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5,31-46(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가’해)

Melozzo da Forlì, Salvator mundi, 1476~1485, affresco strappato, 53,2 x 67 cm, Galleria Nazionale dell’Umbria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주일인 이 축일을 줄여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축일은 1925년(*1924년은 아돌프 히틀러가 ‘Mein Kampf’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소위 독일식 사회주의인 나찌즘을 주창하며 세계의 왕이 되고자 하던 시기였고, 1925년은 러시아에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그 뿌리를 깊숙이 내려 세계 제국을 꿈꾸어가던 시기였다. 오늘도 소위 G2는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툰다) 교황 비오 11세 교황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는 창조된 모든 것들이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을 알아 모시고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인간과 우주의 역사와 시간에 선과 악을 분명히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66,22 2베드 3,13 묵시 21,1)을 열어주실 그분을 흠숭하기 위함이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에서 취하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예루살렘에서 해주신 종말에 관한 말씀(24-25장)의 결론부이다. 시간의 마지막에 관한 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다시 올 것을 중점적으로 선포하신다. 그때에는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며, “그가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태 24,29-31) 재림은 온 우주에 해당하는 우주적 차원의 사건이며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자기가 행한 악행을 아파할 사건이다.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시는 분께서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묵시 1,7)라는 말씀대로 모든 이들이 당신을 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참조. 마태 24,4-44) 후에 ‘깨어있으라’는 경고의 말씀(마태 24,37-44)을 하시고, 이어서 깨어 있음과 영광에 싸여 오시는 분을 맞이하기 위한 책임에 관한 말씀을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으로 종말에 관한 긴 말씀을 마무리하신다. 문학 장르로 보아서는 언뜻 비유처럼 들리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고 은유나 우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묵시적인 내용을 예언적으로 묘사하는 예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마태 25,31)이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역사의 끝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시는 분, 세상 만물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 한없이 낮은 겸손으로 세상에 오시고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신 분, 수난과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분, 역사를 초월하시면서도 하늘과 땅의 창조주요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의 뜻에 따라 역사의 마지막에 영광에 싸여 오시는 분, “사람의 아들”이 오신다. 그분께서 영광에 싸여 오실 때 그분은 지금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신다. 구약성경은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주실 때 천사들과 “거룩한 이들”(즈카 14,5)에 둘러싸여 계시는 분이라고 알려준다. 예언자들이 예언한 “주님의 날”(아모 5,18.20 이사 2,12 스바 1,7 등등)에 다시 오시는 분께서 모든 역사를 심판하러 오신다. 그분께서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 옥좌는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옥좌(시편 9,5.8;11,4 등등)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모습은 참으로 위대하다.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서, 모든 인류가 모일 것이다. 그분은 그 인류를 식별하여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2)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랐으면 “가라지는 거두어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으로 모아들이듯이” 가르실 것이고(참조. 마태 13,24-30.36-43),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잡힌 그물처럼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리듯이” 가르실 것이다.(참조. 마태 13,47-50) 사람의 아들께서 하시는 말씀은 실로 인간의 역사에 선과 악을 둔 마지막 말씀, 결정적인 말씀, 자비를 담았으면서도 동시에 판결을 담은 정의의 말씀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면서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라는 신경의 구절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잊고 살면 정말 큰 일이다.

2. “오른쪽…왼쪽”

온 우주의 임금이신 분 앞에서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두”가 그분의 나라에 받아들여질 것인가 말 것인가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참조. 시편 62,13) 이어지는 복음에서 최후의 심판 장면은 임금께서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판결하시고 그들이 반문하며 그에 따라 주시는 마지막 말씀, 그리고 왼쪽에 있는 이들에게 판결하시고 그들이 반문하며 그에 따라 주시는 마지막 말씀이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이렇게 긍정적 판결과 부정적 판결이 똑같은 문장과 문형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으신” 임금의 판결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거의 의문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이 무척 단순한 기준 하나만이 제시된다.

인간적인 약함으로 악행이나 죄를 짓고 안 짓고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롭다. 구원과 멸망, 생명과 영원한 벌의 기준이 죄가 아니라는 것은 놀랍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거슬러 하느님을 원망하고 욕했는가, 안식일을 지켰는가, 종교적인 관습을 성실히 따랐는가 하는 것들 역시 기준이 아니다. 임금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고의 기준은 인간들끼리의 관계이다. 특별히 불행한 처지나 배고프고, 목마르며, 나그네이고(소외되고), 헐벗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내용뿐이다. 이런 상황을 맞았던 사람들을 두고 내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것만이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다. 많은 이가 그러한 이들이 나의 인생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과 내가 결코 분리된 존재나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불과 얼마 전 우리는 Covid-19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혼자만 잘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절하게 절감했고 또 절감하고 있다.

온 우주의 임금이신 분께서는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한다. 구원은 다른 인간들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에 달려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였는가, 아니면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지나쳤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나의 행위로 이미 이 땅에서 내 생애 동안 나의 판결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결국 마지막에는 판결만이 있을 뿐이다. 예배와 전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몸이 부딪히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손과 손을 맞잡고 인간의 살이 다른 인간의 살과 어떻게 부대끼며 함께 살았는가로 구원이 결정된다. 그런 의미로 혼자만의 구원은 없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착한 지향만도 아니며, 감정도 아니고, 기도만도 아니다. 행동이고 태도이며 구체적인 책임이다. 우리의 모든 전례와 기도, 그리고 성사들이 사랑,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참조. 마태 5,43-48)을 추구하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것이며 무익한 것일 뿐이다.

3. “주님, 저희가 언제…”

그렇지만 임금의 마지막 판결에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건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건 의아스럽다는 듯이 임금께 반문한다. 그들은 “언제” 저희들이 그렇게 했고, 또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의인들”의 반응이 의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께 그런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반문한다.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숨어계신 분이시고 찾기 힘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행한 것은 사람의 아들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고 선한 일을 선한 일이기 때문에 그저 했을 뿐이라는 얘기이다.

사악한 행위이거나 선한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형제자매들과 살아가는 방식과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관해서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12.20)라는 요한 사도의 편지글은 항상 중요한 가르침이 된다.

임금 앞에 있는 이 두 부류의 사람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든, 아니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든지, 모든 이가 예수님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45)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것으로 판가름 된다.

이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나로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선행을 베풀지도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살아왔든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득해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의 심판날에 내게 주어질 심판의 기준일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의 몸을 내 몸으로 살아 보살피고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다른 한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위해 수없이 나도 모르는 기도는 했을지언정 그들을 진심으로 보고 알지 못했으며 다가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저주! 오늘 복음은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귀한 은총의 복음이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우리는 과연 “복을 받은 이들”이고 “의인들”인지에 관해서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눈치를 보면서 가게를 얼씬거렸던 배고픈 사람들에게 우리 주머니를 무겁게 하여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동전만을 내어 주지는 않았는지, 나그네 되었던 이들에게 성탄절에 우리가 자선한다면서 베풀었던 음식물 몇 가지나 쌀 한 줌으로 우리가 할 바를 다했다고 자위하지만 않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합리성으로 그들을 결코 우리의 식탁이나 우리의 집에 초대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 헐벗은 이들에게 우리의 옷장에 가득한 옷 중에서 유행이 지난 옷 몇 가지를 내놓았을 뿐이었음을, 감옥에 갇힌 이들을 두고는 험악한 그들이 있는 곳에 감히 그들을 찾아보거나 어떤 형태로든 그들과 연결 지어지는 것이 두려웠음을 솔직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평생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가 임금의 판결로 가려질 것이다.

『(현대 사회 안에서 어느 샌가) ‘심판이라는 주제가 한낱 우스개나 농담의 소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뭔가 불확실한 이야기, 그리고 그저 재미난 이야기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심판’이라는 주제가 인간 실존의 전체를 바꾸어 놓던 시대가 있었다.(쉐렌 키엘케고올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년)』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신자로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경각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다.

성인은 『‘내 것을 내 맘대로 하는 데 이를 두고 누가 뭐라 하는가?’ 하고 욕심쟁이는 말한다. 과연 네 것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네 인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너를 살게 한 이가 누구이더냐? 부자들이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극장에 자기 자리를 한 자리 사 놓고 마치 그 극장 전체가 자기 것인 양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려는 이들과 유사하다.…모두가 자기의 필요 때문에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뿐이라며 모든 것을 가지려 들고, 그렇게 해서 정말 뭔가가 필요한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부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 누구도 가난한 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가진 재화요 부라는 것이 어디에서 왔더냐? ‘우연히’ 얻었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일 것이고 창조주 하느님을 알아 모시지 않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을 너에게 허락하신 분을 알아 모시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네가 그것을 ‘하느님께로부터’ 얻었다고 인정한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것을 너에게 허락하셨을지를 설명해 보아라.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재화를 각 사람에게 달리 허락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정의로우시지 않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네가 부자이고, 또 어떤 이유로 다른 이가 그렇게도 가난한지를 설명해야만 할 것이 아니냐? 혹시 네가 너의 착함이나 또 네가 받은 것을 잘 관리하여 그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풍성한 부를 허락하시고 보상하셨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혹시라도 그 모든 것이 네 은밀한 탐욕의 보따리에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것을 훔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볼 일이다.

누가 욕심쟁이이고, 누가 과연 만족하지 못하는 자이며, 누가 도둑이고 강도이며, 누가 과연 각자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챈 자이더냐? 네가 욕심쟁이이고 네가 강도는 아니더냐? 알몸으로 헐벗게 된 자가 도둑이요 강도라고 불리게 된다면, 제대로 입고 있는 자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옳으냐? 네가 네 자신을 위해 가진 빵은 굶주린 자의 빵이며, 네가 옷장에 보관한 여벌 옷은 헐벗은 자의 옷이고, 네 신발장에 네가 보관하고 있는 신발은 맨발로 걷는 자의 것이며, 네가 땅에 묻어 숨겨둔 돈은 그것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의 것이다. 다른 이들을 돕기는커녕 그렇게 다른 이들을 위해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자가 바로 너이니라.(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330~379년, 설교Omelia 6,7, PG 31,276b-277a)』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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