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성찰

ALBERTO GIANQUINTO, Crocifissione

백 년도 넘는 세월 전에 샤를 페기Charles Péguy(1875~1914년)라는 작가가 “현대 사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훼손하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것마저도 훼손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죽음이라는 존엄성이다.(The modern world has managed to debase the thing that is perhaps more difficult to debase than anything else, because it has a singular dignity: death.)”라는 통찰을 이미 내놓은 바 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 죽음은 한없이 위축되어 보이지 않는 것이 되거나 거꾸로 화려하게 전시되기도 하고, 살아있는 이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외설적으로 조작되거나 사회적 관계라는 세상에서 소외되기도 하며, 대중의 구마 의식처럼 호화찬란하고도 무자비하게 노출되기도 하는데, 이런 현실을 보면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늘 진지하게 숙고하고,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죽음을 억제하거나 포장하고 숨기며 외면하려 든다.

나르시시즘 사회는 자신의 한계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 특히 전능한 인간이라는 망상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도 있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억압·억제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도취의 환각과 마취라는 작업 안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도록 하는,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놓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음 안에 담고 있는 보편성필연성,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계시, 삶의 의미를 엿볼 수 있도록 하는 실마리, 무엇보다도 일상의 루틴 안에 우리를 가두는 어리석은 계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죽음에 관해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When a person wants to understand himself, he must question himself about death.)”(융겔E. Jüngel, 1934~2021년)라고 하였듯이 우리는 죽음이 던지는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개방해야만 한다. 죽음을 잊어버리려 하거나 봉인하려고 들면 문화와 사회의 비인간화에 이바지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인간이 태어나고(生) 늙어가며(老) 병들어간다(病)는 사실을 이미 깨우치고 계셨던 부처님께서 죽음(死)의 실체를 보실 때 비로소 온전한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임금 아버지의 각별한 보호 아래 세상의 악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고 성장할 수 있었던 젊은 왕자 부처는 어느 순간 인간 조건의 현실과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왕궁의 성벽을 허물어야만 할 필요를 발견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신앙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죽음의 기억(memoria mortis)을 되살리고 간직하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냉소적이거나 병적인 취향(morbid tastes)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며, 생명을 우습게 보아서도 아니다. 삶의 무게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만이 살 이유도 있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상실을 배우는 자만이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는 법을 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친다.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수동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나 사실이 아니라 생명의 절정이요 적극적인 행위로 제시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랑으로 생명이 된 죽음이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 사랑 때문에 아들의 죽음 안에서 고통받으시는 하느님의 사랑, 실로 신적인 수난으로 되살아난 죽음이다. 우리의 죽음 체험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안에서 우리 안의 어떤 무언가도 죽는다. 사랑이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를 ‘분명하고도 논리적인’ 생명의 상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관한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고, 그 죽음의 결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죽음을 사랑으로 연장하지만, 죽음이 그러한 우리의 사랑을 일거에 단절시켜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갈 수 없도록 끝내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음을 그 어떤 것보다도 낯설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가장 진실하고 애초에 우리가 타고난 우리의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병상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부정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비인간적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1897~1990년)가 지적한 대로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위생적으로 죽음을 맞지만, 훨씬 더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불멸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안에서 죽음의 슬픔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죽음을 극적으로 분리해주셨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가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며 시간이 곧 생명이어서 죽음을 기도하는 행위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배워간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원수인 죽음을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한 생명,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생명으로 체험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사랑스러운 ‘누이’가 되고, 예로부터 전해진 지혜의 음성으로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시편 90,12) 하고 기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주어진 날들, 시간과 죽음의 차원을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의 평온함은 사람을 생명으로 부르시고 죽음을 통해 당신께로 다시 부르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시편 90,3)라고 노래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죽음에 맞서는 위대한 전쟁이며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이도록 하는”(히브 2,15) 두려움과의 싸움이다. 이러한 전쟁은 죽음을 내리누르고자 하는 단순한 억제나 억압의 행위가 아니다. 죽음과의 전쟁은 죽음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온갖 시도들이 우상숭배와 죄의 논리들을 고수하면서 여전히 원수요 적대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벌이는 투쟁이요 전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안에서 죽음이 최후의 승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이 전쟁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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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5년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을 통하여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광범위한 “죽음의 문화”(12항)를 개탄하신 바 있다.

(이글은 Enzo Bianchi, “Death and faith-Christian faith is also a great battle against death, and above all against the fear of death”의 번역 글이며, 원문과 이미지 출처는 https://www.monasterodibose.it/en/prayer/spiritual-lexicon/450-death-and-fait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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