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2,28ㄱㄷ-34(연중 제31주일 ‘나’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마르 12,30.31) by Maria Cavazzini Fortini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참조. 마르 12,18-27), 이렇게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마르 12,28)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한율법 학자 한 사람”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2,28) 사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 종교 분야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진 논제였다. 당시 유다인들은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에 의하면 613가지의 계명이라고 하는 토라, 곧 율법을 종합할 때 인류에게 생명과 의미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깊은 의도를 헤아려 본질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계명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의 라삐 전통에 따라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하게 되어있으며 신명기 6,4-9를 통해 전해지는 소위 <이스라엘아 들어라!, 쉐마 이스라엘, שמע ישראל, Shema‘Jisra’el>이라는 기도문의 시작 부분을 인용하시어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고 대답하셨다.”(마르 12,29-30) 이 기도문은 ‘경청’이 최우선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는 ‘들음’이 결정적인 방식임을 알려준다. 잘 듣는 것이 사랑의 기초이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신명기의 말씀은 실제로 “들어라” 하는 ‘들음’에서 “주 우리 하느님”을 아는 ‘사랑의 앎’으로 나아가고, 그 ‘사랑의 앎’에서 “사랑해야 한다”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취한다. 들어서 알고, 알아서 사랑하며, 사랑해서 믿는다.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예레 31,3)하신 하느님, “우리를 먼저 사랑”(1요한 4,19)하신 하느님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며 듣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유롭게 온전한 감사로 응답하는 사랑을 드린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므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존재 자체, 사랑의 능력 자체를 믿는다는 것이어서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느님을 믿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 “하느님을 사랑해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의미가 무엇일지 깊이 심화해야 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이사 6,3) 한 것처럼 세 번 거룩하신 하느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그리스도교의 영성적인 전통 안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를 잇는 영성 안에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은 열망이고 느낌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가 사랑을 애써 찾아가며 사랑을 사랑하려는 역동성이다. 이 사랑은 종종 시편에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피신하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이십니다.”(시편 18,2-3)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처럼 노래한다.

이때 하느님은 인간 편에서 인간이 사랑하는 사랑의 상대편이며 ‘’이다. 사랑이신 ‘너’요 그분께서 내 안의 사랑을 일깨우시고 불러일으키셨기 때문이다. 사랑이 불러 응답하는 사랑이다. 하느님을 향한 이 사랑은 나 자신을 내가 사랑하는 사랑보다도, 또 다른 그 누구를 사랑하는 사랑보다도 더 강한 사랑이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다른 여타의 사랑을 배제하고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하였듯이 두려움이 없는 사랑, 열정적인 사랑, 빠져든 사랑을 말한다. 한 마디로 다른 모든 사랑을 압도하고 자리 잡게 하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달리 해석하고 읽어내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도 있다. 순종하는 사랑이요 들음에서 오는 사랑, 주님의 말씀과 사랑에아멘!’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사랑, 당신을 믿는 이들보다 항상 앞서시는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단순한 바람이나 열망이 아니며, 그리움이 아닌 사랑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 보시기에 좋으신 모습대로 살려는, 어찌 보면 강한 의지적인 사랑으로 보이는 사랑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하고 말씀하신 바 있으며, 요한 사도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두 번째 사랑의 모습에서 강조점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계명, 곧 이웃 사랑에 있다. “(여러)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 13,9 참조. 갈라 5,14) 하고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모든 율법과 예언서를 한 마디로 종합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두 번째 사랑의 모습은 한 마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라고 설파한 바로 그 사랑이다.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긴 영성사를 미리 꿰뚫어 보시기라도 하신 듯 신명기 6,4-5를 인용하시며 “첫째는 이것이다.” 하신 다음에 레위기 19,19절을 인용하시면서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하신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각각 한 구절씩을 가져와 둘을 하나로 통합하신 셈이다. 고대 유다의 문헌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예수님의 통합적 가르침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 이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와 같은 통합적 시각이 자주 서술된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문헌 중 하나인 <디다케>의 다음 구절만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는 당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또 무슨 일이든 당신에게 닥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거든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마시오.(디다케 1,1;2,2)』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첫째”, “둘째” 하시면서 가르침을 주시지만, 예수님께서 과거에 이미 있던 그 두 계명과도 같은 내용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시려고 하였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살펴볼 때 두 계명 사이에 정확하게 위계를 세우셔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두셨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든 율법의 율법이시고 율법을 제정하신 분으로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하나처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시고자 했다는 것도 자명하다.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며, 그렇다고 그 어느 한 편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거나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사가는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말하며, 루카는 두 계명이 마치 하나의 큰 계명인 것처럼 서술한다.(참조. 루카 10,27)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갈라놓으려는 착각이 있습니다.…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이 두 가지 말씀을 선택하여 함께 제시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로 뒷받침해준다는 것을 한 번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록 두 가지 사랑이 연속적으로 소개됐지만,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곧, 이 두 가지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것은 신자의 참된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을 살고 그분을 위해 살며,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요, 그분께서 행하는 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연중 제31주일 삼종기도)』

다른 말로 하자면, 실로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것이 사실이라면(참조. 창세 1,26-27),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업신여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에 하나가 되어 살라고 하시는 초대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한 율법 학자는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하고 1사무 15,22절을 인용하며 여쭌다.

질문을 시작했던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마르 12,34)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임을 깨우치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물론 아는 것과 그것을 제 몸으로 사는 것은 전혀 또 다른 일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신 “이웃”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참조. 루카 10,29-37)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사람, 특별히 어려움에 부닥친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기꺼이 나를 희생하며 내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슬기롭게”라는 부사는 공관 복음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마태 22,35와 루카 10,25와 달리,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이 율법 학자는 전혀 악의가 없었다.

3. “새 계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과감하게 통합하신다. 그런데 제4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나머지, 다시 한번 결정적이면서도 최종적으로 또 다른 “새 계명”(요한 13,34;15,12)을 말씀하신다. 이 “새 계명”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조차 없는 채로, 마치 하느님 사랑을 빼고 말씀하시듯이 “새 계명”을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이 당신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듯이 진실로 서로 사랑할 때 이는 이미 하느님 사랑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사도가 자기 복음의 서문에서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요한 1,18)라고 기록하고, 또 서간문을 통해서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라고 기록한 이유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반면에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사랑 자체로 사셨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뜻과 완전히 하나 되는 삶을 살아 말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 자체’가 되셨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 자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모든 이,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마태 5,44)해야 한다는 그 한마디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할 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요 그리스도인이며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아멘!

4 thoughts on “마르 12,28ㄱㄷ-34(연중 제31주일 ‘나’해)

  1. 내 주변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사랑하는 이상을 그려보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느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깁니다.

  2. 주말 아침 성당을 가기전 복음 말씀을
    천천히 읽으며
    사랑의 실천이 참 어렵고
    참 쉬움을 묵상합니다.

  3. 늘 도와 주던 방황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인간적인 실망감으로 지쳐가고 나의 교만과 잘못된 기대에 사로잡혀 어느순간 그 친구를 많이 미워하고 또 같은 이유로 그 친구를 비난하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같이 험담하였습니다.
    마음이 괴로워 기도 중 주님께서는 분명히
    “조건없이 사랑하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를 보고 나를 섬기듯 끝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고 조그마한 유혹에도 나약해 또 넘어지고 그를 미워하고 험담하는 나의 존재적 가벼움과 비천함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나에게 베푸시는 무한하신 자비로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에 대한 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그를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어떤 잘못도 기억하지 않으며 조건없이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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