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예언자의 표징

성경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명령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요나는 그 부르심을 거부하고 달아나다가 큰 물고기에게 삼켜져 그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게 된다. 마침내 다시 부르심을 받은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선포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임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느님을 믿고 회개한다. 백성은 단식하며 자루옷을 입었고, 임금은 왕좌에서 일어나 예복을 벗고 자루옷을 입은 채 잿더미에 앉았다. 그들은 악한 길에서 돌아서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그러나 요나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아끼던 아주까리 나무에는 연민을 품으면서도 니네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께 분노하는 요나에게 물으신다. “그렇다면 나도 이 큰 성읍 니네베를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서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네베마저 아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내며, 우리가 자비를 베풀 대상의 범위를 정하려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되물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요나 예언자: 요나 예언자는 성경의 요나서 1-4장, “갓 헤페르 출신으로 당신의 종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2열왕 14,25)라고 기록하는 구절, 그리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인 마태 12,39-41 루카 11,30 등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요나 예언자는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인 기원전 793년~기원전 753년 사이에 활동하던 예언자이다. 경제적 번영 이면에 빈부격차 심화와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으며, 이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예언자로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있다.
요나 예언자에 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은 다음 구절들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9-41)
이 말씀들에 따라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두 가지 유기적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가 살아나온 사실에 주목하는 차원이다.(마태오 복음적 관점) 이는 십자가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파스카 신비를 예표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표징이다. 둘째는 요나라는 예언자 자신이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경고와 구원의 표징이 되어, 그들의 회개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차원이다.(루카 복음적 관점) 이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그에 응답하는 인간의 회개를 촉구하는 표징이다.
결국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의 사건, 그리고 그 기쁜 소식 앞에 인간이 올려야 할 인격적 회개라는 두 축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 함께 읽기: 표징(세메이온, σημεῖον) 「… 신약성경에서 ‘표징’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사건들이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표지이다. 이러한 표징들은 하늘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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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성경」요나서 입문
1. 구성
요나서는 히브리 말 성경에서 예언서들 가운데에 들어가 있지만, 언뜻 보기에도 다른 예언서들과 다르게 여겨진다. 일련의 신탁으로 구성된 일반 예언서들과는 달리, 요나서는 서로 연결된 세 장면의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거기에서 예언자는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두 장면에서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과묵하고 고독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반면에 그의 상대자들, 곧 선원들, 그리고 이어서 니네베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일뿐더러, 요나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자세를 보인다. 이로써 독자는 바로 그들에게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고 또 그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자극을 받는다. 드디어 세 번째 장면에서는 요나 혼자 하느님과 대면한다. 이 부분이 바로 요나서의 절정이다. 그것은 곧 요나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기도, 그리고 그의 사명에 관한 하느님의 가장 큰 계시이다. 이러한 전체 맥락에서, 영감을 받은 어떤 저자가 훗날에, 그러나 요나서의 상황에 꼭 맞는 방식으로, 이 책의 종교적, 예언적 가치를 더해 주는 시편을 2장에 삽입한다.
2. 목적
이러한 요나서는 두 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첫째, 예언자가 전인적으로 겪는 내적 체험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예언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으로 자기의 직무를 시작한다. 동시대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러한 사명은, 예언자에게 극히 고통스러운 일일뿐더러 그를 다른 이들에게서 소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예언자가 자기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의 중압에 억눌려서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에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거나(1,1-16) 체념한 설교가로 전락한다 하더라도(3,1-10), 그가 전하는 또는 전해야 하는 말씀은 선원들과 바다, 바람과 큰 물고기, 니네베인들, 그리고 짐승들과 초목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의도하였던 효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예언자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사명을 벗어 던져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은 동물과 자연을 포함한 온 세상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요나서의 두 번째 가르침은, 주님께서 선포하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을 받는 자들의 자질을 통하여 드러난다. 이스라엘에게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하느님(탈출 34,6-7), 달리 말하면 선하신 구원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니네베인들 곧 이방인들도 위하신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에서 니네베 성읍,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어림수, “사흘”(3,3)과 주민 “십이만 명”(4,11)은, 그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시의 보편적 효력을 나타내고자 채택된 것이다.
3. 문학 유형과 저작 시기
요나의 이러한 이야기는 그것이 예언자들의 실제 체험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역사적 실존 인물과 연결된다(2열왕 14,25). 그러면서도 더욱 교훈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더러는 한편의 우화처럼, 갖가지 표상들로 가득한 경탄스러운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여러 요소를 외국의 신화들에서, 그러나 특별히 예레미야서와 같은 성경 전통에서 빌려 온다(3,8과 예레 18,11; 23,22; 25,5. 그리고 3,10과 예레 18,8.10; 26,3.13.19 비교).
이러한 모든 요소는 요나서를 유배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언어와 문체는 명백히 고전 히브리 말 시대 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메시지는 예컨대 유배에서 돌아올 당시의 제2이사야서보다(이사 40─55) 더 폭넓은 보편주의를 반영한다. 이 이야기에서 약간 귀에 거슬리는 해학은 요나서를, 에즈라 시대에 너무나 자신들에게만 갇혀 있던 유다교의 경향을 비판하는 일종의 팸플릿으로 생각하게 한다. 끝으로 이 소책자에서 표상이 풍부한 문학 유형은 유배 이전 역사가들의 문체보다는, 얼마 뒤에 토빗기, 에스테르기, 다니엘서를 저술하게 되는 현인들의 문체를 상기시킨다.
4. 복음서와 요나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그의 이야기를 해석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께 기적을 요구하는 불신자들의 청을 거절하시면서, ‘요나의 표징’을 지적하신다(마태 16,4; 루카 11,29-30). 이는 그분 기적의 의미가 무엇보다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실현하는 것임을 뜻한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요나의 표징’의 의미는 바로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발전한 내용이 증언하는 것처럼 더욱 잘 이해된다(마태 12,40).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1코린 15,4)는 가장 오래된 신경의 표현도, 이 ‘요나의 표징’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당신 복음이 지닌 보편적 효력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신다(마태 12,41-42).
요나서의 해학적 요소는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예술을 하는 조각가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어 왔다. 오늘날에도 요나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계속 호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특별히 흥미로운 요나라는 사람보다는, 그의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요나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내용, 곧 그분의 보편적이며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는 사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