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代贖의 신비(La mistica della riparazione)

브륀힐데 루켄(Brunhilde Luken)의 “그리스도의 성체(Corpus Christi)”

* 디보 바르소티((Divo Barsotti, 1914~2006) 신부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가톨릭 사제이자 영성가, 수도승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신비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데 헌신했다. 1947년경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를 설립했다. 선종 후 15년이 지나면서 2020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고, 2026년 피렌체 대교구에서 진행된 그의 시성·시복 조사가 교구 차원에서는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https://www.comunitafiglididio.net/에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아래는 신부님의 저서인 《대속의 신비(La mistica della riparazione, 1962)》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번역 글이다. 이 내용에는 예수 성심 신심의 본질인 ‘대속(Riparazione, 기워 갚음)’과,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인 ‘소수가 다수를 구원하는 원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사랑의 연대성’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

————————

모든 것은 하느님 섭리의 정교한 설계에 응답하는 듯하다. 소수를 통해 다수가 구원받고, 단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이가 구원받는다. 유일하신 분인 예수께서 저 거대한 군중을 구원하신다. 그분 이후에, 그러나 그분과 결합하여, 이제는 소수가 다수를 구원한다. 이는 인류의 모든 세대에 적용되는 진리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일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작은 양떼’일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을 비추고, 인류의 보편적 부패와 파멸을 막아내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양떼, 이 한 줌의 소금, 등경 위에 놓인 이 빛 덕분이다.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설령 사랑에서 도망쳐 고통을 피하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고통받을 것이다. 다만 그때의 고통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의 저주받은 고통일 뿐이다.

1. “너만이라도 나를 사랑해다오”(Almeno tu amami)

우선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예수 성심 신심의 대상은 무엇인가? 이 신심은 우리를 어디로 부르고 있는가?

예수 성심 신심은 본질적으로 대속(보속)의 신심이며, 그리스도인에게 기워 갚음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예수 성심과 대속의 관계는 아주 명백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두 개념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실, 흔히 이해되는 방식의 예수 성심 신심은 고유한 대상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심 안에서 우리를 향한 신적 사랑의 상징만을 바라본다면, 결국 성체성사 신심이나 십자가 신심 역시 이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성체성사야말로 하느님의 선물이자 그리스도의 최고의 선물, 즉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성사가 아닌가? 또한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최고 정점이자 계시가 아닌가?

근본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모든 활동은 사랑의 활동이다.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을 목적으로 끝난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라는 요청이나, 우리를 향해 당신을 사랑하라고 부르짖으시는 하느님의 호소는 예수 성심 신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직접 원하셨던 예수 성심 신심의 구체적인 대상은 바로 ‘대속(보속)’이다. 실제로 대속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요구하신 것이지만, 교회의 다른 신심들은 대속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을 이토록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예수 성심은 대속과 그토록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바로 이 점을 우리는 명확히 보지 못하곤 한다.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성심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보속과 대속을 촉구하고 독려하신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겸손히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표징을 통해 우리에게 위대한 의무를 상기시키시는 하느님의 말할 수 없는 뜻을 실천해야 한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하신 예수님의 명시적인 요청에 따라, 우리는 대속에 헌신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예수 성심과 대속 사이의 깊은 신학적 이유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설령 영원히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거룩한 성심의 계시와 마르가리타 마리아 성녀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대속의 의무와 결부시키셨기 때문이다. 이는 가톨릭 신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전환점이다.

물론 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를 속죄하고 대속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그랬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이 대속의 의무가 가톨릭 영성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과업으로서 이토록 명확하고 뚜렷하게 자각되지는 않았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의무를 완수하겠다는 구체적인 결단 없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으며 완덕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소명에 응답할 수도 없다.

2. 타인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Amare Dio per gli altri)

그렇다면 대체 어떤 대속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이 대속에 투신해야 하는가? 이는 예수님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성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수많은 다른 영혼들을 대신하여 그 공백을 메워야(Supple, 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속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대리적 의무(Supplenza)’를 표현하며,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다. 하느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없으며, 나 홀로 하느님과 단둘이 도망치듯 구원받겠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의무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에게 “너만이라도 나를 사랑해다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사랑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네가 바치는 사랑을 통해 네 형제들이 거부한 사랑을 보상하라는 뜻이며, 네 사랑이 그들을 대리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그분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너만이라도 나를 사랑해다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영혼을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지 않으며, 형제들로부터 갈라놓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랑이야말로 영혼을 인간들과 더욱 단단히 결합시키고, 모든 이에 대한 책임감을 지우게 만든다. 베드로는 이 사랑 때문에 온 누리의 아버지가 되는 사명, 즉 그리스도의 모든 양떼를 이끄는 사명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는 단순한 순교를 넘어, 온 세상을 위한 봉헌 제물이 되는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가장 온전하게 동참하는 것이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이것은 스테파노의 기도였고, 베드로의 기도였다. 그리스도인의 순교는 결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증언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너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증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섭리의 명확한 설계에 부합한다. 소수를 통해 다수가 구원받고, 단 한 사람을 통해 모두가 구원받는다. 유일하신 분인 예수께서 저 거대한 군중을 구원하신다. 그분 이후에, 그러나 그분과 함께, 소수가 다수를 구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며, 작은 양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양떼, 이 한 줌의 소금, 이 등경 위의 빛 덕분에 온 세상이 밝아지고 인류의 보편적 부패와 파멸이 저지된다.

이 신비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두려움을 주기에 감히 조망하기조차 무섭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책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응답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내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며, 선택받은 이들을 통해 타인에게 도달해야 할 하느님의 힘과 구원의 권능, 사랑의 선물을 온 인류와 피조물로부터 가로채는 짓임을 우리는 자각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신다면 분명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지만, 그 부르심은 우리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타인들과 구별 짓지만, 이는 그들과 우리를 연대하게 만들어 아브라함처럼 모두의 아버지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그의 부족에게서 떼어내고 그의 성읍 밖으로 이끌어내셨지만, 그것은 그를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주님께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완덕과 성화만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나만의 구원’에만 만족하려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오직 나만의 배타적인 구원을 바라는 그 열망 자체가 이미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착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받은 이는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완전해지기를 거부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타인들을 위해서라도 완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은총은 너를 통해 타인들에게 흘러간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경로로? 너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네가 완덕으로 부르심을 받은 딱 그만큼, 너는 교회 전체와 피조물 전체를 대변하고, 그것들을 네 마음에 품고 네 손으로 떠받쳐 네 봉헌 제물로 바치며, 너와 함께 구원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3. 구속의 신비(Il mistero della Redenzione)

그리스도교의 신비는 바로 이 법칙 안에서 표현된다. 첫 번째 창조에서 하느님은 만물을 증식시키며 창조하셨다. 신적 과정은 단일성에서 출발하여 점점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형태를 지닌 다수성(Many)으로 나아갔다. 반면, 두 번째 창조(구속)에서는 죄로 인해 갈라지고 악으로 인해 산산조각난 파편화된 다수성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단일성(Unity)’을 향해 부르신다.

하느님의 피조물 전체가 하나의 그리스도가 된다. 유일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 전체를 당신 안으로 수용하시고, 몸소 모든 죄의 무게를 짊어지시며, 아버지 앞에서 온 우주와 연대하심으로써 만물을 당신 자신 안에서 구원하신다. 다수성에서 단일성으로 향하는 이 과정은 교회를 통해 계속되며 온전히 실현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분 안에서 변화되는 딱 그만큼, 우리 역시 이 일치와 단일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우리의 이 우주가 우리와 함께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샤를 페기의 이 말은 참되다. 우리의 구원은 보편적 구속(Redenzione universale)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일치 안에서 만물이 구원받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구속의 신비다. 내가 세상과 진정으로 연대하고, 피조물 전체를 내 안에 모아들여 그 모든 불안과 고통, 악과 비참과 죄의 무게를 내 것으로 짊어지며 하느님 앞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한, 나는 이 구속의 신비에 참여할 수 없다. 소수가 다수를 구원한다.

우리는 왜 주님이 이토록 기묘한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늘 의문을 품는다. 하느님의 행동 방식은 참으로 기묘하다. 2천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시작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소수의 성인, 제법 명맥을 유지하는 착한 영혼들, 이름뿐인 수많은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인산인해의 영혼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구원하고, 소수가 다수를 구원하는 그 신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교회와 세계 역사 속에 현존하시며, 피조물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비참과 죄를 떠맡으시는 제사(Sacrificio) 속에 현존하신다.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미사 안에서 예수님은 단순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나 나병환자와 맹인을 위해 기적을 행하신 분으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으시고 당신 안에서 그것을 소멸시키시는 ‘죽음의 신비’ 속에서 현존하신다.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그분은 모든 죄를 당신 위에 짊어지신다. 진정 미사는 온 우주의 구원이다. 매 순간 예수님은 살아 계시며, 모두를 구원하는 유일한 분으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하기에, 우리 역시 이 동일한 신비를 살아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결단이다. 타인들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다르게 느끼지 않으며, 인간의 비참과 죄의 무게를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짊어지고 하느님 앞에 대답하는 것 말이다.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교만이 아닌가? 타인의 죄보다는 우리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데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자신도 이토록 죄인인데 어떻게 감히 이 거대한 책임을 떠맡고 인간의 죄에 대해 대답하려 드는가?”

옳은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성스러운 만큼만 이 의무에 대답할 수 있다. 정확히 우리가 완덕으로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만큼, 우리는 이 죄를 짊어지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극단적인 도달점에 이르러 우리가 예수님처럼 거룩해진다면, 우리 역시 그분처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대속할 수 있는 영역이 작고 실제로도 미미한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머물지 못하고 그분과의 일치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더 깊이 머물수록, 우리는 죄 많은 인류를 더 잘 대변할 수 있고,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이 인류와 연대하여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나면, 우리에게는 진짜 순교가 시작된다.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거룩해진 우리는, 자비를 얻기 위해 아버지께 봉헌되는 희생 제물(Vittime immolate)이 된다. 이 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성화될 때, 그 거룩함 안에서 그리스도 및 모든 형제와의 일치가 실현된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그들의 단죄가 나의 단죄가 되기를 원하며, 그들의 벌에 동참하고 보편적 죄의 무게를 견뎌낼 것이다.

그 어떤 신학 이론도 이 대속의 신비만큼 우리가 인간들과 하나임을 드러내지 못하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고, 세상을 들어 올려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느님과 협력하라고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존엄을 이보다 더 잘 말해줄 수 없다.

4. 성모님과 성인들의 구속 협력

예수님 다음으로, 세상의 죄를 가장 크게 대속한 인간의 영혼은 바로 마리아다.(예수님 다음이며 철저히 그분께 종속된 형태다. 본질적으로 그녀의 대속은 그리스도 구속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예수님이 동일한 비율로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는 데 기여했다는 뜻이 아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딱 그만큼, 예수님의 거룩함을 살아내고 그분의 신비와 결합하는 딱 그만큼, 그녀 역시 그리스도께 종속된 채 이 보편적 구속의 신비를 살아낸 것이다. 그녀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머물기에, 그녀는 보편적 대속자다. 단지 ‘가장 드높은 방식으로 구속되신 분(sublimiori modo redempta)’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구속 협력자(universalis corredentrix)’이신 것이다.

세기마다 한 세대의 모든 죄와 세상의 비참을 실제로 온몸으로 짊어지는 위대한 영혼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바로 가장 거룩한 성인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왜 거룩함(성화)이 고통과 분리될 수 없는지 이해하게 된다. 성화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결합시킨다면, 그것은 대속의 신비와도 우리를 결합시킨다. 우리가 거룩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고통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가장 위대한 성인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더 내밀하게 참여할 자격을 얻음으로써, 세대와 세대를 이어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영적 혼인에 도달한 위대한 신비가인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성청(S. Uffizio)의 명령으로 수련장 직책에서 해임되어 감옥에 갇혔고, 빵과 물만으로 연명하며, 두 수녀의 감시 속에 성사를 금지당한 채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더 많은 고통을 청하며 살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제대로 서 있지도 누울 수도 없는 비좁은 독방 감옥에 갇혀 빵과 물로 연명했고, 동료 수도자들에게 피를 흘릴 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 가장 순수한 사랑의 극치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에게 오직 비난만을 퍼붓는 원장이 있는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은 너무나 경이롭고 신적인 신비다! 이 모든 것은 고통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증명한다. 고통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기 때문이다. 십자가로부터 은총이 꽃핀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무죄한 만큼, 거룩한 만큼 고통받는다. 그리스도교에서 고통은 더 이상 죄에 대한 벌 처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은—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하느님께서 우리의 살 안에서 죄를 지워버리시는 행위다. 죄를 수동적으로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시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 구원은 언제나 우주의 모든 죄인과 연대하고 일치하여 거룩한 영혼들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인간의 고통을 통해 달성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린다는 것, 수도 생활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고 날마다 그분의 은총에 이끌려 복음적 완덕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세상의 죄를 위해 제물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느님이 지우시는 짐에 대해 불평하지는 않더라도, 그분을 더 진지하게 따르면 너무나 큰 슬픔과 고통은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소명이 완덕을 요구하는 딱 그만큼, 그것이 고통과 슬픔의 약속이자 순교와 죽음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예수 성심 신심은 바로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고 있다.

5. 그리스도의 협력자들(Collaboratori di Cristo)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우리가 고통받는 딱 그만큼 우리는 세상을 구속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되 세상과 연대하면서, 그분의 구속 사업에 협력해야 한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있다면, 우리 각자는 구속 사업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명인가! 이를 받아들이고, 당신과 협력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을 찬미하자.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리고 설령 사랑을 거부하여 고통을 피하려 할지라도 우리는 똑같이 고통받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지옥의 고통일 뿐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고통이 있는 반면, 사랑으로 수용되지 못해 아무런 쓸모없이 그저 파멸의 표징으로 남는 고통도 존재한다.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내 형제들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것, 모든 이의 불안과 고통을 내 영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온 세상이 우리와 함께 구원받게 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인간 구속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이 모두를 구원하고, 그분 안에서 소수가 다수를 구원한다. 우리가 거룩한 만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만큼,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서 인류 전체를 대변하며 실제로 점점 더 그렇게 해나간다. 우리는 인류와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무게를 우리 위에 짊어짐으로써 대변한다. 오직 이 방식만이 아버지 앞에서 인류를 진실하게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의 죄와 그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죄에 동조하여 연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 경우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구원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 구속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될 뿐이다. 반면, 우리가 구속된 만큼, 주님께 응답한 만큼, 그리고 하느님의 신적 사랑의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만큼, 우리는 인간의 죄와 그 벌을 짊어져야 할 의무를 지닌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쳐서도 안 되며, 형벌과 순교를 피해 가려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예수께서 당신의 전 생애 동안 준비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이자 곧 세상의 십자가인 우리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답글 남기기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
*

이 사이트는 Akismet을 사용하여 스팸을 줄입니다. 댓글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