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들음敬聽, 비잔틴 스타일의 보세 공동체 아이콘

간략한 역사: 「성경독서」,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렉시오 디비나」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래된, 성경을 읽는 태도와 자세, 영적 체험이자 영성 수련 및 방법론을 망라한다. 교부 오리게네스(185~253년경)와 카르투시오회의 귀고 2세Guigo II(?~1188년)에 의해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얼마간 잃어버린 듯한 교회의 소중한 유산인 렉시오 디비나가 본격적으로 교회 안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이다.(*살레시오회의 공식적인 문헌에서 이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2002년 제25차 세계 총회-총장 신부의 문헌 소개 인사말-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관한 귀고 2세의 말씀

「…영적 4단계요, 층계는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이다.

독서는 행복한 삶의 감미로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묵상은 그 감미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독서는 기초와도 같아 맨 먼저 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제를 제공해주고 또 우리를 묵상으로 인도합니다. 묵상은 추구해야 할 것을 더 열심히 찾아 나서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땅을 파고 들어감으로써 보물을 발견하여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것을 간직할 힘이 없기에 우리를 기도로 인도해 줍니다. 기도는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스스로를 들어 높이면서 갈망하던 보물을 청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관상의 감미입니다. 이 관상은 그 도래와 함께, 천상적 감미의 이슬로 목마른 영혼을 적시면서 이전 세 단계의 모든 수고를 갚아줍니다. 독서가 표면과 관련된 훈련이라면 묵상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지성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갈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관상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초심자들의 것이요, 두 번째는 진보한 이들의 것이며, 세 번째는 열심한 이들의 것이요, 네 번째는 복된 이들의 것입니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

첫째 단계에서 열심히 애쓰고, 둘째 단계에서 주의 깊게 두루 살피고, 셋째 단계에서 정성스럽고, 넷째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 드높아진 사람, 하느님께서 당신을 향해 오도록 그 마음에 깔아놓으신 오르막길을 따라 점점 더 힘 있게 올라가 마침내는 신들의 신이신 하느님을 시온에서 뵈옵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네 층계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네 가지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 선행의 유익함, 인간적인 나약함, 그리고 세상의 헛됨입니다. 첫째 것은 변명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것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며, 셋째 것은 불쌍히 여길 것이고, 넷째 것은 정녕 죄스러운 것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다정하시고 온유하시며 상냥한 친구이자 현명한 조언자, 능하신 도움이신 분! 주님을 팽개치는 이, 그토록 겸손하고 유순한 손님이신 주님을 제 마음에서 몰아내는 이는 얼마나 인간답지 못하고 무모한 자인지요! 아, 그 얼마나 불행하고도 재앙스런 맞바꿈인지요, 자기의 창조주를 팽개치고 대신 고약하고 해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의 신방(新房), 곧 조금 전까지도 천상의 기쁨에 경도되어 있던 저 마음 깊은 곳을, 순식간에 불결한 생각들에 넘겨주어 도지들로 하여금 짓밟도록 하는 것이!(마태 7,6)

아직 마음속에 신랑이 남기고 간 흔적의 온기가 남았건만, 벌써 간음의 욕망이 고개를 내밀다니요. 모두가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말을(2고린 12,4) 방금 들은 귀가, 꾸며낸 이야기와(2디모 4,4) 분심 거리에 그토록 빨리 귀 기울이게 되다니, 조금 전에 거룩한 눈물로 세례를 받았던 눈이 즉시 헛된 것에 시선을 돌리다니, 조금 전에 달콤한 축혼가를 부르던 입이, 뜨겁고도 솜씨 좋은 언변으로 신부를 신랑과 화해하게 했으며 신부를 포도주 창고로 이끌었던(아가 2,4) 그 입이 다시금 상스럽고도 야비한 이야기로 되돌아가다니, 속임수를 꾸미고(시편 50,19) 헐뜯는 소리를 내다니.

주님, 이 허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렇지만 인간적 허약함으로 인하여 저러한 잘못에 다시 떨어진다 해도, 이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시편 113,7) 어진 의사이신 당신께 되돌아가렵니다. 그러면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는 그분께서(에제 33,11) 우리를 다시금 보살피시고 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호세 6,2).”」

(* 위 단락은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Pregare la Parola”, 이연학 번역, 분도, 2001년> 중에서 귀고 2세라는 분이 쓴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Epistola de vita contemplativa”의 부분 발췌이다. 귀고 2세는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에서 1084년 창설된 카르투시오Grand Chatreuse수도회의 초기 회원 중 한 사람이다. 스스로에 대해 침묵한다는 카르투시오의 영성에 따라 널리 알려진 바는 없다. 1173년에 공동체 책임자 자리에 있었고 아마도 같은 해 아니면 이듬해에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제9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가 1180년 소임을 마치고 1188년에 귀천했다.)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사전 준비

침묵과 고독의 장소

– 고독과 침묵의 장소: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를 데려다 놓도록 잠시 침묵 한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등 하느님의 현존을 긴장하여 받아들이는 몸동작이 중요하 다.

– 충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

–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려는 자세

– 렉시오 디비나의 목표는 하느님 관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취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분의 기도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

– 나 자신에게서 이탈,

나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 자신으로,

땅의 것들로부터 하늘의 것들로 탈출

– 나의 세례 재확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므로

나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내적인 침묵,

이는 식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

말씀을 듣기 위해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할 것.

– 나 자신의 무력함 고백,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흉내 내기가 아니고

진정 내가 잃은 양,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 중풍 병자이니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

시작 기도: (혹은 조용한 성가, 허밍)

성령 초대: 교회와 하나되어 성령을 초대한다.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경 위에 머무르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보호한다. 시편 119편의 적절한 대목을 낭독하거나 ‘오소서, 성령이여!’와 같은 기도문이나 성가를 활용할 수 있다.

신앙고백: 신경 안에서 성부의 아이콘인 그리스도를 본다.

성경읽기: 무작위로, 주관적으로 성경 본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주일 복음과도 같은) 선정된 본문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소리를 내어 읽는다. 다른 번역본(예를 들어 ‘공동 번역’과도 같은)과 함께 본문을 서로 확인하면서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다.

공부하기: 말씀을 영리하게 읽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의 경우 병행구를 확인하거나 권위 있는 요약본이나 주해서, 혹은 어휘 사전(참조. 주석 성경) 등을 활용하는 것이 유용한 도구들이 된다. 성경 본문에 관한 교부들의 말씀(예를 들어, 분도출판사 발행의 ‘교부들의 성경 주해’ 등)을 통해 영적인 요점을 파악하고 시야를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묵상하기: 읽은 내용에 대한 심화. 보조 자료 활용 가능. 병행구를 읽으며 본문의 메시지 확장, 신학적 요점 파악, 본문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 자신을 본문에 적용한다. 공동체와 교회, 그리고 인류 가족 안에서, 또 그들을 향한 나의 태도와 행동을 살펴본다.

기도하기: 성경 본문을 통해 나에게 말씀해오신 주님과 대화하며 나를 주님께 봉헌하며 감사하고 청원하며 전구를 청한다. 모든 것이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래와 함께 하는 성체강복으로 기도하기와 관상하기가 연결되는 것도 좋다.

관상하기: 신비로운 환상을 기대하거나 제멋대로의 상상이나 공상이 아니다. 영적인 항구함으로 말씀과 성령 안에 머묾, 마크로티미아μακροθυμία(makrothymia)이다. 하느님의 마음 안에, 은혜로움 안에, 성실한 마음 안에, 평화 안에 잠기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마음을 확장하는 것으로 힘 있는 말씀의 효과가 드러난다.

***

내 안에 그분의 초막을 짓고,

그분의 사랑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응답한다.

말씀을 춤추며 그분 앞에서 전례로 이를 거행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처소에 돌아갈 그때까지

나의 걸음걸음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로고스, 아드님, 나의 주님이시기를!

오로지 말씀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데려가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말씀께서

내 안에 오시어 머무르시기를,

내 안에 당신의 처소를 마련하시기를!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하게 되는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은총,

렉시오 디비나는

시간이 있기 전

삼위일체의 공간 안에서 아드님께서 거행하신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라는 초막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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