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출생지인 솔뫼 아레나 광장의 벽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상(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 영입을 위해 입국 경로를 모색하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참조. 매일 미사 안내)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생각할 때, 특별히 기억하면 좋을 분들의 생몰 연도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1795~1839년), 어머니 장흥 고씨 고 우르술라(1798~1864년), 본인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년),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1827~1873년), 7촌 조카 김현채 토마스(1825~1888년)

축일과 성상 봉헌

7월 5일에 성인을 공경하는 축일을 지내게 된 것은 성인을 포함하여 기해, 병오 박해 때 순교하신 79위 시복식이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1925년 7월 5일에 거행되었으며,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께서 그를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면서 7월 5일을 그 축일로 지내도록 하였던 사실 등에 근거한다.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더불어 다시 한번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세운 바 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는 9월 20일에(가까운 주일로 옮겨 경축 이동)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지만, 한국 교회 성직자들의 주보이신 김대건 신부님을 기리는 과거 대축일 7월 5일에도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성인이 순교한 지 177년이 되는 날인 2023년 9월 16일에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기려 제작한 기념 성상이 동양 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 벽감에 봉헌되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벽감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성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조선 땅 첫 미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쟈샹(金家巷)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고 8월 31일 길이 25자(7.5m), 너비 9자(2.7m), 깊이 7자(2.1m)인 라파엘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조선 3대 교구장, 병사), 다블뤼 신부(훗날 조선 5대 교구장, 순교), 조선인 신자 11명과 함께 조선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 중에는 시성된 현석문(가롤로)과 최형(베드로)도 있다. 출발 다음 날부터 풍랑을 만난 라파엘호는 28일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한 끝에 9월 28일(주일) 제주 죽도(현 차귀도)에 닿았다. 이곳에서 조선 땅에서의 감격스러운 첫 미사를 봉헌한 일행은 라파엘호를 수리하고 물과 양식을 얻어 10월 1일 제주를 떠나 10월 12일 충청도 강경 나바위에 도착했다. 차귀도에서 건너다 보이는 용수리 해안에 현재 ‘제주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이 있고, 여기에서는 복원된 라파엘호도 볼 수 있다.

어머니 고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님은 옥중 마지막 서간들을 통해 성모님을 부탁하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페레올 주교와 3개월 뒤에야 친구 김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을 최양업 신부님께 특별히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한다. 김신부님의 어머니 우르술라 역시 천주교 신자로서 공소회장이었던 남편을 보필한 착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시부 김택현이 장杖을 맞은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을 보았으며 41세에 남편의 순교를 목격했고, 열다섯에 해외 유학길에 떠나보냈던 장남 김대건 신부를 1846년 4월 12일 부활대축일에 상봉했다. 그러나 신자들 앞에 둘째 아들과 함께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떳떳할 수 없었고, 구걸 행색으로 단 며칠을 아들과 만났을 뿐이다. 이 장면을 ‘용인천주교회사’는 “반갑고 슬픈 눈물이 피차의 앞을 가리었고 몹시 가슴이 아팠다.”라고 기록한다. 오매불망이던 아들 사제와의 상봉도 잠시, 48세 된 어머니로서 다시 장남의 순교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

열두 살에 아버지의 순교, 열아홉에 형님의 순교를 맞아야만 했던 성 김대건 사제의 동생인 그는 처자식 없이 46세로 생을 마감했으며 전라북도 임실군 용수 2리에 정착하여 옹기를 구워 내다 팔면서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1825~1888년)와 함께 살았다.(용수리는 이분들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자신이 서른일곱이던 1864년 예순여섯으로 모친이 세상을 뜨자 미리내에 안장되었던 형님 묘소 곁에 모셨다.

성직자를 중심으로 본 한국 교회의 간략한 현황

한국 초창기 선교에서 제1세대를 스스로 신앙을 학문으로 배워 익혀 살다가 박해로 사라진 세대라 하고, 제2세대를 정하상 바오로 등이 교회의 설립을 도모하여 중국인 사제 주문모를 모셔오고 회장 제도나 명도회를 운영하던 세대라 한다면, 제3세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한국인 사제가 탄생하는 시기라 할 것이다.

한국인 첫 사제가 탄생한 이래 2009년 6월 27일, 164년 만에 한국인 5000번째 사제가 탄생하였다. 2023년 말 통계에 따를 때, 한국에 있는 성직자 수는 5천7백21명(교구 신부 4,715명, 수도회 신부 823명)이며 총인구 대비 총 신자의 비율은 11.3%이고, 성직자 1인당 대비 평균 신자 수는 1,043명이며, 우리나라 전체 신자는 5백 97만 675명이다. 참고로, 추기경 2명, 주교 40명이 있다. 본당은 전국에 1,789개이고 공소는 708개이다. 사제들의 연령은 40-50대 신부가 53.2%이며 65세 이상 신부의 비율은 17.5%이다. 수도자는 남녀 합산 11,473명이 있으며, 단체 수는 175개이다. 남자는 48개 수도회에 1,568명, 여자는 127개 수도회에 9,905명이다. 해외 선교 파견 국가는 67개국에 1,011명이(신부 260명, 수사 71명, 수녀 675명, 평신도 5명) 파견되어 있다.

※ 2024년 5월 28일자 한국 사제 관련 업그레이드 된 최근의 통계는 ‘한국 천주교회 사제 인명록(2024)’ 보도 자료인https://cbck.or.kr/Notice/20242209?gb=K1300를 통하여 간략하면서도 자세한 확인이 가능하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의 편지에서

그들은 저를 잡아 가지고 상륙한 뒤에, 옷을 벗기고 다시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가하다가 관가로 압송했는데,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제게 묻기를 “네가 천주교인이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더니, “어찌하여 네가 임금의 명을 거역하여 그 교를 행하느냐? 배교하여라.” 하길래,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받듭니다.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내게 배교하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런 대답을 하였다고 주리를 틀고서, 관장이 또 말하기를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때려 죽이겠다.” 하기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나는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의 진리를 알려거든 들어 보십시오. 내가 공경하는 천주는 천지와 사람과 만물을 조성하신 이요, 착한 이를 상 주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는 관장과 모든 사람이 비웃었습니다.

그 후에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져오기에, 제가 즉시 그 칼을 잡아 제 손으로 제 목에 대니, 둘러섰던 모든 사람이 또한 다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배교한 두 사람과 함께 옥에 가두는데, 저의 손, 발, 목, 허리를 어떻게나 몹시 결박하였던지, 걸을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구경꾼들이 둘러쌌기에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밤이 이슥토록 저들에게 교회의 도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흥미 있게 듣고 나서, 나라에서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도 봉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포졸들이 저의 봇짐에서 중국 물건을 찾아내더니 이튿날 관장이 제게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니오, 나는 조선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저의 말을 믿지 않고 또 말하기를, “중국 어느 곳에서 사느냐?”라고 묻기에 “나는 중국 광동현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나는 교우이므로 구경도 하고 또한 교회의 도리를 전할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저를 하옥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도적을 가두는 옥에 수감되었고 아전들은 저의 말하는 것을 들어 보고는 분명히 조선 사람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이튿날 저를 관장 앞에 대령시켜 놓고 관장이 네가 누구냐고 문초하기에,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공부를 하기는 중국 가서 하였소.”라고 대답하자 중국말을 하는 통역을 불러 저와 이야기를 시켜 보았습니다. 1839년 박해 때 배교자는 조선 소년 세 명이 서양말을 배우러 마카오로 떠났음을 고발하였을 뿐 아니라, 저와 함께 잡힌 교우들이 벌써 제가 누구라는 것을 실토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저의 신분을 감출 수 없음을 짐작하고, 관장에게 “나는 그 소년 셋 중의 하나인 김 안드레아”라고 자백하는 동시에, 고국에 다시 들어오려고 고생하였던 것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관장과 구경꾼들도 “가련한 소년, 어려서부터 허다한 고생을 많이 당하였구나.”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로는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배교하기를 독촉하기에 “임금 위에 또 천주께서 계시어 당신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그를 배반함은 큰 죄악이라,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교우들을 대라고 위협하기에, 우리에게는 애덕의 의무도 있고 천주께서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까닭에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교회의 도리를 묻기에, 저는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여 천주의 존재, 만물의 조성, 영혼의 불멸, 지옥과 천당, 조물주를 숭배할 의무, 외교의 헛되고 거짓됨을 말하여 주었습니다. 관장들은 대답하기를 “너의 교도 좋거니와 우리 유교도 좋으니 우리는 유교를 한다.” 하기에 “당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를 편히 지내도록 할 것이고 우리와 서로 화목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렇기는 고사하고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우리를 가장 극악한 죄인과 같이 혹평을 하니, 우리 교를 옳고 좋은 교라고 인정하는 당신들로서 마치 극악한 교와 같이 박해하는 것은 당신들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였더니, 이 말을 들은 그네들은 다만 어리석은 웃음을 띄울 뿐이었습니다.

관장은 제게 영어로 된 지구 전도를 번역하라고 분부하기에, 여러 가지 채색으로 두 장을 그렸는데, 한 장은 임금께 드릴 것이며, 지금은 대신들의 부탁으로 간단한 지리서를 편술하기에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위대한 학자로 인정합니다. 가련한 인생들, 저는 감히 주교 각하께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이제 저는 진심으로 각하의 발 아래 엎디어, 저희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베시 주교님과 안 신부님에게도 공손히 하직을 고하옵니다. 이후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제23신의 발췌, 옥 안에서, 1846년 8월 26일: 이원순, 허인 편저, 1975년, 정음사 –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

전례 독서

오늘 1독서(2역대 24,18-22)는 유다 왕 요아스(기원전 835~796년 재위)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우상들을 섬기므로 이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경고 말씀을 전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임금이 사람들을 시켜 즈카르야를 돌로 쳐서 죽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훗날 아람의 침입으로 유다 임금 요아스는 크게 다치고, 더불어 예언자 즈카르야를 죽인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반란으로 결국 죽음을 맞는다. 예언자 즈카르야의 이야기는 박해로 죽어간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2독서(로마 5,1-5)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음 덕분에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성인 김대건 사제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겪게 된 박해와 고문을 자랑으로 여긴 분이시다.

복음(마태 10,17-22)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훗날 당신의 부활 이후에 닥칠 박해를 예고하시는 부분이다. 복음서를 집필할 당시 마태오는 이미 초대교회의 박해를 겪어본 뒤임을 감안하여 읽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인 김대건 사제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진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신 분이시다.

2 thoughts on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7월 5일)

  1. 86년에 만난 제 제자 중에
    대건 안드레아 본명을 가지고
    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꿈이
    신부님이었는데
    꿈은 이루었을까요?
    못 이루었어도 성실한 사회인으로
    생활하고 잘 지내길 소망합니다.
    오래된 제자를 소환한
    대건안드레아 축일이었네요.
    감사합니다.

  2. 언젠가 출장중 현지에서 미사를 드릴때, St. Andrew Kim 축일 미사라 사제가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과 감동이 생각납니다.
    물론, 그 분이 김 대건 신부님에 대해 잘은 모랐을 터이지만… 가톨릭은 정말로 세계가 하나로 움직이는 큰 어머니 교회라는 생각을 절감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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