민족들”(19절)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갈릴래아”의 발현 사화를 읽으면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복음을 기술하였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예수님의 전도나 사도들의 전도를 배척하였으므로 사실상 이스라엘 전도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음을 생각할 것이다. 갈릴래아는 예수 친히 전도를 시작하신 곳(마태 4,17)이고, 첫 번째 어부 네 사람을 불러 제자 삼으신 곳(마태 4,18-22)이며,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전도하시던 곳(마태 4,23)이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하는데, 여기서 “산”은 어느 산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산과 언덕이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상징적인 장소에 불과하다 할 수도 있다. 마태 4,8에 나오는 유혹의 산과 마태 5,1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산, 그리고 마태 17,1에 나오는 변모의 산을 참조할 일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가게 하시면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모세가 느보 산에서(참조. 신명34장) 약속의 “온 땅”을 내려다보았듯이 그렇게 당신 제자들이 만들어나갈 미래 하느님의 나라와 교회를 내려다보신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마태오 복음에서 “경배”라는 말은 동방박사의 경배(마태 2,2.8.11),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며 요구한 경배(마태 4,9.10)를 비롯하여 “엎드려 절하다(마태 8,2;9,18;14,33;15,25;18,1;20,20;28,9)”와 같은 말로서 이곳 제자들의 “경배”를 비롯하여 13회나 반복된다. 다른 공관 복음에 비겨 마태오 복음에서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쓰인다. 이런 말이 마르코 복음에서는 2회(마르 5,6;15,19), 루카 복음에는 3회(루카 4,7.8;24,52) 나온다. “더러는 의심하였다”에서 “의심하였다”는 말은 영어로 hesitate 혹은 doubt로 번역되는 말이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왜 의심하느냐?”(마태 14,31)하고 꾸짖으신 적이 있지만, 당신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루카 7,23)” 하셨고, “의심하지 않으면…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마르 11,23)이라고도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사례는 루카 24,37-38 요한 20,24-27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활에 대한 의심은 결국 미움과 불의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승리를 믿지 못하고 억압과 죽음에 대한 자유와 생명의 승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전도하면서 그 의심을 극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경배하면서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하신다. 유혹의 산에서 악마가 세상 모든 나라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하였을 때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신 분께서 이제 산 위에서 그 모든 통치권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선언하신다.(다니 7,14 참조) 예수님께서는 “통치권”에서 더 나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시다.(사도 13,33 로마 1,4 필리 2,5-11 1티모 3,16) 우주적 통치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에 대하여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1코린 15,28)이신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라고도 하셨다.(참고. 요한 17,2 에페 1,20-22) 사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제 앞에서 마지막 심문을 당하실 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마태 26,64)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미 당신의 전권을 암시하시기도 하셨다.

어떤 사람은 휘두를 권위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오로지 순종만 하며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권위와 순종이 동떨어진 것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데서 야기될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무소불위의 절대 권위와 철저한 밑바닥의 순종을 강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는 절대 권위를 지닌 사람이거나, 반대로 그 누구에게도 부려볼 권위가 없이 철저히 순종적인 사람이거나 양자 모두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대단히 위험하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다 받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하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신 분이시다. 권위 안에 순종을 살고 순종 안에 권위를 살아야 한다.

2. “제자로 삼아세례를 주고가르쳐 지키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마태 28,19)로 이어진다. 제자들에게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 교회를 세울 터”(마태 16,18)라 하셨다. 우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우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모든 민족들”에는 이민족들만이 아니라 유다인들도 포함된다.(참조. 마태 24,9.14;25,32) “민족”이라 하니 너무 큰 개념인 듯하고 다소 우리 자신들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릴 위험이 있다. 우리 가족, 친구 등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이다. “제자로 삼아”에서 “제자”는 “하늘나라의 제자”(마태 13,52)요 “예수님의 제자”(마태 27,57)로 만들라는 말씀이다. 지상 생활 중에 당신께서 스스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마태 10,5-6.23;15,2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민족들의 빛”(이사 42,6;49,6)이 되시고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빚으신 분”(이사 45,18-20)이실 것이라던 구약성경의 예언을 완벽하게 성취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비결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 하신다. 교회 공동체 건설을 위한 첫 번째 구체적 방법인 “세례” 명령이다. 일명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승된 문헌, 곧 100년경에 저술되어 1873년에야 발견된 문헌인 디다케는 시리아 교회가 이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을 방증한다. 『세례를 베풀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가르친 후에 흐르는 물을 사용하여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만약 흐르는 물이 없을 경우에는 다른 물로 세례를 베풀어도 된다. 찬물 속에서 세례를 베풀 수 없으면 따뜻한 물 속에서 하도록 해라. 만약 둘 다 없을 경우에는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디다케 Ⅶ,1-3)』

그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갈라 3,27 1코린 6,11 로마 6,3 사도 2,38;8,16;10,48;19,15) “이름으로”는 세례를 받는 이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짐을 뜻한다.(1코린 1,13;10,2) 이 성삼위 호칭은 이미 원시교회에도 알려져 있었다.(1코린 12,3-5 2코린 13,13 1베드 1,2 1요한 3,23-24)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제직, 예언직預言職, 왕직을 나누어 받는다. 사제직은 매일의 삶을 성화시켜야 하는 사제직이고, 예언직은 말씀의 관리자로서 말씀이 나를 읽어 나의 삶을 관리하시도록 하는 예언직이며, 왕직은 가시관으로 관을 삼고 십자가로 깃발을 삼으며 오로지 섬김에서 기쁨을 찾는 왕직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은 성호경으로 시작한다. 또한, 그렇게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을 드리는 영광송으로 끝나야 마땅하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매일 역시 영광송으로 마감 지워져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하신다. 세례에 이어 교회 공동체 건설을 위한 두 번째 구체적 방법인 “계명” 준수 교육이다. 세례를 받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평소에 가르치신 가르침들, 특히 산상설교(마태 5-7장)와 공동체 설교(마태 18장)에 실린 윤리적 지침들을 일상생활에서 지켜야만 참 제자가 되어 참 교회 공동체 형성에 이바지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1.23) 하셨다. 이렇게 하신 까닭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신”(요한 17,24) 때문이다.

3.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명령을 마치신 주님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시면서 함께 하실 것을 보증하신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마태 18,20)로 약속하셨다. 옛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는 현존 약속이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애초에 이름이 “임마누엘”(마태 1,23)(*Emmanuel=God with us=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심이 확증된 셈이다. 이 말씀으로써 부활하신 분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이루어진 하느님 현존의 상징과 약속을 이어받아 그것들을 성취하신다.(참조. 탈출 3,12 이사 41,10;43,5 예레 1,8 마태 1,23) 그리고 그분께서는 특별한 은혜나(루카 24,48 요한 20,22) 지속적인 현존만이 아니라(마태 18,20),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도 언제나 효력이 있는 도움을 약속하신다. 이로써 이 현존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보호자”의 현존과 흡사하다.(요한 14,16;16,7-11 1요한 2,1)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함께 계실 것이니 이제 감히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예수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분의 떠나가심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속적인 그분의 현존이 더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오늘날까지도 매일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실감하고 체험한다.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라고 외칠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세상 끝날까지”라 하시는데, 예수님의 이 약속은 현재의 이 (세대) 세상과 다가올 (세대) 세상 사이에 지켜질 약속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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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4년 제98차 전교 주일 담화(2024년 10월 20일)

가서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여라’(마태 22,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올해 전교 주일을 위하여 선택한 주제는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1-14 참조)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인 임금은 자신의 초대를 손님들이 거절하자 종들에게 이렇게 이릅니다.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우리는 비유의 맥락과 바로 예수님의 삶의 맥락 안에서 이 핵심 구절을 성찰하면서 복음화의 여러 중요한 측면들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시노드 주제에 따라 자신의 주된 임무인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복음 선포에 다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시노드 여정의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이러한 측면들은 그리스도의 선교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매우 시의적절해 보입니다.

1. ‘가서 초대하여라!’ 주님의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러 끈기 있게 나아가는 선교 사명

임금이 종들에게 내린 명령에서, 우리는 선교 사명의 핵심을 표현하는 두 단어를 발견합니다. 바로, ‘가다’ 그리고 ‘초대하다’입니다.

첫 번째 단어에 관해 우리는 종들이 앞서 파견되어 손님들에게 임금의 초대를 전하러 갔다는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마태 22,3-4 참조). 이를 통하여 선교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과 만나고 하느님과 친교를 시작할 수 있게 초대하려고 그들에게 끈기 있게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끈기 있게 말입니다! 크신 사랑과 넘치는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시려고 또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행복으로 부르시려고 그들의 무관심이나 거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서십니다. 착한 목자이시며 성부께 파견받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나서셨고, 가장 멀리 있는 양에게까지 닿기 위해 더 멀리 가고자 하셨습니다(요한 10,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전에도 후에도 당신 제자들에게 ‘가거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당신의 선교 사명에 참여시키셨습니다(루카 10,3; 마르 16,15 참조). 교회도 주님께 받은 자신의 선교 사명에 충실하여 어려움과 장애물 앞에서도 결코 지치거나 낙담하지 않고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디며 땅끝까지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빌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먼 데로 가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였거나 최근에서야 전해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든 선교사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여러분의 너그러운 헌신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라고 하시며 당신 사도들에게 맡기신 만민 선교에 대한 여러분의 약속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화하는 임무를 위한 새롭고 수많은 선교 성소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계속 기도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상황에서 복음에 대한 증언을 통하여 이러한 보편적 선교 사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교회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분과 함께 오늘날 이 세상의 ‘교차로’로 계속해서 떠날 수 있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계속 문을, 그것도 문 안쪽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밖으로 나오시게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나오시지 못하게 하고, 계속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가두어 놓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교를 위하여 오셨고 우리가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주관 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23.2.18.). 세례 받은 우리가 모두 각자의 생활 신분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동틀 때에 그러하였듯이 새로운 선교 운동을 시작하기 위하여 새롭게 나설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비유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임금은 종들에게 ‘가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대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혼인 잔치에 오시오.”(마태 22,4)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선교 사명에서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또 다른 측면을 알 수 있습니다. 종들이 임금의 초대를 시급하게 그러나 또한 깊은 존중과 큰 친절을 담아 전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반드시, 선포되시는 그분의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야만 합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복음의 기쁨」, 36항)을 세상에 선포할 때, 그리스도의 선교 제자들은 그들 안에 맺어진 성령의 열매인 기쁨과 인내와 호의(갈라 5,22 참조)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압박이나 강요나 개종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밀감과 연민과 온유로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의 고유한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반영하면서 해야 합니다.

2. ‘혼인 잔치에’ –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명이 지니는 종말론적 차원과 성찬의 차원

이 비유에서,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한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이 잔치는 종말론적 잔치를 반영합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궁극적인 구원의 표상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주신(요한 10,10 참조)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지금 이미 성취되었으나 하느님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그날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베푸시는 잔칫상(이사 25,6-8)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그분께서 설교를 시작하시며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것처럼 때가 차는 것과 연관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그분의 이 사명을 지속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선교 사명의 종말론적 특성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선교 활동의 때는 주님의 첫 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이며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마르 13,10 참조)”(선교 교령 9항).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선교 열정이 강한 종말론적 차원을 띠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가 시급하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아는 사람들의 기쁨을 지니고 또한 장차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열리는 그분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리라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을 가지고 복음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 앞에 소비주의, 이기적 안위, 부의 축적, 개인주의의 다양한 ‘잔치들’을 벌여 놓지만, 복음은 하느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기쁨, 나눔, 정의, 형제애가 넘치는 하느님 잔치로 모든 사람을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인 이 생명의 충만함은, 교회가 주님의 명령으로 그분을 기억하여 거행하는 성찬의 잔치에서 지금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화 사명으로 모든 이에게 전하는 종말론적 잔치로의 초대는, 주님께서 당신 말씀과 성체 성혈을 양식으로 주시어 우리를 살찌우시는 성찬 식탁으로의 초대와 본질적으로 연결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가르침대로, “모든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 백성의 종말론적 모임을 성사적으로 실현합니다. 우리에게 성찬 잔치는 예언자들이 이야기하고(이사 25,6-9 참조) 신약에서 ‘어린양의 혼인날’(묵시 19,7-9)이라고 묘사한,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의 기쁨 안에 거행될 마지막 잔치를 실제로 선취하는 것입니다”(세계주교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31항).

그러므로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 모두는 성찬례를 모든 차원에서, 특히 종말론적이고 선교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는 하느님 마음 그 자체에서 시작되어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사랑의 성사」, 84항).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후에 훌륭하게도 많은 지역 교회가 촉진하고 있는 성찬례 쇄신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선교 정신을 되살리는 데에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더 큰 믿음과 진심 어린 열정을 가지고 외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2025년 희년을 준비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올해에, 저는 모든 이에게 더 깊은 사명감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미사 거행에 참여하고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격려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구세주의 명령에 따라 모든 성찬례와 전례 거행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청원과 함께 ‘주님의 기도’를 끊임없이 바칩니다. 이처럼 날마다 드리는 기도와 특히 성찬례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위하여 마련하신 그 혼인 잔치를 향하여 걸어가는 희망의 순례자이자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3. ‘모든 사람’ – 시노드 정신을 온전히 살아가며 선교하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닌 보편 사명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성찰은 임금의 초대를 받는 이들, 곧 ‘모든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 이것이 선교의 핵심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모든 선교 사명은 모든 이를 당신께 이끄시려는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교황청 전교기구 총회에서 한 연설, 2023.6.3.). 오늘날 분열과 갈등으로 갈라진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끊임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는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입니다. 서로 만나고, 서로 형제자매임을 깨달으며, 다양성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기뻐하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그러니 우리는 선교 활동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복음의 기쁨」, 14항).

그리스도의 선교 제자들은 사회 계층이나 윤리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잔치의 비유는, 종들이 임금의 명령에 따라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마태 22,10) 모아들였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루카 14,21), 곧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임금의 특별한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당신 아드님의 혼인 잔치는 언제나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도 없고 아무 조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누구나 곧 모든 남자와 여자가, 변화와 구원을 가져오는 하느님 은총에 참여하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습니다. 이 무상의 하느님 선물에 그저 ‘예’ 하고 대답하면 됩니다. 이 은총을 받아들이고 이 은총으로 변화되며 “혼인 예복”(마태 22,12)처럼 이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모든 이를 위한 선교 사명은 모든 이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봉사하는 가운데 시노드 정신을 온전히 살아가며 선교하는 교회를 향한 여정을 계속 걸어 나가야 합니다. 시노달리타스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그 반대로 선교 또한 언제나 시노드적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보편 교회에도 개별 교회에도 모두 긴밀한 선교 협력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필요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걸어간 길을 따라 그리고 선임 교황님들의 발자취를 따라, 저는 전 세계 모든 교구에 교황청 전교기구의 활동을 장려합니다. 이 기구는 “가톨릭 신자들이 어려서부터 참으로 보편적인 선교 정신에 젖어 들게 하는 방도이며 또한 모든 선교 지역의 선익을 위하여 그 온갖 필요에 따라 효과적인 지원 헌금을 촉진하는”(선교 교령 38항) 으뜸 도구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지역 교회에서 모은 전교 주일 헌금은 전적으로 교황청 전교회의 보편 연대 기금에 보내져, 교황의 이름으로 교회의 모든 선교 지역의 필요를 위하여 나누어집니다. 우리가 시노드 정신을 더욱 깊이 살아가는 더욱 선교적인 교회가 되도록 주님의 이끄심과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다 함께 바칩시다(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1회기 폐막 미사 강론, 2023.10.29. 참조).

끝으로, 눈을 들어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마리아께서는,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시도록 예수님께 청하셨습니다(요한 2,1-12 참조). 주님께서는 신랑 신부와 모든 손님에게 신선한 포도주를 넘쳐흐르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모든 이에게 베풀어 주실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 제자들의 복음화 사명을 위하여 성모 마리아께 어머니의 전구를 청합시다. 그리고 가서 전합시다. 우리 어머니의 기쁨과 애정 어린 염려로 그리고 온유와 사랑에서 비롯된 힘으로(「복음의 기쁨」, 288항 참조) 모든 이에게 가서 우리 구세주 임금님의 초대를 전합시다. 복음화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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