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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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주 탁월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의 자비에다 탓을 돌릴 수는 없다

오, 하느님! 테오티모여,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깨우침을 받아들여 그 빛을 충분히 이용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짧은 기간에 성덕의 진보를 크게 할 수 있겠는지! 항상 솟아나는 큰 샘이 있다고 하자. 그 시냇물이 직접 전답에 들어갈 수는 없고 다만 크고 작은 물도랑을 거쳐 여기저기로 흘러들게 마련이다. 성령은 살아있는 물을 뿜는 샘과 같이 우리 마음 속속들이 흘러 들어가 그 안에다 당신의 은총을 채워주시며, 더구나 우리 의지의 자유로운 동의 없이는 결코 들어 오시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뜻과 우리의 순응성順應性과 협조를 따라 당신 은총을 부어주실 따름이다. 이는 마치 거룩한 공의회가 말한 바와 같으며(트리덴티노 공의회, Sess. VI, Can. IV) 또한 좀 추리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동의와 하느님의 은총 사이에 있는 상호대응성으로서 수용성(收容性 또는 受容性)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경우 그것은 의지상意志上의 수용성이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하고 우리를 권면하신다. 마치 어떤 환자가 약봉지를 받아 들고 위장에 넘어가도록 차마 먹지는 못하고 들고만 있거나, 물약을 주어도 역시 그러하다면, 이런 경우 그 약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기는 하되, 우리의 마음속까지는 받아 넣지 않고, 다만 마음의 문간에서만 받아 없애고 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실상 헛되이 받은 것이 되므로 아무 결과가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함이 없이 영감을 느낄 따름이니,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물약을 손에 든 환자가 다 먹지는 않고 조금만 먹는다면 그 효능도 부분적으로밖에 받지 못하므로 온전한 효능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꼭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움직이시기 위하여, 위대하고 힘 있는 영감을 우리에게 보내실 때,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받아들인 만큼의 이득만을 얻게 될 것이다. 많은 것을 하라는 영감을 받으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일부분만 한다면 이는 마치 복음에 나오는 저 착한 사람들이 한 바와 비슷하다. 그들은 우리 주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주신 영감을 보류시키고자 하였으니, 하나는 우선 가서 자기 부친을 장사하려 했고, 다른 하나는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러 가려 했었다.(참조. 루카 9,59-62)

저 가난한 과부가 빈 병들을 가지고 있는 한, 엘리사Eliseus가 기도로써 기적적으로 많아지게 하는 그 기름은 계속 불어서, 그 과부가 더 이상 병이 없게 되자, 담을 데가 없으므로 기적의 기름은 흐르기를 멈추었다.(참조. 2열왕 4,1-7 *엘리야와 과부의 기름병 이야기는 1열왕 17,8-16을 볼 것이다) 우리의 마음 자체를 흘러내리게 하는 그 정도로 또는 오히려 마음 자체를 크게 하고 흐르게 하는 정도만큼, 하느님의 자비에 동의하기를 거절치 않는 아주 단순한 사실로 마음 자체가 텅 비어 있으면, 거룩한 영감이 항상 쏟아 부어져서, 그침 없이 담기는데, 하느님의 이러한 영감은, 항상 증가하며 천상적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욱 더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빈자리가 없어질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더 이상 동의하지 않을 때, 그것은 즉시 중지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St. Catharine of Genoa나, 성녀 프란체스카St. Frances처럼 하느님의 사랑에 그다지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테오티모여,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그런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하느님의 은총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것을 따르지 못하였는가? 그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니만큼, 우리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우리의 자유를 잘못 썼는가? 아! 테오티모여, 여기서 더 이상 캐지 않는 것이 좋겠으니,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마따나, 우리 의지의 부패와 타락상은 아무런 이유에서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죄를 범하는 요인의 과오로부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생기는 탓의 원인을 캘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탓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유 없이 있지 아니하는 한, 죄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신심이 깊었던 루피노 수사Brother Rufinus는, 위대한 성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의해 도달한 그 영광을 환상으로 보고 나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부디 사실대로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니 그는 대답하였다. “정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며, 모든 이들 중에 가장 적게 주님을 섬기고, 가장 쓸데없는 자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피노 수사는 다시 말했다. “당신의 그런 말씀을 어떻게 참되고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많은 이들은 우리가 똑똑히 보고 알듯이 많은 죄를 짓고 있으나 당신은 그런 죄에서 면제받았으니,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 프란치스코는 대답하였다. “만일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 같은 은혜를 그들에게 주신다면 비록 그들이 지금은 죄인일망정 즉시 나보다도 훨씬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나보다 더 잘 하느님께 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만일 나를 저버리신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지독한 죄악을 지을 것입니다.”

테오티모여, 너는 이제 이 사람의 견해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이 사람은 거의 인간이 아니었고, 다만 지상에 있는 세라핌이나 거의 다름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든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겸손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 확실한 진리를 믿고 있었으니, 그것은 똑같은 은총이 똑같은 자비로써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이 죄인은 저 죄인 보다 훨씬 더 충실히 은총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성덕의 학문에 있어서 이 위대한 박사의 생각을 일종의 신탁神託으로 삼고 있다. 이 성인들은 십자가의 학교에서 하느님의 영감만을 호흡하며 육성된 이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격언적인 명언은 그를 따르고 있는 신심 깊은 모든 이들이 다 함께 찬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들 중의 많은 이는 성 바오로가 당신을 “모든 죄인들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이라고 부른 것도 그와 비슷한 뜻으로 알아듣고 있다.

천사다운 동정녀인 복녀 예수의 데레사 수녀도 고요의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영혼들이 이 상태에까지는 도달하지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이는 아주 적다.” 그런데 그 원인이 하느님께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 엄위로우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 목표에 도달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은 훨씬 더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꼭 주시지만, 우리의 탓이 없어야 하는 조건, 즉, 우리 편에서 장애물을 내놓지 말아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오티모여,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에 있어 날로 진보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은 우리를 참아주시며, 결코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베풀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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