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여선생님을 주겠다.(Io Ti Darò La Maestra)”②

6. 성모님께서 하시는 말씀들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두 가지 측면이 드러난다. 첫째는 성모님께서 직간접적으로 성경을 인용하신다는 사실이다. 1845년 발도코 단지(순명의 띠)의 꿈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루카 9,58)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참조 – 집회 24,18 잠언 9,5) “나를 깨우치는 이는 영생을 얻으리라(Qui elucidant me vitam aeternam habebunt)”(집회 24,31-불가타 역)와 같은 성경 구절이 인용되고, 프랑스의 살레시오 집들 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주고”(잠언 8,17)라는 구절이 각각 인용된다.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의 말씀은 일정 부분 다소 고집스러우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결국 이는 성경 말씀이나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로 돈 보스코로부터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는 초대가 된다. 이러한 예로서는, “내 안에 한없는 신뢰를 하도록 하여라. 내 망토는 너에게 항상 안전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너희가 나의 성실한 자녀가 된다면 나도 너희에게 신실한 어머니가 될 것이다.” 하는 것과 같은 말씀들이다. 성모님의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자상하고 온화하게 거듭 반복된다는 점에서 성모님과 그 자녀가 맺는 관계에서 그분의 성실한 자녀가 되는 만큼 그분의 사랑을 최대한 누리게 된다는 호혜적 사실임을 알게 된다.

성모님의 말씀에서 지상 생활에 대한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아마도 돈 보스코에게 성모님은 나자렛 시골의 어린 소녀이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당신의 자녀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중재자로서 힘 있는 동정녀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 자신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시는 표현들은 돈 보스코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성모님에 대해서 가진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곧잘 이야기하는 식대로 ‘나자렛의 어린 소녀’라기보다는 “태양을 입으신 여인”(참조. 묵시 12,1)으로서 교회를 위해 활발하게 역할을 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곤 했다. 다시 말해서 돈 보스코 역시 자기 꿈에서 ‘승천하신 성모님’께서 능력을 발휘해주시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한편에서 성모 승천의 신비는 기초 신학에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역할과 맞닿아있다.(참조. P. Chavez, «Ecco la tua madre». Maria Immacolata Ausiliatrice, Madre e Maestra di don Bosco, ACG 414, 2012년, 3-38. 14쪽) 그러니까 당시는 성모님의 지상 생활에 대한 현존의 기억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상에서 살아계신 성모님의 현존을 이야기하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은 당신의 행동과 몸짓,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일상의 어둠과 수고를 넘어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면서’ ‘낙원의 어떤 부분’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 힘 있는 분이 되신다. 성모님의 이러한 강력한 도우심은 성모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열리고자 하면 할수록, 그리고 성모님과 사랑의 관계에 빠져들면 들수록 더욱 효과적으로 실현된다.

성모님은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잠언 8장과 집회서 24장의 말씀을 선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의인화되어 있는 두 책의 “지혜”에 궁전과 잔치의 이미지, 장미와 포도밭 등이 꿈에서 어우러진다. 돈 보스코의 꿈에서 “지혜”는 성모님과 동일시된다. 성모님은 몹시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시는 ‘지혜’ 자체가 되신다는 듯이 1인칭으로서 성경이 당신 입에 담아주시는 말씀을 직접 말씀하신다. 비르트Wirth는 이를 두고 “잠언에서 의인화된 지혜를 돈 보스코는 하늘에 오르신 성모님에 적용한다.”라고 표현한다.(M. Wirth, The Bible with Don Bosco: a Saleian “lectio divina”. I. The Old Testament, LAS, Rome 2009, 452쪽) 집회서의 내용을 두고도 비르트는 “돈 보스코가 습관적인 전례 거행에서조차 이렇게 성모님을 ‘지혜’로 알아모신다.”라고 분석한다.(같은 책, 526쪽) 이와 같은 잠언 8장과 집회서 24장의 내용은 꿈에서만이 아니라 돈 보스코의 다른 여러 저술에서도 등장한다.

이처럼 성모님을 지혜 자체로 동일시하는 것에는 8세기에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전통의 뿌리가 있다. 성모님의 탄생으로 시작해서 승천으로 마감되는 성모님의 생애가 무염시태의 교리로 관통되고 있듯이 집회서 24장은 동정녀의 승천을 거행하는 고대 전례에서 사용되었으며, 잠언 8장은 9세기경부터 성모 성탄 전례 거행에서 읽히기도 하였다. 2천 년의 교회 역사 안에서 이 두 성경 대목은 항상 성모님과 관련된 축제와 즐겨 연관되었고, 돈 보스코 시대에도 대부분 성모님 축일에 이 두 대목이 마치 서간문처럼 등장하기도 하였다. 한 예로서 원죄 없으신 동정녀의 잉태 대축일의 전야 미사나 축일 본 미사에서 독서로 낭독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전례에서는 대축일이라 하더라도 대개 전야 미사는 따로 없고, 본 미사에서도 제1독서로 창세 3,9-15.20을 읽는다. 9일 기도문에서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성모님을 찬미하면서 “동정녀 중에 가장 지혜로우신 분, 어머니 중에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이 남아있을 뿐이다)

※ 비오 9세는 1854년(돈 보스코 39세)에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다. : 『교회는 성서가 ‘창조되지 않은 지혜'(sapientia inc-reata)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지혜의 영원한 기원을 밝혀주는 그러한 말씀들을 성무일도와 거룩한 전례 안에서 사용함은 물론 단일하고 하느님의 지혜의 강생과 일치된 계획에 따라 예정된 동정녀의 첫 순간에도 적용시켜 왔다.(4항) … 교부들은 새 아담이 (그녀에게서) 탄생된 하느님의 어머니를 가시밭에 백합꽃(lillium inter spinas), 또는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omnino intacta), 항상 복된 땅(semper beata terra)이라 부르거나, 혹은 하느님 자신에 의하여 지어지고 또 해독한 뱀의 모든 간계에서 보호된 환희의 낙원(paradi-sum deliciarum)이라 부르거나, 혹은 죄의 벌레들에 의하여 결코 썩지 않고 시들지 않는 나무(lignum immascesibile)라 하거나, 혹은 언제나 맑고 성령의 능력으로 보증된 샘(fons semper illimis), 천상 성전(divinissimun tempulum)이라 부르거나, 불멸성을 지닌 보물(thesaura immortalitatis), 죽음의 딸이 아니고 생명의 딸(filia vitae)일 뿐이고, 정해진 일반법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독자적인 섭리로 부패되고 썪는 뿌리에서 항상 왕성하게 자라는 분노가 아니고, 은총의 싹(gratiae germen)이라고 호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21항) … 본인은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티 없이 깨끗하신 분으로서 지독히 사악한 뱀의 머리를 짓밟아 버리고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셨으며,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찬미이시고, 순교자들의 영예이시고, 모든 성인들의 기쁨이시고 화관이시며, 모든 위험 중에 가장 안전한 피신처이시고, 가장 신뢰있는 돕는 이(auxiliatrix)이시며, 당신의 독생성자 면전에서 온 지상에 대한 가장 능하신 중재자(mediatrix)이시고, 가장 튼튼한 보루(praesidium)로써 언제나 모든 이단을 파멸시키시고, 성실한 신자들과 민족들을 인류의 가장 큰 위험에서 구하여 주시고, 밀어닥치는 수많은 위험에서 본인 자신을 보호하여 주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유력한 보호로, 어머니인 가톨릭교회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모든 오류를 넘어뜨리고, 어떤 민족과 어떤 나라에서든지 매일 더욱 흥왕하고 번영하여 바다에서 바다에까지, 강에서 세상 끝까지 모든 평화와 안녕과 자유를 누리며 죄인들은 용서를 받고, 마음이 약한 이들은 용기를 받고, 괴로운 이들은 위로를 받고 위험에 처한 이들은 도움을 받고, 또한 그르치는 모든 이들은 정신의 어두움이 걷히어 진리와 정의의 길로 돌아오게 하시어, 하나의 양우리와 한 목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바라고 계시리라는 확실한 희망과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달아들고 있다.(34항)』

비오 9세의 무염시태 교리 선포 회칙 외에 돈 보스코 역시 <놀라우신 하느님의 어머니Le maraviglie della Madre di Dio>라는 저술을 통해서 “교회가 마리아께 적용한 표현이나 상징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이 모든 피조물에 앞서 첫 번째로 태어나신 분, 가장 뛰어나신 보호자, 도움이시며, 인간을 위한 지주이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OE XX, 277)라고 서술한다. 사실 돈 보스코가 무염시태의 교리에 관한 나름대로 이론을 정립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심취하였다고는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성모님을 지혜와 동일시한다는 사실과 교의적인 배경을 파악하는 것 외에도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서 품위 있는 남성이 어린 소년 보스코에게 기품 있는 여성을 소개하면서 나누었던 대화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 한 분이 나타났다. 그는 하얀 겉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으며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 소년들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면서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곧바로 설명해주어라.”라고 말했다. 당황하고 놀란 나는 그분께 내가 그 녀석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아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소년들은 말다툼과 고함과 불경한 말을 그치고 나와 말하고 있는 분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분에게 물었다.

“제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지, 그처럼 네게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혜의 연마로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디서 어떤 식으로 지혜를 연마하라는 말씀이시죠?” “내가 네게 여선생님을 주겠다. 그분의 지도 아래 너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분 없이는 지혜라는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의 아들이란다.” “제 어머니께서는 허락 없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내 이름은 나의 어머니께 여쭤보아라.” 그 순간 나는 그분 곁에 별처럼 찬란히 빛나는 눈부신 겉옷을 입은 존엄한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돈 보스코 회상, 44-45쪽)』

존귀한 남성이 어린 요한 보스코에게 여선생님의 보호를 약속하고, 요한 보스코는 그분의 지도 아래 지혜를 연마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소위 지혜라는 것이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라 한다. 그 순간 여선생님의 정확한 임무, 곧 요한 보스코가 “순명(규율)”과 “지혜(지식)”를 연마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존귀한 분의 애초 계획은 여선생님과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여선생님의 제자가 그 존귀한 분과 여선생님이 이루는 신뢰와 사랑의 상호 관계 안에 들어가야만 성공할 수 있는 계획이다. 이처럼 당신의 제자를 어머니의 보호에 맡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니 십자가 밑에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께 제자 요한을 맡기셨다.(참조. 요한 19,26-27)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집회 4,11.16-18) “지혜…어떠한 신비도 감추는 일 없이…”(지혜 6,22) 이와같이 돈 보스코는 여선생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여선생님의 학교 학생이 되어 지혜의 인도를 받아 그분과 함께 성경이 이야기해주는 지혜의 여정을 간다. 성모님의 지혜를 묵상하고 그 길을 마음에 새겨 걷는 복된 이는 마침내 숨겨진 지혜의 비밀까지도 알게 될 것이다.

7. 특별한 점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의 교육적 개입을 살펴본다면 성모님은 단연코 당신의 제자인 돈 보스코와 돈 보스코의 자녀들에 대한 ‘감성교육’(l’educazione affettiva)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개입을 보여주는 꿈은 ‘장미꽃 길’ 꿈에서부터 시작한다. 안내자는 MB 버전에 따를 때 ‘하늘의 여왕(천상의 모후la Regina del Cielo)’으로서 돈 보스코를 그 장미 길로 걷도록 초대하신다.

성모님의 초대를 받은 돈 보스코는 피를 흘리면서도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길을 나아간다. 고통스러운 여정이 끝나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제자에게 그 고통의 의미들을 설명해주신다. 그 설명에 따를 때 성모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의 대부분은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교육적 내용이다. 장미와 가시를 뚫고 나아가는 길은 살레시오회의 교육적 사명이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데에는 ‘고행의 신발(le scarpe della mortificazione-fma번역은 절제의 신발)’이 필요하다. 성모님은 『땅바닥에 있는 가시는 인간적 사랑과 미움, 감성적인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써(호감이나 비호감으로) 교육의 참된 목적에서 빗나가게 하고 괴롭히고 그 일을 진척시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월계관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 (그 대신) 장미는 나와 너의 모든 협력자를 구별케 해주는 열렬한 사랑의 상징이다. 다른 가시들은 너를 괴롭히는 장애물, 고달픔, 나쁜 일들을 의미한다.』라고 돈 보스코 몸소 설명하신다.

꿈은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라. 사랑과 절제로 모든 것을 이길 것이고 가시 없는 장미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가시 없는 장미’, 완전한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 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더는 장애가 없어 고행과 절제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장미꽃 길을 가는 여정은 인내로운 사랑의 수련을 요구하는 길이다. 사랑의 수행 과정을 교육자들이 청소년들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자 하는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걷는다. 그런데 꿈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 함께 도착한 곳이 가시 없는 장미로 장식된 으리으리한 궁전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육자와 젊은이들이 함께 그곳으로 들어간다. 함께 살고 형제로서 함께 누리는 기쁨이 천상 기쁨의 기본이다. 고행과 절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사랑의 능력을 온전히 얻는 데 방해되는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청소년과 함께 나아가는 길에서 내가 겪는 고행과 절제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꿈은 1847년에 꾸었던 꿈이지만, 훗날 1864년의 첫 번째 살레시안들에게 이야기됐다. 꿈을 이야기하면서 돈 보스코는 “꿈 이야기들을 통해서 성모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끼리 모였으니 우리 개개인이 성모님께서 우리 회를 얼마나 생각해 주시는 가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늘 더욱더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꿈이 아닌 성모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것을 이야기해주겠습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께 신뢰하기를 바라십니다.”라면서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모님의 특별한 총애, 수도회의 교육적 사명, 청소년들과 교육자들의 정서적인 성숙, 이런 내용이 아주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꿈이다.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가시 없는 장미정원의 이야기는 정결과 관련된다.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의 교육적 행동은 하나의 이미지 안에 항상 두 측면을 담는다. 첫째는 부정적 측면인데, 악마와 원수들의 책동으로부터 정결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내용이고, 둘째는 긍정적 측면으로서 완전한 사랑의 실행을 강조하는 측면이다. 이는 돈 보스코의 교육 체계 안에서 소위 ‘아모레볼레짜’라는 특별한 이름을 얻는다. 교육자뿐만 아니라 교육자와 함께 있는 아이들이 저마다 친구의 사도가 되도록 하는 사랑이다. 성모님의 유일한 교육적 수단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을 요구하는 부드럽고도 강한 자애로움이다. 그 사랑에 신뢰와 자녀다운 효성의 순명으로 응답하는 사랑이다. 여기에 살레시오 사목의 성공 열쇠가 있다. 우리가 죄와 맞서 갈등하는 청소년들의 양심과 마음의 신비를 관통할 수만 있다면, 성모님처럼 신비스러우면서도 힘있게 청소년들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하면서 그러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저러한 행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어머니의 권위를 지닌 마음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위하여, 은총의 힘으로 말해서 그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이것이 살레시안들의 희망이요 마음이다.

8. 정결과 순결

손수건 꿈에서 성모님은 정결의 덕을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처음에 성모님이 애들에게 나누어준 손수건은 컸고, 금색으로 수놓아져 있었으며 그 손수건에는 ‘Regina Virtum(덕의 여왕)’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손수건을 나누어주신 분은 그 귀한 손수건을 어떻게 보존하는지 설명한다. 첫째는 의도적으로 유혹에 노출되지 않도록 할 것, 둘째 유혹이 갑작스럽게 찾아들면 즉시 주님께 달려가기이다. 코끼리 꿈에서 한바탕 재앙과 야단법석이 지나간 뒤에 애들에게 “나쁜 일을 한 불행한 친구들의 끝이 어떠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겠느냐? 그것은 깨끗함에 반대되는 말을 나누었기 때문이며 깨끗하지 못하며 거짓말하고 나쁜 행동을 한 결과”라면서 파멸에 이르게 된 친구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신 바 있다.

뱀과 아베 마리아 꿈에서는 낯선 사람이 묵주기도의 상징인 밧줄로 엄청나게 악마의 상징인 큰 뱀을 죽인다. 뗏목 꿈에서 마리아는 모든 위험을 보고받고 그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아이들을 안내하신다. 지옥 꿈에서 성모님께 대한 신심은 청소년들이 악마의 올무를 끊는 칼 중 하나로 소개된다.

* 참고로 지옥 꿈에서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언급될 뿐 성모님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시지는 않는다.

이 외에도 순결과 정결은 청소년들이 하늘의 기쁨을 더욱 맛보게 하고, 형제 회원들이 수도회의 더욱 영광스러운 미래를 맛보게 해 줄 조건으로 드러난다. 1875년의 신비한 말과 시련의 나라(성모님의 보호)에 관한 꿈에서 인생의 끝까지 순결을 보존한 젊은이들은 문자 그대로 성모님의 망토 아래에 순식간에 날아들고, 다른 아이들은 걷거나 발을 끌고 망토에 다가가야 한다. 란쪼의 꿈에서 돈 보스코는 도메니코 사비오에게 수도회의 미래에 관해서 묻는다. 이에 도메니코 사비오는 수도회의 영광과 밝은 미래에 관해 대답해준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들이 성모님 신심을 깊게 하고 하느님이 아주 좋게 보시는 정결의 덕을 보존하여야 합니다.”라는 조건을 단다. 같은 경고는 양치는 소녀의 이야기에서도 수도회의 미래를 위해서 “성모님의 덕을 계속 일구도록”(MB XVII, 74쪽)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도메니코 사비오가 등장하는 란쪼의 꿈에서는 돈 보스코가 도메니코 사비오에게 임종시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돈 보스코는 ‘정결’이라는 덕이었다는 대답을 예상하듯이 정결의 덕을 지켜서였느냐고 첫 번째로 묻는다. 그러나 사비오는 정결의 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구세주의 사랑스럽고 능하신 모친께서 계셔 주셨다.”(MB XII, 592쪽)라는 사실이었다면서 정결의 덕이 다소 상대화되는 감이 없지 않다. 사비오는 돈 보스코에게 관계의 우선순위를 상기하듯이 말한다. 성모님을 본받는 것, 특별히 그분의 정결을 본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 상호성 안에서 그분을 본받으며 정결의 덕이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이 오가는 사랑 안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사랑이 성숙해져 간다.

달리 말해서 정결은 모든 덕의 여왕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오래된 가르침에 따라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늠되어야만 한다. 사실 사랑을 사는 것, 살아내는 것이 모든 덕의 진정한 형태(forma)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은 모든 덕의 실체이다. 사랑의 영향 아래, 정결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을 배우는 학교가 된다. 자제력은 자기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한 것이다. 정결을 지키는 사람은 이웃에게 하느님의 신의와 사랑을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46항)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을 종합할 때 돈 보스코가 강조하는 ‘정결’을 일부에서 비판적으로 성性에 대한 혐오증과 같은 극단적인 결벽증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돈 보스코의 정결은 자연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여러 이유와 함께 인간의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직접적인 교육 분야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정결은 인간의 성性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정결은 오히려 이기심과 공격성의 위험으로부터 방어할 줄 알고, 자신의 충만한 실현을 향해 나아갈 줄 아는 영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R. Carelli, Ha fatto tutto lei, 18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정공동체>, 33항)

9. 돈 보스코의 반응

돈 보스코의 성덕, 그의 카리스마와 사목의 결실이 보여주는 증거는 아홉 살 꿈에서 기품있는 여선생님의 제자요 자녀로서 그분이 세우신 양성 계획에 따라 실제요 현실이 되어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어린 요한 보스코가 꿈에서 위임받은 임무를 받아들이고 점진적으로 성취해갔다는 것만이 아니라 돈 보스코가 꿈에서 받은 사명을 자기 스타일로 완수해갔으며, 이것이 부여받은 임무와 분명하게 맞아들어갔다는 것을 말한다. 돈 보스코는 성모님의 지시를 따르면서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교육자가 되었다. 돈 보스코는 성모님의 초대를 받아 성모님으로부터 배우면서 성모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랑하며 사랑을 배우듯, 사랑을 배우면서 사랑하듯, 믿으면서 믿게 되고 믿게 되어서 더욱 믿게 되는 사랑과 신뢰의 상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성모님의 말씀과 행동을 만나는 돈 보스코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는 돈 보스코의 내적 여정에 관한 몇 가지 특성을 거론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제공하는 이는 물론 돈 보스코 자신이다. 돈 보스코는 자기의 꿈들을 이야기하면서 망설임 없이 자기의 감정이나 열정, 걱정, 두려움, 심지어 자기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계획과 사명에 대한 자기의 저항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표출한다. 돈 보스코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기 아이들에게 자신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저녁 말씀을 통해서 아이들이나 자기 형제들에게 이런 꿈들을 이야기해주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저의 죄까지도 포함하여 저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하곤 하였다.(MB XI, 261쪽)

첫째로 돈 보스코의 성모님 꿈에서 돈 보스코에게 두려움과 그에 대한 저항이 크면 클수록 그의 선생님인 마리아를 향한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고 성모님과의 협력이나 상호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한다. 아홉 살 꿈에서 어린 요한 보스코는 혼란스러워하고 울면서 여인에게 말씀해주시도록 청한다. 요한 보스코는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게 당황하면서 혼란스러워한다. 자애로운 성모님 앞에서 그분을 마주하면서도 안심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한다. 1844년 양치기 여인 꿈에서 젊은 사제 돈 보스코는 요란한 짐승의 무리에 끼어서 “모든 짐승이 함께 으르렁대고 포효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가장 용감한 이를 겁주려는 악마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다.”(MB II, 244쪽)라고 묘사하면서 무서움을 느끼면서 도망치려고까지 한다. “너무나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할 때 단정히 차려입은 한 양치는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이 이상한 짐승들과 함께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렇게 돈 보스코는 마지못해 여인을 따라가며 세 번이나 쉰다. 앞장서 가는 여인을 따라가는 중에 이상하게도 휴식을 취할 때마다 사나운 짐승들이 순한 양으로 변하고 수효는 점점 더 많아졌다. 돈 보스코는 피곤에 지쳐 길가 옆에 앉아서 좀 쉬려고 하고 그 여인은 계속 가기를 재촉한다. 넓은 정원이 나타나고 성당 끝의 문이 있는 곳에 다다른다. 애들 숫자는 더 많아지고 양들이 목자가 되며…그래도 돈 보스코는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미사를 드려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 그냥 가고 싶었다.” 사제로서 가장 적당한 핑계 아닌 핑계였다. 여인은 돈 보스코의 이러한 뜻마저 온화함과 단호함으로 고집하며 멀리 남쪽을 바라보라면서 장차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보도록 초대한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돈 보스코는 간신히 긴 여행과 여행 중의 휴식, 그가 본 집, 성당 그리고 다른 성당이 뜻하는 의미에 대해서 여인에게 묻는다.

돈 보스코의 두려움과 저항 비슷한 것은 발도코 단지(순명의 띠) 꿈에서도 나타난다. 돈 보스코는 버림받고 타락한 애들이 난장판을 치고 있는 상황을 만나 이를 “지나치려 할 때” 그들에게 가서 일하라는 어떤 부인의 초대를 듣고 이에 순명한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는 거의 동시에 젊은이들을 모을 적절한 장소가 없고 도와줄 만한 조력자들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을 시작한다. 성모님께서는 일단 당신의 제자가 원하는 장소를 찾아주신다. 선생님이신 마리아의 지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돈 보스코의 저항을 보이는 모습은 1866년의 양치기 소녀 꿈에서 다시 나타난다. 양치기 소녀는 돈 보스코에게 10살 때의 꿈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데, 돈 보스코는 피곤하고 지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1866년의 꿈이니 돈 보스코의 나이로 이미 환갑이 된 나이이다. 양치기 소녀는 광활한 국제무대를 돈 보스코에게 보여주는데, 돈 보스코는 이 넓은 곳에서 이런 일들을 할 사람을 모두 어디서 구하느냐고 한탄하며 되묻는다. 이러한 걱정에 돈 보스코는 양치기 소녀로부터 돈 보스코의 후손들이 선교사가 될 것이라는 위로와 약속을 얻는다.

1845년 발도코 단지와 토리노의 순교 성인들 꿈으로부터 돈 보스코의 신뢰, 순응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선생님이자 안내인이신 분과 능동적으로 상호 교감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있음을 본다. 도우심을 청하기도 하고 그가 보고 듣는 것을 이해하기도 하며, 선생님의 교육적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이를 자기의 청소년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이 꿈은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 단지 전체에 관한 꿈이고, 그중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이 단연 돋보인다. 그러나 이 꿈에서 지배적인 느낌은 놀라움이고 경이로움이다. 돈 보스코는 세 분의 순교 성인들을 서둘러 따라가고 마리아께 인도된다. 마리아께서는 든든한 수호성인이신 그 세 분과 함께 돈 보스코를 격려하면서 다가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맡겨진 소임과 사명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신다. 돈 보스코는 감격하여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난 후에는 성모님의 발아래에 자신과 사목을 다시 봉헌한다.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돈 보스코는 동정녀께서 가리키신 그 집(피나르디씨 집)을 서둘러 방문했다.”(MB II, 344쪽)

제자의 신뢰를 얻으신 선생님 마리아께서는 돈 보스코의 마음을 더욱 깊고 또 깊어지게 하셨고, 돈 보스코 자신이 슬기로운 교육자, 더욱 은총에 열려 순응하는 조력자가 되게 하셨으며, 맡겨진 사명에 더욱 열심히 투신하고 헌신하는 협력자가 되게 하셨다. 장미꽃 길의 꿈, 코끼리에 관한 꿈, 뗏목 꿈들은 돈 보스코의 이러한 진보와 발전의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장미꽃 길의 꿈에서 돈 보스코는 성모님께 순응하며 온유하게 협력한다.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돈 보스코는 적극적으로 성모님의 격려를 구한다.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도망치고 싶어 하는 유혹이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면, 제자 돈 보스코는 친절하게, 존경을 담아 선생님이신 마리아께 자기의 생각을 알리고 설명해주시기를 청하며 이내 선생님의 지시를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코끼리 꿈에서 돈 보스코는 단지 관람자일 뿐이다. 교육적인 행동의 주인공은 마리아이시다. 젊은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분은 단연코 그분이시다. 그러나 뗏목 꿈에서는 그 반대다. 계속 성모님을 부르짖는데도 성모님은 마지막에만 등장하신다. 강력한 성모님의 중재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교육 활동의 주체요 주인공은 돈 보스코이다. 돈 보스코는 코끼리 꿈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것을 잘 보았다는 듯이 돈 보스코는 뗏목 꿈에서 이제 자기가 그 행동의 주체가 된다. 돈 보스코의 실망이나 공포, 슬픔 등 말 그대로 돈 보스코를 압박하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불가능한 요구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죄와 그것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 돈 보스코는 이제 이러한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서 공개적으로 뛰어들고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기 삶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뗏목 꿈 마지막 부분에서 성모님은 “내게 효성스러운 자녀가 되렴. 나는 너희에게 인자한 어머니가 되어주마.”(MB VIII, 282쪽)라는 말씀으로 ‘상호성reciprocità’에 다시 한번 초대하신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29)에서처럼 ‘~하면, ~할 것’이라는 패턴이다. 착하신 선생님이신 성모님께서는 지혜이신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당신 자신이 지혜가 되어 당신의 성실한 제자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가히 예방교육 체계의 방법론은 자녀와 어머니 간처럼 정서적이고 애정적인 개입이다. 선생님 마리아는 갖은 시험을 거쳐 돈 보스코가 이러한 성숙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받은 그 큰 사랑으로 돈 보스코를 사랑하시고, 돈 보스코는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의 역동, 추동推動은 거침없이 널리 퍼져나가 젊은이들과 조력자들을 참여시킨다. 이러한 지속적인 ‘사랑의 실천esercizio della carità’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전선을 통해서 전류가 흐르듯이 청소년들을 선생님들이나 장상들과 하나로 묶어 하느님 사랑의 길로 흘러 나아간다. 이러한 사랑은 지쳐 쓰러짐 없이 용감하게 임무에 항구하도록 부추긴다. 실로 이러한 성모님 신심은 돈 보스코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의 하나가 된다. 돈 보스코의 소명과 임무는 성모님의 ‘모성적 애정’이라는 실천적 기준에서 강한 영감을 받는다. 이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적인 생각의 발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 역동이다. 그러므로 돈 보스코의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최선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섭리를 믿고 맡겨드리며 최선을 다하는 사랑이며 우리 모두의 인생과 청소년이라는 인생의 천을 짜나가는 데에 한 올이라도 놓칠까 봐 섬세한 날줄과 씨줄의 미묘함을 꼼꼼히 엮어가는 과정이다.

10. 더 묵상해 볼 주제들

결코 다함이 없을 ‘돈 보스코와 성모님’이라는 주제이다. 성모님께서 돈 보스코 카리스마, 특별히 살레시오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는 여전히 심화해야 할 주제가 많지만, 대개 4가지 정도를 더 묵상해 볼 수 있다. : 1) 돈 보스코의 영적 여정에 미친 성모님의 역할 2) 청소년들의 정서 및 감성 교육 우선권la priorità dell’educazione affettiva dei giovani-정결 3) 지혜이신 성모님 4) 돈 보스코가 생각한 여성 사목

10.1 돈 보스코의 영적 여정과 성모님

돈 보스코의 영적 여정과 관련하여 성모님에 관한 돈 보스코의 꿈들을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를 통해 돈 보스코와 성모님 간에 맺어진 관계의 밀도가 점진적으로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모님께서는 돈 보스코를 격려하시고, 교육 사업을 계속하도록 부추기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 성모님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와 살레시오 집들을 더 나은 미래로 꾸려가시고자 노심초사하신다. 이렇게 읽어나가다 보면 성모님의 개입이나 솔루션, 악마의 올무에서 보호되는 데에 돈 보스코 스스로 자기 힘으로 한 일은 실로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레뮈엔 신부는 MB에서 “돈 보스코의 모든 영감은 그 무엇도 인간적인 동기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 보스코는 초창기에 잠자는 중 그를 거쳐 간 빛나는 환시들을 돈 루아나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MB II, 406쪽)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하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해서 돈 보스코에게 진지한 식별의 임무가 면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책임이 뒤따르는 모든 결정은 성숙하고도 신중하게 천천히, 진지하고 슬기로운 이들과의 논의를 거쳐 개인기도 중에 돈 보스코 자신이 내려야 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 되었다. “(심지어) 논리적인 이율배반도 그를 움직이지는 못했으며 이러한 특성은 돈 보스코의 온 생애를 관통한다. 어떤 결심을 한 후에는…그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같은 책)

한 예로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의 건축에 관련된 내용만 보아도 충분하다. 단돈 몇 푼으로 시작했던 출발로부터 하나의 장애를 치우고 나면 또 나타났던 다른 장애물…돈 보스코는 이를 두고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잠언 9,1)라는 말씀 그대로 “성모님께서 당신의 집을 지으셨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은총이었다.”라고 술회한다. 그렇지만 성모님 편에서도 여러 차례 돈 보스코의 꿈을 통해서 장소를 선정해주시고, «Hic domus mea, inde gloria mea»라는 말씀을 몸소 주셨었다. 돈 보스코에게 꿈은 바로 현실이었고, 온갖 시련 속에서도 영적인 위로의 선물이었으며, 이 모든 것이 성모님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영적인 위로는 기쁨과 평화의 감정 정도로 축소되지 않는다. 진정한 영적 위로를 접한 이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총과 은사에 따라 실질적인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살아낸다. 돈 보스코의 경우 꿈에서 만난 성모님의 현존으로 그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으며, 청소년의 교육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명에 대한 의지와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고, 교육자요 수도회의 창립자로 그가 감당해야 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알아간다 했듯이, 성모님의 사랑 안에 성장해 간 돈 보스코에게는 하느님 사랑과 그분을 섬기는 올바른 길에 있다는 확신이 그렇게 깊어갔던 것이다.

10.2 정서 / 감성교육 우선순위-정결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위로의 은총을 통하여 사람은 감동하고 변화된다. “지성과 의지는 본성적으로 참(眞)과 선을 지향하면서 이로부터 물리적 영역으로 넘어간다.…모든 성인의 이러한 체험은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영역이다.”(R. Girardello, Consolazione spirituale, in L. Borriello – E. Caruana – M.R. Del Genio – N. Suffi (edd.), Dizionario di mistica, LEV, Città del Vaticano 1998, 338쪽)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헌신해가면 해갈수록 하느님의 위로는 점점 더 필요해지고, 더 특별해지며, 더 예민한 것이 되어 간다. 그래서 하느님의 위로는 시련이 덮치더라도 점점 더 역동적인 것이 되고, 삶을 성장시키는 것이 된다. “어쩌면 영적인 삶의 모든 계절은 위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통하여 사랑하도록 부추기는 예술이다. 돈 보스코가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이는 사랑한다. 특별히 청소년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는 모든 것을 얻는다.(Chi sa di essere amato, ama, e chi è amato ottiene tutto, specialmente dai giovani.)”(P. Braido, Due lettere da Roma, 370)라면서 그토록 효과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신적인 교육적 지혜인 것이다.

사랑의 충만을 위해 괴로워도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이 길에서 교육자가 되었든 청소년이 되었든, 그들에게 가장 큰 격려는 바로 성모님의 자애로운 현존이다. 사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체험만이 사랑하도록 가르칠 수 있고, 희생과 수고를 감내하기에 필요한 용기를 줄 수 있다. 성모 신심 안에서는 악으로부터 도망치고 선을 선택하도록 하는 마리아 신심의 예방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뿌리이신 성모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사랑을 배워 그 사랑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이 바로 성모 신심의 목표이다. 그저 감각적이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말초 신경의 자극만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 현대 사회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알고 배우려는 젊은이들에게 “정결은 이러한 사랑에 접근하는 열쇠요 그러한 사랑과 다른 덕, 특별히 ‘영적인 감수성’을 개발하여 초자연적인 덕들을 발전시켜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R. Carelli, «Ha fatto tutto lei», LAS, 2015년, 182쪽)

따라서 예방 교육적 시각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히 정결의 덕을 개발하도록 강조하면서 정결의 덕이야말로 모든 부르심의 여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확신한다.(Cfr. E. Valentini, L’immacolata nella missione educativa di San Giovanni Bosco, in Aa.Vv., L’Immacolata Ausiliatrice, SEI, Torino 1955, 89쪽) 결혼 생활이 되었든 봉헌 생활이 되었든 양자 모두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성모님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사랑의 능력, 그것도 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10.3 성모님과 성경의 지혜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어떤 면에서 성모님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좁은 의미의 신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비오 9세의 무염시태 교의(형언形言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에서 보듯이 성모님은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독생 성자의 어머니를 선임하시어 그녀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을 취하여 때의 충만성 안에서 탄생되게 하셨고, 또한 그녀가 당신께 대한 단일한 마음으로 만족해할 만큼 그렇게 만물을 초월한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던” 분으로서 창조되지 않은 지혜로서 “원죄의 더러움에서 깨끗이 보호된” 지혜이시며, 죄 없으신 아드님과의 온전한 일치 속에서 성부의 계획에 완전하게 일치하신 지혜이시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사랑의 상호성reciprocità 안에서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에 순응하여 사시면서 인간 구원의 사명의 조력자가 되신다. 성모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과 충만한 통교 안에서 순결과 동정의 은총과 정결의 은총을 나누어주시는 분이 된다.

성경의 관점에서 성모님의 이 완전한 모습은 구약에서 신비스럽게도 ‘이중적 성격’을 띤 의인화된 지혜의 모습으로 예표된다. 즉 한편에서 성모님은 하느님과 아주 가까운 분으로서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M. Hauke, Introduzione alla mariologia, EUPRESS, Lugano 2008, 32쪽) 이러한 이중성에 관한 심층적 연구는 세기를 두고 그리스도론cristologia, 성령론pneumatologia, 마리아론mariologia 등의 분야에서 특별히 심화되어 왔다. 하지만 마리아론적인 해석은 특별히 전례 운동으로부터 강하게 비판을 받았고,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은 오로지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다소 배타적이고 편협하게 해석되어온 관점들이라고 해서 유의미한 결과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서 보이는 지혜의 모습은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성경에 나오는 ‘지혜sapienza’는 희랍어이든 히브리어이든 모두 여성이기 때문이다. 고대 언어학자들은 이런 내용이 그저 단순한 문법적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혜에 관하여 마리아론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창조의 실제와 은총의 열매를 묘사하는 중요한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지장이 될 수 있다. 마리아의 여성적인 요소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칫 창조와 은총의 거부로 비약할 수도 있다.

구약의 신학은 창조 신학의 완성이다. 이는 말씀(율법과 예언서)을 주의 깊게 듣는 데서 시작하여 이율배반에도 두려움 없이 경험이 주는 교훈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현실을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한다. 돈 보스코의 기록과 꿈에서 성모님과 지혜의 동일시는 체계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성경의 지혜와 살레시오 교육적 지혜의 만남이 된다.

들음과 관찰은 루카복음에서 특별히 성모님께 속한다.(참조. 루카 2,19.51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지혜는 선물로서 기도를 통해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얻어진다.(Cfr. L. Mazzinghi, Il Pentateuco sapienziale, Edizioni Dehoniane, Bologna 2012, 126쪽) 그러나 이 은총과 선물은 지혜의 제자에게 순응으로 기꺼이 선생님이신 지혜의 제자가 될 때만 얻어진다. 곧 선생님이신 지혜와 상호성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은총의 선물은 나의 온 인격을 기꺼이 던지는 중에 임무, 개방성, 순응을 통해 주어진다.

성모님께서 지혜이시라면 이러한 특권은 ‘부러운 보물’이 아니라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라는 말씀처럼 성모님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이들(immacolati)”이 되는 길을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인간학적인 낙관주의, 사랑amorevolezza, 거룩함의 교육학pedagogia della santità, 청소년이 주인이요 주체가 되는 것 등등이 하느님의 지혜에 뿌리를 둔, 그리고 돈 보스코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도달한 살레시오회의 카리스마이다. 성모님의 모성적 중재의 체험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돈 보스코에게는 이 땅 육친의 어머니였던 마르게리타의 교육적인 중재에 힘을 입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여성적 중재의 체험이 성모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두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투사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체험은 점진적으로 돈 보스코가 여성 사목을 향해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긍정적으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아드님 예수님만이 하느님이시다. 마르게리타처럼 돈 보스코의 어머니는 피조물이다. 성모님 역시 마르게리타처럼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계획을 계시한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창세 2,18) 하는 말씀처럼 여성이 아담의 협력자요 ‘도움ausiliatrice(돌보심, 배필)’이 된다. 그런 의미로 성모님은 무엇보다도 여성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 안에서 인간에게 특별한 모습으로 여성을 협력자로 주신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서로를 선물로 주신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여성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 남성성에 대한 여성성의 열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도움ausiliatrice’이란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에제르(עזר, ezer)이고 이 말은 히브리 성경에서 21회나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어떤 필요가 있을 때 인간적인 도움을 표현하기 위해 3번,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가리키기 위해서 16회, 그리고 여성 인간인 하와를 지칭하는데 2번이 사용된다. 결국 ‘에제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하와 두 실체에만 적용되는 어휘이다. 분명히 ‘여성’은 하느님의 에제르가 인간 세상으로 들어가는 독특한 통로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에제르이시다.(V.R. Mollenkot, Dio femminile. L’immaginario biblico di Dio come donna, Messaggero di Sant’Antonio, Padova 1993, 79쪽)

여성과 여성의 소명에 관해 대단히 긍정적인 이러한 견해는 역사 안에서 상당히 반대되는 측면으로 나아간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살레시오회의 역사 안에서 이론상으로라기보다는 사목 실천 면에서 살레시오 수녀회의 설립으로 밝혀진 바 있다. 돈 보스코 자신이 이러한 여성 사목에 대해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던 프로젝트였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성모님께서는 돈 보스코의 꿈과 교황님의 분명한 지시를 통해서 살레시오회 안에서 소녀들을 위한 여성 사목의 필요성을 위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기에 이르렀다. 소녀들을 위한 여성 사목에 대한 초기의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돈 보스코의 성모님 꿈에 관해 분석할 때 이러한 분석이 가히 여성 신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들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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