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위치’만을 뜻하지 않은 “가운데”, 혹은 “중심”, “중앙”이라는 어휘들이 있다. 어떤 이가 사람들 “가운데”에 있거나 “중심”에 있다는 것은 그를 향해 주변의 다른 이들이 시선을 향하고 있으며, 그가 다른 모든 이의 시선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중심에는 제대가 있고, 어떤 모임의 중심에는 주관자의 의자나 탁자가 있다. 누군가가 중심에 있다는 것은 중앙에 있는 그를 향해 모든 이가 귀를 열고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 중심에 있는 이의 입장에서는 모든 이가 볼 수 있고 또 알아보게 하려고 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중심에 있고 중앙에 있다는 것은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의미에서 다른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모범이 되는 상황에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사람들의 중심에 있고 싶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으며 돋보이는 위치에 있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마르 12,30과 병행구)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계명은 그 무엇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자기애自己愛’를 두고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교회의 위대한 그리스 박사the great Greek doctor of the Church’라고 호칭한 막시모 콘페소르(Maximus the Confessor, 580~662년)는 『모든 악의 뿌리(참조. Capitoli sulla carità III, 56-57)』라고 비난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곧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참조. 레위 19,18 마르 12,31과 병행구) 자기애를 해체하라고 말하는 셈이다. 성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성인은 수도자들에게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72,11)』 하시는데, 성인 역시 수도자가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며 자기 스스로 자기 사랑의 대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자기애의 해체를 전적으로 살려고 했던 모습을 만난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서 메시아보다 먼저 등장하면서 하느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메신저가 되어 사람들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가장 먼저 말하는 이가 된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눈여겨보며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하며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사람들이 정작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하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기가 외치는 회개에로의 초대가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17 마태 3,11 요한 1,15.30)고 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내 뒤에(ὀπίσω μου, opíso mou)” 오시는 분,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의 일개 제자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하고,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하면서 자신은 가당치 않은 존재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제4복음서에 따를 때 세례자 요한은 심지어 자기의 제자들에게마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아니다”(요한 1,20-21) 하면서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님”(요한 1,25)을 세 번이나 되풀이한 후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자기 제자들더러 예수님의 “뒤에” 따라가라고 하면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요약한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자기애의 해체에 성공하면서 항상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에 둔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지체”(1코린 12,27 에페 1,23 등), “그리스도의 약혼자”(2코린 11,2), “어린 양의 아내가 될 신부”(묵시 21,9)인 교회 역시 “주님”만이 돋보이고 그분만이 들리도록 해야 하는 존재이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교황이든 주교이든, 사제이든 수도자나 평신도이든 누구를 막론하고-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는 늘 일상생활이나 전례, 혹은 대중적인 집회에서 저마다 중심이 되고 중앙에 서서 주목을 받고 싶어 안달하는 일이 빚어지고 만다. 많은 이가 주님의 사목자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건 사람들이면서도 회중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지만 중심에는 그리스도만이 계셔야 한다. 사목자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는 표징일 뿐이며 신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실이 행여 흐트러지지나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관리해야만 한다. 어쩌면 거룩한 전통에 따라 지내는 성체성사의 성찬례를 제외하고는 전례 안에서조차 사목자들이 측면에 위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주님의 현존을 기리는 감실마저 가릴 만큼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왕좌와도 같은 사제석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들은 볼썽사납다. 함께 기도한다고 하는 자리에서조차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여 함께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을 마주하고 서거나 앉아서 눈을 굴리며 스스로 중심이 되어 주관자 행세를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분명히 말해야 한다. 전례에서 보고 살아가는 상징적인 그 내용이 그대로 우리 일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거룩한 전례라고 하더라도 교황이 되었든 주교가 되었든, 또 수도원장이 되었든 그가 중앙 제대를 가릴 정도로 버티고 앉았다면 평상시 다른 곳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가 될 것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나선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마르 9,34) 하는데 열을 올리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6-37)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중심에 결코 서보지 못하고 소외되어 낮은 자였던 작고 연약한 존재를 중심에 두셨다. 자기애의 해체라고 하는 이 예술은 실로 놀라운 그리스도교의 예술이다. 우리는 이를 세상에 파견을 받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좇으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 형제들 가운데에 계시면서도 “시중들며 섬기는 이…섬기는 사람”(루카 22,27)으로서 가장 낮은 자가 되시고 종이 되시고자 했던 바로 그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사람이다. 사랑의 사람인 그리스도인이 ‘자기애의 해체’라고 할 때 이는 다른 이의 선익을 위하고 공동 선익을 위한 사랑이고자 함이며, 중심이 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 사이에 끼어있는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자기애의 해체는 본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양식이고 스타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말씀으로 전하는 복음화에 앞서 그리스도께 먼저 자리를 내어드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께 자리를 내어드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옆에 동행하는 내가 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고 말 그대로 주인이시게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스타일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항상 중심에 서려고 덤벼드는 나 자신을 극복하면서 주님께서 중심에 계시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그분을 알아모시면,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신다.”(요한 20,19.26) 아예 우리 존재를 없애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리하지도 말며 조용히 옆에 서서 그분을 가리키는 표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때로는 조용히 한쪽으로 물러나 있거나 움켜쥔 손을 풀어야만 한다. 이는 함께 걷는 이가 설령 내 존재를 잊어버리는 듯이 느껴지는 그 순간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어떨 때는, 그것도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내가 중심에 있거나 중심이 되려는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을 뜻한다.
특별히 봉헌 생활을 사는 수도자나 독신을 사는 사제는 그의 고독과 비혼인의 “고자鼓子”(마태 19,12) 상태, 곧 결핍 상태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몸으로 여실히 드러낸다.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마르 10,7-8 마태 19,5-6 에페 5,31)는 것을 거부 아닌 거부로 드러내면서 이러한 상처, 주님께 열린 빈 공간을 지니고 살면서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심임을 몸으로 증거한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일종의 결핍이요 흠이라는 감수성으로 본인이 주님께 속하고 주님과 친밀한 존재임을 전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들은 “세상일을 걱정”하느라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주님의 일을 걱정”(1코린 7,32-34)하면서 보상이나 세속적인 인정이나 성공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말고는 그 무엇도 바라는 것이 없다고 삶을 통해 말하면서, 주님만을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느라 깨어서 호젓하게 오솔길을 간다.
너무 많은 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거나 도외시한다. 마티아스 그륀발트Matthias Grünewald(1470~1528년)의 작품을 두고 칼 바르트Karl Barth(1886~1968년)가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은 그냥 막연하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우리가 실제로 보고 듣도록 하기 위한 시간과 장소를 가리킨다.(칼 바르트, 교회의 교의, 1권 1장 113)』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고 또 그러해야만 한다. 우리는 “황금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묵시 1,13),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어좌에 앉아 계신 분”(묵시 5,6.7)을 가리켜야만 한다. 자기애를 해체할 줄 모르는 사람, “꼴찌”(마르 9,35)의 자리를 선택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알든 모르든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이며, 우상병에 걸린 자이고, 실로 타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이며, 결국 그리스도를 알아모시지 못하는 자이다.(*글은 이탈리아어로 쓰인 Enzo Bianchi의 블로그 https://www.ilblogdienzobianchi.it/blog-detail/post/115891/에서 생각을 얻어 번역한 글이며 저자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첨삭한 부분이 있음. *그림-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