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 행幸

행복이 원하고 추구해서 되는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현재의 자기 행복을 가늠하는 습성을 지닌다.

‘행복’이라는 말마디를 만드는 앞 글자의 ‘행’은 괜히 기분 좋고 포근한 느낌을 주며 영어의 happy를 연상하게 하지만, 한자로 쓸 때는 ‘다행 행幸’이라는 글자를 쓴다. 이 ‘행幸’이라는 글자는 본래 신체의 일부를 묶고 가두어 꼼짝 못 하게 하는 형구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옛날에 죄수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목과 발목을 함께 채우는 칼이나 차꼬의 모양 같은 것이다. 글자를 옆으로 뉘어놓고 보아서 양쪽에 비녀처럼 생긴 빗장을 꽂아 고정하는 형태였다. 그렇게 죄인이 묶이고 감금되었는데, 그것을 풀어헤쳐 자유롭게 되니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자에는 ‘운이 좋다’, ‘행운’, ‘축하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 담긴다. 어차피 ‘인생고人生苦’라는 거푸집에 꼼짝없이 묶여 사는 것이 인생이고 거기에서 풀려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으므로 ‘행幸’은 죽음으로 가능한 것임을 이미 내포한 것일까?

‘다행 행幸’이라는 글자를 ‘요절할/어릴 요夭’와 ‘거스를 역屰’이라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보면서 ‘일찍 죽는 것(夭)을 거슬러(屰) 운 좋게 면했으니 다행’이라는 뜻으로 뜻밖의 행운이나 화를 면한다는 뜻으로 풀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운 좋게 모면한 상황을 놓고 ‘흙 토土’ 더하기 ‘여덟 팔八(→口)’ 더하기 ‘방패 간干’이라는 글자들이 합해졌다고 보아서 흙(土)이 갈라진(八→口) 곳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干) ‘다행이다’라는 뜻으로 풀기도 하지만, 조금 억지스럽다. 어떤 이들은 ‘행幸’이라는 글자와 한 획의 차이밖에 없는 ‘신辛(매울 신辛)’이라는 글자와 함께 뜻을 풀기도 하는데, ‘신辛’이 살갗에 먹물을 집어넣어 문신을 새기는 꼬챙이나 침의 모양에서 유래되었고, 하늘의 뜻을 몸에 새기거나 하늘의 뜻을 어기면 벌을 받겠다는 주술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담았으므로 거기에 한 획을 더해 하늘의 뜻으로 묶임에서 풀어짐을 표현하려 했다고 풀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한 획을 ‘한 일一’이라면서 ‘어떻게든 한 번 매운맛을 보면 뭔가를 깨우치게 되니 이는 다행’이라고까지 한다. 어찌 되었든 얼핏 보기에 서양의 행복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추구로 얻어지는 대상이라면 한자권의 행복이 놓여지고 풀려나며 해체되면서 온다는 수동적 개념인 것만은 부분적일지라도 어떤 면에서 사실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풀이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공식公式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여러 가지로 풀이한다. 행복지수를 얘기하거나 나라별로 세계 행복 보고서를 내놓아 그 나라의 국민 행복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면 틀림없이 행복하다’라는 논제를 내세워 행복을 두고 산출 공식을 논하려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모두가 어불성설이다. 기원전의 플라톤은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한 사람은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연설하면 청중의 절반만 손뼉 치는 말솜씨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했고, 구글 검색창에 ‘행복공식’을 입력하면 수천만 개가 넘는 결과물을 순식간에 제공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혹은 ‘행복은 학력 순이에요’ 하며 행복을 학벌과 학력에 견주는가 하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하며 출생, 출발 배경과 처한 사회적 계층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는 이론도 있고, 행복을 두고 빈부격차니 양극화니 하며 사회 구조 및 제도와 복지 정책에서 논하여 개천에서 용이 난다든지 그렇지 않는다든지 등을 따지려는 논조…등등, 어쩌면 지구상에는 인간 수만큼의 행복론이 있을 것이다. 행복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목적이며 인생살이의 1순위 논제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만족시키고 채워야만 행복하다고 하는가 하면, 만족시키고 채워야 할 욕구를 최소화해야만 행복하므로 ‘소유를 욕구로 나눈 값’이 행복이라 하는 이도 있으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며 실현해야만 행복하다는 주장도 있고, 그 어떤 성취도 없이 한없는 희생이나 고통 그리고 자기 소멸이어도 스스로 새기는 ‘의미’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는 삶도 있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라기보다 네트 워크로 얽힌 전자 알고리즘들의 관리와 인도를 받는 생화학적 기제들의 집합으로 보면서 인간이 행복할 때의 여러 상황을 데이터 분석하여 약물이나 자극을 투입하여서라도 유기물의 화학적인 반응 상황을 기술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행복이라 하기도 한다.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무엇’을 묻는 이 질문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번째 대중 연설도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행복론(산상설교, 마태 5-7장)이다. 그분께서 설파한 그리스도교의 행복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믿고 살아서 나의 삶과 현실에 그분의 다스림과 주도권이 이루어지고, 궁극에 하느님 나라를 얻는 구원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한 삶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두고 기뻐함입니다.(성염 역, 고백록, 제10권 23.33)』라고 한다. 성경은 거듭하여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시편 119,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한다.(20181016 *이미지-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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